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자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인간이다. 살아온 시대, 겪어온 사연들이 그대로 지각이며 사고의 틀을 이루는 탓이다. 왕정이 굳건한 시대엔 제일의 가치이던 충성이, 오늘날 시민사회에선 미덕 취급도 받지 못한다. 적극적으로 추파를 던지는 게 사내다움의 표상인 문화권에선 하나하나 여성의 동의를 구하여 전진하는 연애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서로가 다른 이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제 것만이 옳다 여기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가.
서로 달리 사고하는 두 사람이 함께 공존하기 위하여선 선을 넘지 않는 존중이 필수적이다. 나는 너와 달리 생각하지만 너의 다름을 존중한다고, 상대의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공존의 시작이다. 이해가 아닌 무조건적 인정, 진정한 존중에는 이르지 못하는 용인이다.
그러나 때로는 다름을 인정하기 어렵다. 경계란 가까운 관계일수록 쉽게 넘게 되고는 하는 것이 아닌가. 가족이 바로 그렇다.
누구보다 가깝지만, 누구보다 먼
개인의 자유며 존엄이 최고의 미덕처럼 여겨지는 오늘이지만 언제나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개인보다 가족이 훨씬 더 중했던 시간이 얼마만큼 길었는가. 대대손손 난 곳에서 죽기를 택했던 옛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서 도시로 옮겨가던 반세기 전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었듯이, 또 가족을 위해 모든 걸 내버렸던 지난 시대 사람들이 시어른들에게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려줄 수 없다는 똑소리 나는 며느리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세상은 빠르게 뒤바뀌고 새 것이 옛 것보다 나은 척 행세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서로 닿지 못하는 둘 사이에서 쉬이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무엇이 낫고 다른 무엇이 못하다고, 어떻게 감히 판정할 수 있을까.
<딸에 대하여>는 누구보다 가깝지만 그래서 누구보다 먼 가족의 이야기다. 엄마(오민애 분)는 요양보호사다. 요양원에서 VIP로 꼽히는 어르신 이제희(허진 분)을 성심껏 돌보는 게 그녀의 일이다. 한 병실에 서너 명씩 들어찬 환자를 홀로 돌보는 다른 요양보호사와 달리, 그녀의 일을 수월하면서도 섬세하다. 혼자 병실 전체를 쓰는 제희에게만 온 정신을 쏟으면 되는 것이다.
제희는 한때 성공한 작가였고, 빈국의 여러 아이들을 아낌없이 도와온 재력가였다. 하지만 가정을 꾸리지 않았고 마침내 오락가락 하는 정신의 늙은이가 되어 요양원에 들어온 것이다. 그녀가 설립한 재단에서 신경을 써준 것도 처음 몇 년 뿐, 이제는 한 해 동안 한 번도 찾지 않을 만큼 방치된 상태다. 처음엔 제법 드나들던 언론사 방문도 뜸해져서 병원 내 제희의 위상도 전과 같지 않다. 경영이 어려워졌단 이유로 재단이 요양원 지원까지 중단하자 병실에 다른 침대를 넣고 비품 사용도 줄이라는 통보가 떨어진다.
성소수자 딸이 못마땅한 어머니의 마음
엄마에겐 제희 말고도 신경 쓰이는 일이 하나 더 있다. 30대 중반이 된 딸(임세미 분)이 집으로 들어온 것이다. 혼자만이 아니라 제 짝(하윤경 분)까지 함께다. 그렇다. 딸은 벌써 7년째 여자와 사귄다. 본명을 놔두고서 레인이며 그린이라고 서로를 부르는 꼴이 엄마는 마뜩찮다. 한때 불장난인 줄 알았던 것이 먹을 만큼 먹은 나이까지 이어지다니. 제 집 2층에 세를 든 새댁네 가족처럼 평범한 정상인의 삶을 살아주길 바랐을 뿐이다. 그게 그리도 어렵다는 말인가.
