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영화 <오펜하이머> 영화 <오펜하이머> ⓒ 영화 <오펜하이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왼손잡이다. 식당에 가서 메뉴판을 들면 뒷면부터 펼쳐본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대칭, 미러링, 도치 같은 관념에 매혹당했다는 수줍은 고백도 흥미롭다. 놀란을 영화계에 깊이 각인시킨 <메멘토>의 연출이 대표하듯 영화를 시간순으로 친절하게 늘어놓기보다 플롯을 쪼개고 쪼개, 마구 뒤섞어 놓는 비선형적인 연출을 선호하는 것도 어쩌면 왼손잡이라는 점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놀란이 특수효과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 배경이나 사물을 만들고 지우는 대신 무중력신을 위해 방을 360도 회전시키거나 3년간 옥수수밭을 일구고 태워버리고 비행기를 격납고에 충돌시키는 방법을 선호하는 건 맞다. 하지만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영화라는 장르에서 최고의 특수효과는 편집이다. 숏과 숏을 이어 붙이는 방법에 따라 특수한 효과가 생기니 특수효과의 전문가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예술가가 아니라 장인이라고 생각하는 부분도 재밌다. <천국의 나날들>, <씬 레드라인>을 만든 테렌스 맬릭처럼 창작자의 내면에서 비롯된 무언가를 표현하거나 벗어나려 하기보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기대와 경험을 활용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게 본인의 작업 스타일이라고 밝혔다('크리스토퍼 놀란: 첫 작품부터 현재까지, 놀란 감독의 영화와 비평' 중에서).
놀란 스스로가 밝힌 이런 개인적인 특징은 당연하지만 <오펜하이머>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대과거, 과거, 현재의 3가지 시간대를 넘나드는 비선형적 플롯을 뛰어난 장인의 솜씨를 발휘해 본인의 장기이자 특기인 편집이라는 특수효과로 조밀하게 이어 붙인 또 한편의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다.
▲ 영화 <오펜하이머> 영화 <오펜하이머> ⓒ 영화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의 알파와 오메가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미국의 핵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여 원자폭탄을 개발한 역사에 대한 전기 영화다. 오펜하이머(줄리언 머피)의 젊은 시절에서 맨해튼 계획으로 이어지는 기본 시간대, 1954년에 원자력 협회에서 벌어졌던 오펜하이머 청문회, 그리고 1959년에 있었던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의 인사청문회의 3가지 시간대로 주로 진행된다. 1000페이지가 넘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가 원작인 만큼 방대한 사건이 흘러가기 때문에 몇 장면을 집중해야 한다.
오프닝을 살펴보자. 케임브리지 대학교 대학원 유학 시절, 실험물리학에 서툴러서 고생하던 22살의 청년 오펜하이머가 지도교수 패트릭 블래킷을 독살하려던 이야기에서 영화가 시작된다. 오펜하이머는 실험실에서 망신당하자, 홧김에 교탁에 있던 사과에 시안화칼륨(청산가리)을 주사했지만 교수가 독사과를 먹기 직전 벌레가 먹은 사과라면서 사과를 잡아 쓰레기통에 넣었던 일화가 오펜하이머의 특징을 보여주는 첫 장면이다. 영화에서는 닐스 보어가 먹을 뻔한 사과를 오펜하이머가 가로채는 것으로 표현됐다.
22살 청년에게는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뻔한 아찔한 사건이지만,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본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필연적으로 일어날 사건이기도 하다. 다가올 끔찍한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애써 모른척하며 실행에 옮긴 뒤 수습하는 과정은 역사가 증명하듯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했음에도 종전 후에는 반핵운동을 펼친 경험. 부인 키티(에밀리 블런트)를 두고 진 태틀록(플로렌스 퓨)과의 오랜 기간 외도를 하고, 그녀의 마지막을 사실상 방치한 뒤 후회하는 모습으로 반복된다.
이는 10분 전 일을 기억 못 하는 선행적 기억상실증을 보완하기 위해 자기 몸에 문신을 새기고(<메멘토>), 자경대가 되어 도시의 악당들을 소탕하고(<다크나이트 시리즈>), 아내를 구하기 위해 기억의 심연에 접근(<인셉션>)하는 등 자신이 구원이라 믿었던 행동이 사실은 자신을 집어삼키고 있었다는 놀란 영화의 전형적인 주인공과도 맞닿는 부분이다. 오펜하이머에겐 자기 구원이란 착각의 요소가 물리학이자 원자폭탄 개발이었을 뿐이다.
