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등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비디오 대여점 '킴스 비디오'의 김용만 대표.
오드(AUD)
1986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 자리한 '킴스 비디오'는 영화 애호가들 사이에선 빼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마틴 스콜세지, 쿠엔틴 타란티노, 스파이크 리 감독, 배우 로버트 드 니로 등이 단골이었고, 무명 시절의 코엔 형제는 심지어 600달러의 연체료가 있기도 했던 이곳은 뉴욕의 명물임은 분명했다.
스물셋 나이에 미국에 건너가 킴스 비디오를 열고, 그 흥망성쇠 과정에 온몸을 던졌던 김용만 대표의 이야기가 다큐멘터리 영화화돼 한국 관객을 만난다. 22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만난 김 대표에게 영화 이야기는 물론, 그만의 철학을 들을 수 있었다.
지난했던 과정들
킴스 비디오가 애호가들에게 특별했던 이유는 30만여 점이라는 라이브러리의 방대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일반 극장에선 볼 수 없었던 다양한 국가의 영화들, 심지어 학생들의 실험 영화들까지 대거 갖춘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 단골의 표현처럼 보물창고로 불렸던 이곳은 뉴욕 언더 그라운드 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 해왔다. 1972년경 이미 미국에 자리 잡았던 부모님에 이어 스물셋 나이에 미국 땅을 밟은 김 대표가 여러 상점을 여닫다가 비디오 대여업의 가능성을 보고 뛰어든 결과물였다.
"당시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직전엔 김신조 사건 등으로 병역법이 수시로 바뀌던 때였다. 열아홉 때 미국 비자가 나왔지만, 가질 못하고 방황하던 시기가 있었지. 서둘러 군대에 갔고, 만기 제대한 뒤 뉴욕에 갈 수 있었다. '야 이렇게 자유로운 나라가 세상에 있었구나' 싶더라. 젊었던 내 입장에선 못할 게 없겠다는 자신감이 들었고, 그래서 스물넷에 김스 프로듀스(상점), 세탁소 등을 운영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광산 김씨 장손이신데, 친척들이 모일 때마다 무슨 대단한 가문인 것처럼 말씀하셨다. 저도 그 영향인지 미국에서 20개 이상 사업을 할 때마다 '킴스'를 붙여 왔다(웃음)."
운영하던 세탁소 한편에 마련했던 작은 대여공간이 미국 전역 내 11개 점포, 25만여 명의 회원을 보유한 체인으로 성장했다. 그러다 스트리밍 서비스 발달과 넷플릭스 같은 공룡 기업이 등장하며, 사업은 위축됐고 결국 자신이 보유한 라이브러리를 이탈리아 살레미라는 소도시에 기증하게 된다. 영화에선 여러 사건을 겪으며 다시 살레미에서 라이브러리를 회수해오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일련의 과정으로 김용만 대표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다는 수많은 제안을 거절한 채 잊히고 싶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그런 그가 마음을 바꾸게 된 것이다.
"마지막 인터뷰가 <뉴욕타임스>였다. 잊히고 싶단 말을 그때 했다. 루저(실패자)였으니까. 물론 다가오는 변화의 파도를 인지는 했고, 나름 5년간 대비했는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미국 자본주의 속성을 빨리 이해했다면 남의 자본을 끌어왔을 테고, 그러면 지금의 킴스 비디오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면이 부족했고, 실패를 인정한 거지.
문을 닫자마자 제 이야기를 다큐로 만들고 싶다는 제안이 많았다. 딸이 영화를 공부하는데 지도 교수도 딸을 통해 의사를 묻더라. 다 묵살했다. 지금 영화의 감독인 데이비드 레드먼, 애슐리 사빈도 처음 제안했을 때 거절했다. 3년 뒤에 그들이 준비한 자료를 보내며 만나자기에 만났는데 이미 엄청 찍어놨더라. 저와 닮은 점도 발견했고, 믿음이 가서 전혀 간섭 안 할테니 해보자고 했다. 그로부터 3년간 저와 다니면서 촬영했다. 이 영화에 총 6년이 쌓인 셈이다."
수많은 콜렉션 가운데 김 대표가 애정하는 건 학생영화 코너였다. "킴스 비디오 덕에 뉴욕에 정착한 청년들이 많았다"며 그는 "B급, C급 심지어 F급 취급받는 영화들도 소외되지 않게 대변해보자는 생각이었다"고 그만의 철학을 언급했다.
"미국 영화 산업은 할리우드로 대변되는 쪽이 있고 대칭해서 독립영화가 또 상당하거든. 그걸 지지하는 게 언더그라운드 문화였다. F급 영화라 해도 결국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상업영화 기준으론 도저히 효용 가치 없어 보이는 10분짜리 학생영화를 마틴 스콜세지 같은 분이 보고 영감을 얻어 장편 영화로 발전시킬 수도 있는 거다. 그런 경우를 제가 많이 봤다.
저희가 1893년에 나온 토마스 에디슨의 영화도 있었고, 여러 감독들이 발행하지 않았던 초기 작품들도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출시 안 한 이탈리아 영화들도 상당히 많았다. 유명 영화인들과의 인연은 말하기가 참 곤혹스럽다. 그들의 명성을 이용하나 싶어서 꺼려진다. 킴스 비디오는 오히려 독립영화인들을 우대했는데 그러니 할리우드 영화인들이 더 관심을 갖더라. LA에서도 회원 가입하러 찾아오고 그랬지."
영화엔 킴스 비디오 매장에서 뮤지션들이 공연하는 모습도 담겨 있다. 1주일에 한번씩 특정 영화 OST에 참여한 밴드를 초청하거나 인디 뮤지션을 초청해 공연해온 것도 주요 행사였다고 한다.
"앤디 워홀이 예술은 특정 계급만 즐기는 게 아니라 했잖나. 잘 알려지지 않은 뮤지션들을 데려다가 했는데 5층 규모의 적지 않은 매장이 손님들로 가득 차곤 했다. 실험적 음악이 많았는데 호응이 좋았다. 무료이기도 했고. 일종의 인터렉티브(상호 소통) 콘서트였는데 관객과 뮤지션이 같이 어울리는 식이었다. 근데 공연을 한 번 하면 매장 내 CD나 DVD가 많이 없어지곤 했다. (웃음)"
변화에 대처하는 자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