남편을 여의고 홀로 된 세월이 긴 엄마다. 요양원에서 일하며 본 자식도 배우자도 없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나. 지금이야 젊다지만 딸이 마침내 마주할 쓸쓸함과 외로움이 벌써부터 제 가슴을 아리게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딸은 엄마의 속도 모르고 엉망진창 사는 모양이다. 돈도 없는지 집도 구하지 못하고 손을 벌리고 마침내는 애인과 함께 제 집으로 들이닥치지 않았나. 둘을 보고 있자면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딸에 대하여>는 요양원과 집을 오가며 엄마가 마주하는 답답한 세상을 그린다. 피붙이 없이 남겨진 제희는 일생을 존경받아 마땅한 삶을 살고도 마땅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가족이 없어서다. 그녀에게 도움 받은 남들은 죄다 등을 돌리고선 책임지려 들지 않는다. 제희를 돌보며 마음을 준 엄마가 그녀를 지키려 하는 과정이 버겁기 짝이 없다. 왜 그리 마음을 쓰느냐고, 가족도 아니지 않느냐는 말이 얼마나 무정하게 들리는가.
편들지 않고 비추는 자세
그러나 집 안으로 돌아오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제 딸과 그녀의 애인 사이를 엄마는 인정할 수 없다. 결혼이란 제도로 묶일 수 없는 사이, 언젠가는 홀로가 될 그네들의 관계가 철없는 시절의 결정처럼만 보인다. 엄마가 본 세상을 딸은 알지 못한다. 딸이 아는 세상 또한 엄마는 이해할 수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서지 못한 채로 그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가 된다.
영화는 엄마와 딸, 어느 한 편의 편을 들지 않다. 어느 한쪽의 사정만을 부각하여 다른 이를 어리거나 또 이해하지 못하는 답답한 존재로 남겨두지 않는다. 엄마의 시선에서 딸은 제가 아는 것을 알지 못하는 존재일 수 있겠다. 딸의 입장에선 엄마는 제가 사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아는 이다. 그러나 그 모두가 반만 맞고 반은 틀리다.
영화는 딸과 또 다른 층위에서 저와 피가 섞이지 않은 이를 지키려 드는 엄마의 모습을 비춘다. 딸이 저와 같은 지향을 가진 이를 조건 없이 돕고 연대하려 하듯이, 엄마 또한 제가 돌보던 어르신을 지키려 하는 것이다. 피로, 제도로 묶이지 않더라도 홀로가 아닌 세상이 있을 수 있단 것을 그들은 그렇게 이해해 나간다. 그러며 한편으론 피로, 제도로 묶이지 않은 세상의 냉정함을 알아가기도 한다.
판단에 앞서 이해를... 이 영화가 전하는 것
영화는 김혜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엄마와 딸, 또 엄마가 돌보는 할머니와 딸의 애인인 여성 사이에 이어지는 핏줄과 제도를 넘어선 연대를 그린다. 요양원을 운영하면서도 이득만 밝히는 남성 사무장, 제희의 기부로 재단을 운영했으면서도 이득을 볼 것이 사라지자 모른 척하는 남성 책임자의 모습은 참담하기만 하다.
영화는 탁월하다 하긴 어려워도 공감할 대목이 많다. 살아온 시대와 겪어낸 경험의 차이에도 엄마가 딸의 사정을 저의 활동 안에서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 신선하다. 영화를 통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 가운데 누군가 느끼고 있을 제도의 결함을, 그 부당함을 관객에게 일깨운다는 점도 의의가 크다.
선 곳이 달라지면 시야 또한 달라진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의 꽉 막힌 생각이 그의 최선일 수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역경을 온 힘을 다해 뚫고 나온 결과일지 모를 일이다. 나의 열린 사고가 그저 평화로운 시절을 지내온 덕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판단보다는 이해가 중요한 것이 삶과 세상일 수 있겠다. 우리는 과연 서로를 충실히 이해하려 하는가.
<딸에 대하여>가 가진 무시할 수 없는 미덕이라면 우리 곁에 누구를 다시 한 번쯤 제대로 바라볼 기회를 준다는 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