독재는 필연적으로 탄압을 불러온다. 소위 '온정적 독재', 즉 일시적이나마 사회와 민족의 발전에 기여하는 독재조차도 그 끝을 보자면 폭력으로 민중과 반대파를 탄압하기 십상이다. 콜롬비아의 시몬 볼리바르, 튀르키예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같이 독립의 영웅 출신이며 여전히 제 나라에서 폭넓게 존경받는 지도자라 할지라도 거둔 성과에 비해 독재가 낳은 문제가 더 큰 게 아니냐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물며 독립운동은커녕 권력만 탐하며 정치생명만 연장하기 십상인 평범한 독재야 백해무익한 것이 아닌가. 불행히도 한국이 겪어낸 독재가 꼭 그와 같은 것이었다.
독재의 가장 흔한 변명은 국민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 얘기겠다. 한국에서도 꼭 그와 같은 명분을 내세워 군사반란을 일으킨 이가 둘이나 되지 않던가. 그중 하나는 오늘 한국 정치에도 여전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고 말이다. 스스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성장의 상징이 돼 민주주의 탄압이며 인권말살과 같은 과오조차 반대급부쯤으로 관대히 평가받는 박정희가 바로 그다.
군부독재가 만들어낸 가족의 비극
<나의 독재자>는 한국 군부독재 시대를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시대적 배경은 7.4 남북공동성명 뒤 남북정상회담까지 앞두고 있던 1972년, 또 분당을 포함한 1기 신도시 개발사업이 한창 진행되던 1989년이다. 실제 역사와 달리 17년의 시차를 둔 두 시대의 권좌엔 한 인물이 앉아 있으니 역사물이라기보다는 현대사를 배경으로 빌려온 창작영화라 해야 옳겠다.
성근(설경구 분)은 극단에서 만년 허드렛일만 하는 말단 배우다. 말이 배우지 맡는 배역이라곤 거리의 행인5, 식당 종업원2 따위의 보잘 것 없는 단역이다. 조연도 아닌 단역, 말 그대로 허수아비처럼 세워만 놓으면 그만인 역할만 그의 차지로 떨어진다.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연기에 대한 열정과는 별개로 막상 무대에 오르면 울렁증이 도져서 극을 망치지나 않으면 다행인 때문이다.
어느날 성근에게 주역을 연기할 기회가 뚝 하고 떨어진다. 그것도 다름 아닌 '리어왕'에서 주인공 리어왕을 연기할 기회다. 본래 주인공을 맡기로 했던 배우가 연출자와의 갈등으로 갑자기 하차했다. 표도 다 팔았겠다, 극을 망칠 수는 없어 연출자는 리어왕을 대체하기로 결정한다. 당장 내일이 공연인 상황, 대사라도 다 외운 이에게 리어왕을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연인 듯 필연처럼 그 역할은 대사를 모조리 외운 잡부 성근에게 돌아간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다. 성근은 연극을 대차게 말아먹는다. 가장 중요한 순간 등장해 어버버 얼타다 관객 앞에 제가 모든 것을 까먹었단 걸 드러내고야 만다. 주연을 맡았단 사실에 잔뜩 신이 나서 어머니며 아들까지 불러왔던 성근은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한다.
분단된 조국의 판타지 역사극
영화는 성근이 끔찍한 연기력을 보인 탓에 중앙정보부가 남몰래 꾸미고 있는 '대통령에게 남북정상회담 예행연습 시키기' 프로젝트에 발탁되는 이야기로 흘러간다. 대통령에겐 바깥에 알릴 수 없는 울렁증이 있고, 그로 인해 북한의 김일성을 만나기 전 그와 닮은 이를 만나 회담을 하는 연습을 해보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얼굴이 알려진 배우를 쓸 수는 없는 일이다. 연기를 너무 잘 해서도, 자의식이 강해도 안 된다고 하니 담당자는 성근을 딱 제격으로 캐스팅하기에 이른다.
