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고강도 압박을 받는 화웨이가 지난 10일 세계 최초의 트리플 폴더폰을 출시해 미국의 중국 제재를 무색게 만들었다. 이런 장면에서도 나타나듯이 중국의 승승장구하는 기세를 미국이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럴 경우, 국익에 따라 어느 노선을 택할지 고민하게 되는데 사실 어느 한 쪽을 딱 부러지게 선택하는 건 쉽지 않다. 선택하기 힘들다면, 적어도 균형이라도 유지해야 한다.
미국·일본·호주와 합세해 중국을 견제하는 쿼드(Quad)에 참여하는 인도는 중국과 연대하는 러시아와도 제휴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인도는 미국의 중국 압박 속에서도 러시아산 원유를 값싸게 수입하고 있다.
인도보다도 균형을 더 잘 타는 나라는 베트남이다. 요즘 베트남은 미·중·러를 골고루 애태우고 있다. 바이든과 시진핑과 푸틴이 각각 베트남을 방문한 것은 이 나라가 아직은 속을 완전히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진핑이 저 멀리 베트남까지 찾아간 것은 베트남의 균형외교가 실효를 거두고 있다는 방증 아닐까.
외국과 손 잡고 동족에 맞서다
지도자가 엄연한 국제 정세를 무시하면 나라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우씨왕후>의 고발기가 1827년 전에 온몸으로 보여줬다. 이 드라마 제8회에서 묘사됐듯이 그는 고구려 왕족이면서도 외국과 손잡고 동족에 맞서 전쟁을 벌였다.
고발기가 자신을 배제하고 왕권을 차지한 형수 우씨와 동생 고연우에게 창칼을 겨눴다. 과연 이 행동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그의 군사행동은 당시의 시대 흐름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고발기는 형인 고국천태왕(고국천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한 197년에 형수와 동생의 제휴 때문에 왕위계승에서 배제됐다. 1순위 계승권자였던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왕권을 차지한 동생 고연우와 '왕후 연임'에 성공한 형수 우씨를 상대로 군대를 일으켰다.
이 시점은 한나라(BC 202~AD 8)를 계승한 후한(25~220)이 쇠락의 길을 걷고 위·촉·오 삼국시대(220~280)가 등장하기 얼마 전이었다. 그래서 중국대륙에서 통합보다는 분열의 에너지가 훨씬 크게 작동할 때였다.
그런 경향은 만주(요동)에 대한 후한의 영향력 약화를 초래했다. <우씨왕후>에 거명되는 공손탁이 요동태수가 된 189년 이래로 후한 요동군은 사실상 독립국이 됐다. 후한과 고구려 사이의 요동이 이렇게 됐기 때문에 후한이 고구려를 압박하기도 힘들고, 요동군이 중앙정부의 지원하에 고구려를 압박하기도 힘든 형국이 조성됐다.
이 상황을 포함해 후한의 중앙집권력이 약해지는 서기 2세기는 중국을 압박하는 고구려에 유리한 시대였다. 184년에 고국천태왕이 요동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도 이런 시대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후대의 광개토태왕(391~413)·장수태왕(413~491) 때만큼은 아니지만, 고발기 반란 이전의 만주는 한나라보다 고구려 쪽에 훨씬 더 기울어 있었다. 동쪽이 서쪽을 압박하는 기운이 왕성했던 결과다. 후한이 존재할 때 고구려를 이끈 태조대왕(재위 53~146)과 차대왕(146~165)의 시대에 대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아래와 같이 기술한다. 인용문 속의 '조선'은 한민족 전체를 가리킨다.
"태조·차대 두 대왕 때는 고구려가 조선 전체를 통일하지는 못했어도, 고구려의 국력이 매우 강성했기 때문에 조선 안에서는 고구려에 필적할 세력이 없었다. 그래서 고구려가 한나라를 쳐서 요동을 점령하고 직예·산서 등지도 침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쪽 고구려가 북중국을 깊숙이 공격할 정도였다. 이 정도로 서쪽 중국에 대한 동쪽의 압력이 커지던 시절에 고발기는 엉뚱한 짓을 저질렀다. 서쪽에 가담해 동쪽을 치는 대열에 가담한 것이다.
만주 땅을 중국에 갖다 바친 고발기
그는 형수와 동생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신이 관할하던 만주 땅을 중국에 갖다 바쳤다. 그 대가로 빌린 군사력을 갖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신채호는 "결국 고발기가 요동을 바치고 공손탁에게 항복했다"라며 "이로써 고구려는 인민이 가장 많고 토질도 비옥한 만주 땅을 잃고 약소국으로 전락했다"라고 안타까워 했다.
고발기는 고구려 방어에 결정적인 안시성마저 한나라에 넘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훗날 양만춘 장군이 당나라 태종(당태종)과 접전을 펼치게 될 안시성마저 고발기 때문에 중국에 넘어갔다. 신채호는 "이곳은 일찍이 태조대왕이 서북을 경영할 목적으로 설치한 성"이라며 "고발기의 난 때 중국에 빼앗겼다가 고국양왕이 이곳을 수복한 적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이 성의 가치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곳은 해상과 육상의 요충지라서 성첩을 더 쌓고 정예병을 배치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항상 수십만 석의 양곡을 비축해두었다. 그래서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불린 지 오래였다."
난공불락의 요새라 중국이 쉽게 차지할 수 없었던 곳이 고발기의 반란 때문에 쉽게 넘어갔던 것이다. 이처럼 고발기는 동쪽이 서쪽을 압박하는 시대 흐름에 역행하고 이에 제동을 걸었다. 이 때문에 만주는 엉뚱하게도 중국에 넘어가게 됐고, 고구려는 후대의 수복을 기약해야만 했다. 객관적인 시대 흐름에 역행하며 고구려를 해치는 일이 다른 곳도 아닌 고구려 내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국운을 방해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외국을 등에 업는 방식이 아닌,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방식이 아닌, 제3의 길을 걸었다면 그와 우씨의 대결이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분노를 억제하지 못한 데다가 시대 흐름마저 역행하는 방식으로 뜻을 이루려 했기 때문에 그의 실패 가능성은 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흐름은 동쪽의 기운이 서쪽의 기운을 누르는 형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발기라는 엉뚱한 인물이 나타나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분탕질을 일으켰다. 천(天)이 만들어준 호기를 인(人)이 거부하는 형국이었다.
'인'이 거부하자 '천'은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다. 그래서 고구려는 한동안 어려운 길을 걸어야 했다. 고발기 같은 인물이 지도자급 위치에 있었던 결과로, 고구려는 자국에 유리한 객관적 형세를 활용하지 못한 채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