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질주>와 <쥬만지>,<블랙 아담> 등에 출연한 드웨인 존슨은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배우 중 한 명이다. 193cm, 131kg의 거구를 자랑하는 존슨은 한국배우 마동석처럼 '현실 히어로'로서 관객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많은 배우들이 10대 시절부터 연기를 시작한 것과 달리 드웨인 존슨은 20대까지 전업 프로레슬러로 활동했는데 존슨은 프로레슬러와 배우 두 분야에서 모두 정점을 찍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다른 분야에서 오랜 기간 활동하다가 뒤늦게 연기를 시작한 많은 배우들이 그런 것처럼 드웨인 존슨 역시 연기의 폭이 그리 넓은 배우는 아니다. 액션영화 <미이라2>를 통해 할리우드에 입성한 드웨인 존슨은 연기 데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액션 장르에 특화된 연기를 주로 하고 있다. 드웨인 존슨이 가족에게 소외 받고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해하는 나약한 중년가장을 연기하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20대 중반까지 톱모델로 활동하다가 1997년 20대 후반의 나이에 연기활동을 시작한 차승원이 타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배우로 전향해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차승원 역시 커리어 초기에는 연기 폭이 좁은 대표적인 배우로 불렸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다양한 장르를 소화할 수 있는 배우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차승원이 미스터리 범죄 스릴러라는 생소한 장르에 도전했던 김대승 감독의 <혈의 누>였다.
 
 2005년5월에 개봉한 <혈의 누>는 등급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전국 220만 관객을 동원했다.

2005년5월에 개봉한 <혈의 누>는 등급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전국 220만 관객을 동원했다. ⓒ (주)시네마서비스

 
다양한 캐릭터 위해 변신 마다하지 않는 배우

데뷔 초 잘 생기고 훤칠한 비주얼을 극대화한 작품들에 주로 출연하던 차승원은 2001년 김상진 감독의 <신라의 달밤>을 통해 코믹배우로 가능성을 확인했다.

2002년 <라이터를 켜라>와 <광복절특사>를 연속으로 히트시킨 차승원은 2003년 <선생 김봉두>를 통해 단독주연으로 우뚝 섰다. 하지만 2004년 <귀신이 산다>까지 5편 연속으로 코미디 장르에만 출연한 차승원에게는 '코미디 전문배우'라는 수식어가 붙어 버렸다.

물론 하나의 장르라도 장점을 보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배우풀이 썩 넓지 않은 한국에서 배우가 특정장르에 묶여 버리면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기 힘들어질 수 밖에 없다. 이에 차승원은 2000년대 중반부터 코미디에 집중하던 것을 벗어 던지고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2005년에 개봉해 220만 관객을 모았던 <혈의 누>는 그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2006년에 개봉한 멜로영화 <국경의 남쪽> 역시 <혈의 누>를 잇는 '차승원 연기변신'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었다. <장미와 콩나물>과 <아줌마>,<흥부네 박터졌네> 등을 연출했던 안판석 PD의 영화 데뷔작으로 차승원은 <국경의 남쪽>에서 북한에 연인을 두고 탈북해 남한에서 가정을 꾸린 김선호를 연기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잔잔한 영화였던 <국경의 남쪽>은 전국25만에 그치며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2010년에는 권상우, 최승현, 김승우 등과 함께 6.25 전쟁의 학도병 이야기를 다룬 영화 <포화 속으로>에 출연했다. 차승원이 북한군 진격 대장 박무량을 연기한 <포화 속으로>는 338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지만 영화는 지나친 신파와 반공적인 내용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대중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차승원 역시 영화 속에서 악역이었던 북한군 연기가 썩 어울리지 않았다는 평가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차승원의 꾸준한 연기 변신은 2018년과 2021년 두 편의 영화를 통해 드디어 빛을 보게 됐다. 브라이언 리를 연기했던 이해영 감독의 <독전>과 마이사 역을 맡았던 박훈정 감독의 <낙원의 밤>이었다. <독전>에서는 그리 많지 않은 분량에도 남다른 존재감과 카리스마로 스크린을 장악했고 <낙원의 밤>에서는 '잔혹하고 무자비하지만 약속은 칼 같이 지키는' 마이사의 캐릭터를 매력 있게 표현하며 관객들의 극찬을 받았다.

