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공주> 스틸컷
무비꼴라쥬
<한공주>는 있는 그대로 밀양 여중생 집단성폭력 사건의 영화적 재현이다. 극영화라곤 하지만 주된 사건이 실제 발생한 범죄와 그 이후 벌어진 일을 그대로 극화한 수준이다. 사건이 보도된 내용을 추려 이야기로 꾸린 것으로, 사건 관계자가 아니더라도 영화를 보는 누구나 이것이 실제 사건임을 알 수 있을 정도다. 심지어 영화 홍보 과정에서부터도 이 사건을 모티프로 삼았음을 알리기도 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공주를 찾아 그녀가 전학온 학교로 몰려든 가해자 부모들의 모습으로 채워진다. 공주는 거듭 숨고 도망해야 하는 신세다. 합의하고 사과하겠단 이들이 전혀 그와 같은 태도가 아니다. 기댈 곳 없는 공주가 갈수록 설 자리 없는 곳으로 물러나는 과정이, 선한 마음을 가진 이들조차 선뜻 그녀에게 손 내밀지 못하는 모습이 우리가 외면해 온 이 땅의 비정한 현실을 눈앞에 펼쳐낸 듯 그려낸다.
작품에서 유달리 인상적인 대목이 몇 개쯤 있다. 공주의 상황이 문학적이며 상징적으로 표현된 장면들이다. 공주가 제게 다가서는 친구 은희를 피해 걸어가며 테니스코트로 들어가 문을 잠그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를 쫓아온 은희는 코트 안엔 길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공주는 스스로 좁은 곳으로 달아나 외부와 통하는 문을 잠근 꼴이다.
공주는 선뜻 문을 열고 나올 생각이 없다. 은희와 공주는 코트의 경계를 따라 걸으며 대화한다. 스스로 문을 잠그고 나올 곳 없는 곳에 갇힌 공주의 상황이 어디 학교 안 테니스코트에서만일까. 바깥에서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이 어디 은희만일까.
잊지말자, 세상의 '공주'들은 아직 살아있음을
25미터 레인의 끝까지만 헤엄을 쳐보고 싶다는 공주의 말에, 한 친구가 어차피 가봐야 벽뿐이라 답하는 대목 또한 그러하다. 물에 빠져 죽은 친구의 모습을 본 뒤 수영을 배우겠다 마음먹은 공주의 이야기는 영화를 보는 이의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어쩌면 물에 빠진 뒤에도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 있으니까, 헤엄을 칠 수 있다면 그때 제게 한 번의 기회를 줄 수 있으니까, 믿을 것은 오로지 저 자신뿐이니까.
25미터를 헤엄쳐 반대쪽에 도착한대도 어차피 벽이 있을 뿐일까. 나아간 그곳에 무언가 달라져 있을까. 영화의 결말이 완전한 비극인지, 약간의 희망이 서려 있는지를 우리는 아직 확답할 수 없다. 울리는 전화가 끝끝내 응답받지 못한 것인지, 홀로 남은 가방이 버려진 것인지, 물에 빠진 공주가 투신한 것인지, 그녀가 그렇게 가라앉고 마는 것인지를,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분명한 건 세상의 공주는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연락하지 않고 만든 이 영화와 달리, 살아서 아무것도 모르고 당한 중학생이 아닌 분노와 배움을 겪은 어른으로 살아남아 있다.
세상은 여전히 밀양 여중생 집단성폭행 사건을 잊지 않았다. 그 안엔 분노와 연민과 미안함과 좌절감이 뒤엉켜 있다. 그로부터 우리가 내릴 결론은 그저 어느 유튜버의 신상공개나 연락 없이 빚어지는 콘텐츠 정도에 머물러선 안 될 것이다. 제2, 제3의 공주를 낳을 수 있는 그릇된 제도와 체계, 안이하기만 한 공권력이 이 시대에 여전히 남아 있는 탓이다.
▲영화 <한공주> 포스터무비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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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