말이 캐스팅이지 성근은 그 무섭다는 남산으로 끌려가 어느 방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 방엔 연기를 지도하는 허 교수(이병준 분)와 공산주의며 주체사상에 대해 빠삭한 대학생 철주(이규형 분)가 함께 들어갔다. 이들이 성근으로 하여금 대통령 앞에서 김일성을 무리 없이 연기해내도록 훈련을 시키는 임무를 맡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1972년과 1989년을 오가며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과거 성근은 실력 없는 배우이자 좋은 아빠였으나, 남산으로 끌려가 얻어맞아가며 김일성을 연기하게 된 이후로는 아버지 노릇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고 만다. 극단적인 상황 가운데 배역과 자기를 구분하지 못하고 스스로가 김일성이라고 믿게 되고만 것이다. 자연히 일상생활이 버거워지고, 아들인 태식(박해일 분)에게도 신망을 잃을 밖에 없다.
1989년 태식은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인 전형적인 젊음이다. 겉만 번지르르 외제차와 세련된 양복을 입고 다니지만, 속을 뜯어보면 정상인 것이 없을 정도다. 차는 잔고장 많은 구형 모델이고, 현재는 다단계 업체에서 사람들을 속여가며 하자 많은 물건을 파는 신세다. 심지어는 대부업체에 빚까지 내서 일수쟁이들에게 독촉까지 당한다. 그렇게 몰리고 몰리다 하늘이 번쩍 열릴 길을 알게 되니, 바로 분당 신도시 개발이다.
태식은 어려서 분당에서 자랐다. 아무것도 없는 지지리도 가난한 동네였다. 아버지까지 엉망이 되고나니 태식에게 분당은 벗어나고만 싶은 땅이었다. 그런 동네가 한순간에 재개발, 그것도 신도시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대규모 토지수용이 될 터였다. 그렇다면 제 때, 제값에 팔아야 한다. 아버지의 인감도장이 어느 때보다 간절하다.
영화는 태식이 성근을 찾아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담는다. 그로부터 십수 년의 시차, 그보다도 많은 심정적 거리를 뚫고서 아들이 제 아버지의 뒤틀림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그려내려 든다. 다분히 비현실적이고 유치하며 엉성한 영화다. 하나하나 그 개연성을 뜯어보겠다고 달려들면 죄다 뜯겨져 개발을 앞둔 분당 옛 동네처럼 태식의 집만 빼고 죄다 허물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영화는 다짜고짜 돌입하는 판타지다. 아버지를 이해하는 아들의 이야기, 독재정권의 권력남용과 무단통치가 아니었다면 결코 나쁜 아버지가 되지 않았을 성근을 태식이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건 독재다. 독재가 가져온 폭력이다. 그 폭력이 성근을 저와 김일성을 동일시하는 반쯤 정신 나간 이로 만들어 버린다. 중정에서의 연기연습부터 정신병에 대한 묘사까지가 다소 엉성하긴 할지라도, 감동과 이해로 나아가는 드라마만큼은 완전히 허물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나의 독재자>는 얼마든지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세대와 시대를 이해하려는 시도
현실 가운데 성근과 같은 이가 없다고 할 수 있으랴. 한국 현대사는 이 땅에 수많은 간첩조작 사건과 국가에 의해 저질러진 고문과 폭력, 강간 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공직자에게 맞아죽은 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꾸며지고, 아무 죄 없는 농부며 어부들이 간첩이 되고 그 가족들은 연좌제에 시달렸다. 그 과정에서 제 정신으로는 살 수 없게 된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았을까.
그런 모든 죄의 정점에 있는 이를 향해 조국발전의 영웅이니, 경제화의 주역이니 하고 추켜세우는 일이 2024년 한국에서 버젓이 벌어진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가만 보면 잘 알지 못해서다. 살펴보면 잘 알려하지 않아서다. 그렇게 편히 사는 대로 산 결과로써 우리는 성근과 태식의 고통이 부당한 국가의 잘못으로부터 기인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설경구와 박해일이란 걸출한 두 배우가 전력을 다해 연기하는 작품 <나의 독재자>는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 여러 제약 가운데 꿈꾼 그대로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해도, 이 영화를 기록하려 하는 건 작품이 여전히 유효한 과녁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