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기 중 파면을 맞았다. 국정운영 초반부터 심각한 수준의 실정을 거듭한 끝에 맞이한 결말이다. 그와 같은 지도자를 만나 거꾸로 끌려간 지난 시간은 가히 절망이었다. 그러나 헌정 질서 안에서 무도한 지도자를 끌어내린 일 만큼은 희망의 단초로 읽어낼 여지가 있다.
한강의 기적을 일구고 민주화를 이룩한 자랑스러운 역사로부터 쇠락의 징후가 역력한 위기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책임졌던 지도자들을 생각한다. 87년의 불완전한 민주화를 상징하는 노태우부터 김영삼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에 이르는 8명의 지도자 가운데 진정으로 국민적 존경과 지지를 받는 이가 몇이나 되는가를 떠올리면 씁쓸해지는 마음을 지울 길 없다.
그런 한국, 나아가 한반도의 역사 가운데 대다수 국민이 한 마음으로 존경하는 지도자가 있다. 575년 전인 1450년 4월 8일 세상을 떠난 세종대왕 이도가 바로 그다(문화재청 제향 기준,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 간 오차로 양력 3월 30일을 실제 기일로 바꿔야 한다는 해석도 있다).
세종대왕의 굵직한 업적만 나열해도 다음과 같다. 독자적 문자인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독자적 천측과 역법으로 조선의 달력을 제작했으며 그로써 잠시나마 한반도 백성들이 중국과 다른 독자적 시간을 갖도록 했다. 군사와 경제, 문화, 학문이 세종대에 이르러 모두 전성기를 맞이했고, 의정부 서사제 등 정치체제를 정비해 조선왕조 500년을 지탱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조선을 넘어 한반도 역사 전체를 통틀어 태평성대라 부를 시기가 있다면 바로 이 때일 테다.
▲뿌리깊은 나무포스터
SBS
시청률 두배로 끌어올린 배우의 존재감
태평성대라 해서 갈등이며 역경이 없었겠는가. 도리어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하여 보이지 않는 갈등과 역경을 수도 없이 겪어내야 했을지 모를 일이다. 세종대왕을 주인공 삼은 콘텐츠 가운데 특별한 성취를 거둔 <뿌리깊은 나무>가 그리는 것이 꼭 그와 같다. 드라마는 2011년 말 SBS에서 방영된 24부작 사극이다. MBC 사극 <선덕여왕>을 성공시킨 김영현과 박상연이 이정명의 동명소설을 뼈대 삼아 공동으로 집필했다. 한동안 드라마에선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한석규를 세종대왕 역으로 캐스팅한 것부터가 큰 관심을 모았다.
이야기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싸고 이를 막으려는 가상 조직과의 혈투를 다룬다. 상대는 밀본이라 불리는 비밀결사, 앞서 서술한 정도전을 숭상하는 조직이다. 조선 건국의 주역이자 조선의 제도와 군사, 조직, 도시계획까지도 설계한 정도전이다. 그런 그가 세종의 아버지 태종에 의해 죽었으니, 밀본 또한 조정에 반감을 가질 밖에 없다. 작품은 오랜 기간 활동을 멈춘 듯 보였던 비밀결사가 수십 년 만에 고개를 쳐들고 정국에 긴장을 불어넣는 이야기를 그린다.
시청률 9.5%에서 시작해 25.4%로 마무리한 드라마다. 흔치 않은 시청률 역전사례다. 10%에 채 미치지 못했던 첫 두 회를 딛고 3회가 단박에 18.2%까지 치고 올라간 것은 단 한 장면이 던진 충격 때문이라 해도 좋겠다. 다름 아닌 무사 무휼, 그가 독보적 존재감을 발하던 순간이다.
무사 무휼,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명품배우가 된 조진웅이 연기한 그가 힘없는 왕 세종(송중기 분)을 지킨다. 때는 상왕으로 군림하던 태종의 시대, 누구도 믿지 못하고 공신이며 외척들을 하나둘 처단하던 냉정한 상왕이 국정을 주도하고 세종은 기를 펴지 못한다. 제가 의지하던 숙부며 중신까지 처단되거나 멀리 낙향한 모습을 보아왔던 그다. 그런 그가 마침내 제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길 결심한다. 그리고 외진 산길에서 아버지와 군사들을 대면한다. 제 뒤엔 오로지 무휼뿐이다.
▲뿌리깊은 나무스틸컷
SBS
대의로써 직분을 다하는, 이토록 드문 캐릭터
힘없는 국왕 이도가 외친다. "무휼! 내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다면 넌 즉시 임금을 시해한 자의 목을 쳐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사사로이는 내 아버지이나 무휼 넌 공의로써, 대의로써 너의 직분을 다하라."
