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토끼 굴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토끼 굴에 들어갔다가 모험을 시작한 것처럼 사랑에 빠진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난다. 서로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더 다정해지고, 친절해지는 세상. 처음 보는 이들과 같은 이름으로 묶여 거대한 유기체가 되는 세상. 그 굴에는 '팬덤'이란 표지판이 걸려있다.

지난달 30일, 영화관을 찾은 건 취재와 효도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서였다. 동행한 할머니는 임영웅이 알싸하게 매운 김치를 좋아하고, 어떤 축구단을 운영하고, 주변 동료들과 어떠한 관계인지 꿰차면서도 "팬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손녀인 내가 보기에는 임영웅을 손자로 생각하는 거 같은데. 할머니와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을 보고 나오는 길, 우리는 파랗게 빛나는 토끼 굴을 만났다. 영화의 숨은 주인공 '영웅시대'에게 가는 길이었다.

20대와 70대, 친구가 되다

 임영웅이 그려진 팝콘 통을 구매했다

임영웅이 그려진 팝콘 통을 구매했다 ⓒ 이진민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은 지난 5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진행한 임영웅의 스타디움 입성기를 담은 영화다. 영화관을 찾은 이들은 대부분 팬덤의 상징색인 하늘색 옷을 입고 있었다. 평범한 스타일에 하늘색 키링, 스카프, 가방을 더해 팬심을 부착하기도 했다.

저마다 임영웅 얼굴이 그려진 팝콘 통을 들고서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다들 아는 지인들끼리 함께 온 건가, 한참 두리번거리다 눈에 띄는 조합을 발견했다. 20대 언저리로 보이는 어린 팬이 다른 팬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는 키오스크 사용이 낯선 팬들을 대신해 임영웅이 그려진 팝콘을 구매해 주고 관람 후 특전 선물을 받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슬며시 그들 사이에 꼈다. 대화 주제는 당연히 '임영웅'이었다. 콘서트 티켓팅이 너무 힘들어서 온 가족을 동원했다는 일화부터 영화관마다 특전 선물이 달라 벌써 N차 관람을 찍었다는 이야기나 최근 방영한 JTBC < 뭉쳐야 찬다 3 > 속 임영웅의 활약에 저마다 입담을 터뜨렸다. 멍하게 쏟아지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를 당혹하게 한 건 할머니의 태도였다.

"우리 영웅이가"로 시작하는 할머니의 문장들은 그가 부른 노래가 얼마나 좋았는지, 주변 선후배들에게 싹싹하고 귀감이 되는지, 지난 방송에서 명장면은 무엇인지까지 돌고 돌아 그를 "더 사랑해야 한다"는 다짐으로 끝났다. 할머니 부동의 '최애'는 손녀인 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우리', '소중한', '사랑하는'과 같은 수식어는 임영웅 앞에도 붙는 거였다. 물론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임영웅의 모든 문장은 '영웅시대'로 끝난다

 MZ 인증샷처럼 특전 선물을 촬영했다

MZ 인증샷처럼 특전 선물을 촬영했다 ⓒ 이진민


영화를 보기도 전에 '영웅시대(임영웅 공식팬카페)'의 힘을 알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니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는 콘서트 당시 모습과 준비 과정을 교차하며 하나의 공연을 위해 임영웅과 스태프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분투했는지 담았다. 그들이 나눈 대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건 '영웅시대'였다.

무대 감독도, 공연 스태프도 모두 "영웅시대에게 좋은 무대를 보여주고 싶다"고 다짐했고 실제 대면한 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으며 자부심이 커졌다고 했다. 영화를 보면서 새삼 사랑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대상이 스타라 하더라도 우리는 새삼스러운 방식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걸 배웠다.

영화를 관람하고 찾아간 식당에서 '영웅시대'를 만났다. 그들은 하늘색 점퍼를 입었고, 우리는 임영웅 포토 카드를 들고 있어 알아볼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식사 맛있게 하시라"는 말이 오갔다. 할머니는 밥을 먹는 내내 임영웅 이야기를 하셨다. 벅찬 표정으로 임영웅을 자랑하는 할머니에게서 언뜻 내 모습이 스쳐 가기도 했다.

사랑한 만큼 가벼워진 지갑

 영화 '임영웅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 중 한 장면.

영화 '임영웅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 중 한 장면. ⓒ CJ CGV


할머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건 사실이지만, 어쩐지 씁쓸하기도 했다. 연예인을 좋아하다 보면 어딘가 헷갈리는 지점이 있다. 팬들과 더 가까이, 자주 만나기 위한 스타의 선택이 자본과 결합할 때 일정 부분은 마케팅,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상술'이 되기 마련이다.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처럼 공연 실황 영상을 보여주는 '콘서트 필름'은 침체한 극장가에서 떠오르는 알짜배기 상품이다. 실제로 이 임영웅의 영화는 여름 성수기 끝자락인 지난달 마지막 주에 개봉해 할리우드 대작 '에이리언: 로물루스'를 제치고 매출액 기준 주말(지난달 30일~이달 1일)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같은 기간 누적 관객 수 8만 7000여 명으로 관객 수 기준으론 흥행 3위였으나 매출액(25억 원)에선 '에이리언'(22억 원·22만 3000여 명)을 앞섰다.

이처럼 '콘서트 필름'은 누적 관객 수는 적지만, 반드시 관람하는 고정 팬덤이 있기에 개봉관이 적어도 매출액을 올릴 수 있다. 김호중은 <그대, 고맙소 : 김호중 생애 첫 팬 미팅 무비>로 31억 원을 기록했고 임영웅은 지난 2022년 12월 전국 투어 앙코르 공연 현장을 담은 <아임 히어로 더 파이널>로 60억 5971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콘서트 필름'은 IP를 보유한 소속사와 협의한 후 티켓값이 결정되기에 상대적으로 비싸다. 임영웅의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은 일반 2D 영화가격인 1만 5000원 보다 비싼 2만 5000원이다(일반 성인기준). 거대한 스크린을 자랑하는 아이맥스는 3만 5000원의 표를 사야 '내 스타'의 얼굴을 크게 볼 수 있다. 게다가 이 영화는 만 65세 이상의 노인 할인이나 문화가 있는 날 반값 할인이 적용되지 않는다.

게다가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은 상영관별로 특전 선물이 다르다. 임영웅이 새겨진 다양한 굿즈를 갖기 위해 같은 영화를 여러 번 관람하는 'N차 관람'을 생각하면 까마득해진다.

한참 K팝을 사랑할 때 나도 'N차 관람'은 물론, 함께 노래 부르는 '싱어롱관'과 팬들끼리 따로 대관해서 즐기는 '특별 관람'까지 다녀왔으니. 사랑해서 마음은 두둑해지지만, 지갑은 가벼워지는 상황은 모든 팬을 웃으면서 체념하게 만드는 걸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직접 콘서트를 보면 정말 멋있을 거 같다"는 할머니의 말에 다시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런 할머니에게 "내가 노트북으로 타이핑은 잘하는데 티켓팅은 자신이 없어"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임영웅 영웅시대 IMHEROTHESTADIUM LIMYOUNGWOONG 임영웅팬덤
댓글2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탔습니다 글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