▲ 영화 <오펜하이머> 영화 <오펜하이머> ⓒ 영화 <오펜하이머>
종전 이후 아인슈타인과의 만남은 <오펜하이머>에서 유일하게 두 차례 반복되는 장면이다. 1940년 후반에 이루어진 두 사람의 만남은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이 이야기하는 걸 멀리서 지켜본다. 사실상 관객의 시점과 같다.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는데, 아인슈타인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벗어난다. 이제 진실을 택하는 건 스트로스의 몫이다. 그는 오펜하이머가 자신을 험담했다고 믿고 앙심을 품는다.
대화 내용은 오펜하이머의 시점인 엔딩에서 밝혀진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이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전 세계를 멸망시키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내용을 기억하냐고 묻는다. 아인슈타인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오펜하이머는 이미 그 연쇄반응은 시작됐다고 답하며 지그시 눈을 감는다. 화면이 바뀌고 미국과 소련의 핵개발 경쟁으로 촉발된 지구 최후의 날에 피어오른 버섯구름이 지표면을 뒤덮는다.
시간이 흘러 1954년 청문회에서 이 부분을 치밀하게 추궁받는다. 이미 수십만의 목숨을 단번에 없애버린 원자폭탄의 아버지가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는 이유가 소련의 사주를 받아서 아니냐고. 함께 연구했던 동료들의 배신과 대중들에게 낱낱이 공개되는 사생활. 결국 공산당이란 꼬리표를 떼지 못한 채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는 비참한 순간에도 오펜하이머는 적극적으로 항변하지 않는다.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다. 관측하는 순간 형태가 결정된다. 오펜하이머에 대한 관측도 빛과 다르지 않다. 원자폭탄의 아버지이자 반핵운동가는 모순적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도 오펜하이머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스트로스나 관객의 시점이 아니라 아인슈타인과의 대화라는 스스로의 관측을 거쳐 불확정성을 벗어던지고 하나의 형태를 결정한 것이다. 마치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가 영원한 형벌을 감수한 것처럼 원자폭탄을 개발한 죗값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말이다.
▲ 영화 <오펜하이머> 영화 <오펜하이머> ⓒ 영화 <오펜하이머>
분열을 관측하는 놀란의 영화 방정식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오프닝과 엔딩에 배치된 두 번의 결정적 장면만 있었다면 굳이 <오펜하이머>를 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놀란의 영화에서 주인공의 순교는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됐다. <다크나이트>에서 조커에 의해 투페이스로 타락했던 하비 덴트를 청렴한 백기사로 남기고 대신 오명을 뒤집어쓴 배트맨의 잠적과는 완전히 일치한다. 배트맨의 결정이 온전한 픽션이라는 점에서 실제로 손에 피를 묻힌 오펜하이머보다 윤리적으로 거리낄 게 없는 부분도 크다.
<오펜하이머>가 놀란의 전작들보다 나아간 지점은 어떤 연출을 하느냐가 아니라 하지 않았는지로 결정된다. 개봉과 동시에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기대한 부분은 명명백백하다. 바로 트리니티 실험과 두 차례 원폭 투하다. (유머로 소모할 밈이든, 반쯤은 진심을 담았든) CG를 사용하지 않는 놀란이 어떤 아날로그적인 방법을 총동원해 핵폭발의 스펙터클을 재현했을지 개봉 전부터 수많은 추측이 난무했다.
하지만 놀란은 관객의 연쇄반응을 차단한다. 트리니티 실험에서 스펙터클은 재래식 화약의 폭발로 대폭 축소되었고, 두 차례의 원폭 투하는 그마저도 라디오 방송으로만 대체된다. 놀란이 강조한 부분은 폭발 이후다. 트리니티 실험에서 핵분열 이후 도착한 폭발음의 음향이 시각적인 효과를 압도한다. 히로시마에 리틀보이가 투하된 후의 오펜하이머의 연설은 피폭 순간과 교차편집되며 끔찍한 재앙으로 연결된다.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핵폭발의 스펙터클보다 인간의 내면에서 펼쳐지는 분열과 폭발이 어떨 때는 더 거대한 폭풍을 불러온다. 물론 그 복잡한 작용에는 어떤 천재도 밝혀낼 수 없는 공식이 있을 것이다. 놀란은 어쩌면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인간 내면의 공식을 탐구하는 자세로 파고든다.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 개발을 둘러싼 과학자의 '전기'영화가 아니라 오펜하이머의 변화를 관측하는 전기'영화'인 것은 물리학이 아닌 영화의 방정식이 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