누가 보아도 싸움이 되지 않는 상황, 주저하는 무휼을 뒤에 두고 이도는 거듭 말한다.
"아버지께서 제게 무휼을 주시며 일러주셨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능히 혼자서 백인의 무사를 대적할 조선 제일검이니라'라고 하셨죠."
이로부터 한 편의 시리즈를 끌어올리는 명장면이 탄생한다. 물 오른 감각을 자랑하던 두 작가, 김영현과 박상연이 각고의 공을 들였을 장면, 조진웅의 배우 인생 가운데서도 특별히 강렬했을 그 장면이 말이다.
"무사, 무휼!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명을 수행할 것이옵니다."
지난해 영화 <데드맨> 홍보 차 출연한 한 프로그램에서 조진웅을 향하여 함께 출연한 배우 이수경이 이 장면을 언급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무려 10여 년의 시간이 지나도 어떤 장면은 뇌리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10여 년, 나아가 수십 년이 더 흘러도 어떤 장면은 어느 작품의, 또 배우를 상징하는 것으로 기억된다. 무사, 무휼의 외침이 꼭 그러하다.
▲뿌리깊은 나무스틸컷
SBS
태평성대는 고난 위에 이룩된다
<뿌리깊은 나무>는 결코 흔치 않은 태평성대가 어떠한 역경과 고난 위에 이룩되는 것인지를 그린다. 아버지에 대한 공포와 그에 대한 반감으로 인하여 세종은 제 방식으로 왕도를 이루려 고심한다. 백성이 근본이 되는 맹자의 '민본주의' 사상을 통치의 근간으로 삼고, 신하들을 깨우쳐 더 나은 정치를 이루려 애를 쓴다. 각종 제도를 정비하길 오랜 세월, 마침내 그는 고대하던 사업의 끝을 향해 다가서고 있다. 다름 아닌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다.
그러나 드라마는 그저 훈민정음만을 다루지 않는다. 밀본이 악착같이 지키려는 것, 정도전이 설계한 재상정치, 신권으로 다스리는 조선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 필수교육과정에서 가르치다시피 세종은 태종대의 6조 직계제를 의정부 서사제로 되돌린 왕이다. 정도전이 설계한 정치제도의 근간을 적극 받아들인 국왕이다. 가장 강한 왕권을 자랑했던 조선 초기의 대표적 군왕이 스스로 왕권을 제한하고 신권을 세우는 의정부 서사제를 채택한 점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흔히 권력은 공백을 허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 발 나아가서 권력은 늘 스스로를 키우고 마침내는 타락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 가운데 권력이 기꺼이 스스로를 견제하게끔 하고, 더 나은 미래를 설계토록 한 사례가 있는 것이다. 세종이 의정부 서사제를 받아들이고, 재상 중심 정치를 확고히 한 일이 바로 그렇다. 절차를 지켜 숙원이던 훈민정음 반포를 이뤄내는 과정은 그래서 귀하다. 음모와 갈등 사이로 이 드라마가 내보이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뿌리깊은 나무스틸컷SBS
뿌리 얕은 나무는 살아남지 못한다
<뿌리깊은 나무>가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라 말하긴 어려울 수 있겠다. 실존한 적 없는 가상의 조직을 설정하며 빚어질 밖에 없는 개연성의 문제 또한 곳곳에서 발목을 잡는다. 아쉬운 액션연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한국은 물론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OTT를 통해 꾸준히 시청되고 있는 건 주목할 만하다. 시간을 건너, 또 국경과 문화를 넘어 저만의 소구력이 있음을 입증해내고 있는 것이다. 역경을 넘으려는 이들의 노력이, 백성을 향한 마음을 깨달아가는 군왕의 성장이 오늘의 시청자들에게 공명하고 있기 때문일 테다.
오늘날 우리네 정치판도 가운데선 찾아볼 길 없는 지도자의 마음을 한 편 드라마로나마 살펴본다. 이로부터 비정상이 정상인 양 행세해온 이 시절에, 정상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다. 오로지 뿌리가 깊은 나무만이 뽑히지 않는다는 믿음, 뿌리가 얕은 나무는 마침내 뽑혀나가야 한다는 당위를 이러한 작품이 전하고 있는 것이다.
비로소 썩어 빠진 나무를 뽑아낸 2025년 대한민국이다. 급변하는 세계질서에 대응하고 분열하는 국내정치를 수습하여 한반도의 빛나는 내일을 열어갈 지도자를 맞이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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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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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치 않은 시청률 역전 사례, 충격적인 이 장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