인간의 이중성을 고발한 조선 스릴러
 
 코미디배우로 유명했던 차승원은 <혈의 누>에서 런닝타임 내내 간단한 농담 한마디조차 하지 않는다.

코미디배우로 유명했던 차승원은 <혈의 누>에서 런닝타임 내내 간단한 농담 한마디조차 하지 않는다. ⓒ (주)시네마서비스

 
<혈의 누>는 1906년 초판된 이익진이 쓴 한국최초의 신소설과 제목이 같지만 실제 영화의 내용과 소설의 내용은 무관하다. 영화 <혈의 누>는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조선이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던 19세기 초 순조의 재위시절을 배경으로 한다. 제지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외딴 섬마을 동화도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다. 차승원은 육지에서 섬에 파견된 강직한 성격의 조사관 이원규를 연기했다.

<혈의 누>는 '미스터리 사극 스릴러'라는 장르를 표방하고 있지만 관객들이 '사극'이라는 두 글자에 너무 현혹될 필요는 없다. 2000년대 중반 <다모>,<대장금> 같은 '퓨전사극'이 한창 유행했던 것처럼 <혈의 누> 역시 사극의 형식만 빌리고 있을 뿐 영화의 전개는 '탐정 누아르'에 가깝다. 특히 영화에서 표현되는 음산하고 기괴한 분위기는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독보적인 색깔을 자랑했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혈의 누>는 상당히 높은 수위의 고어장면을 보여준다. 꼬챙이에 꿰어 죽는 시체를 시작으로 산 사람을 가마솥에 삶아 죽이고 물에 젖은 도모지를 얼굴에 발라 질식시키고 단단한 돌에 머리를 부딪혀 살해하는 장면 등이 꽤나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특히 산 사람의 사지가 찢겨져 나가는 '거열형'은 한국영화 사상 가장 리얼하게 묘사되니 관람 시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잔인한 장면들에 다소 묻힌 감이 있지만 <혈의 누>를 통해 김대승 감독과 이원재 작가가 이야기하려던 주제는 바로 '인간의 이중성'이었다. 동화도의 사람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또 자신이 누리고 살아온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도리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 이는 최후의 순간에 김인권(박용우 분)을 총으로 쏘면서 무력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덮고 사는 길을 선택한 주인공 이원규(차승원 분)도 마찬가지였다.

<혈의 누>를 연출한 김대승 감독은 임권택 감독 밑에서 <서편제>,<태백산맥>의 연출부, <노는 계집 창>의 조감독으로 일하다 2001년 <번지점프를 하다>를 연출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2005년 <혈의 누>로 또 한 번 관객들을 사로 잡은 김대승 감독은 2012년 조여정 주연의 <후궁:제왕의 첩>으로 263만 관객을 동원하며 준수한 흥행성적을 이어갔다. 하지만 2014년 <조선마술사>가 62만 관객에 그친 후 9년째 차기작 소식을 들려주지 않고 있다.

관객들을 감쪽같이 속인 박용우의 열연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주로 선한 역할을 맡았던 박용우의 악역변신은 <혈의 누>의 또 다른 반전요소였다.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주로 선한 역할을 맡았던 박용우의 악역변신은 <혈의 누>의 또 다른 반전요소였다. ⓒ (주)시네마서비스

 
부드럽고 선한 이미지의 배우 박용우는 1994년 MBC 공채탤런트로 데뷔 후 <쉬리>의 낙하산, <동감>의 운동권 선배 등 주로 착하고 선한 역할을 맡았다. 따라서 박용우가 <혈의 누>에서 김인권 역으로 등장할 때만 해도 그가 동화도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라고 추리해낸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만큼 박용우는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이중적인' 연기를 통해 관객들을 혼란에 빠트리며 <혈의 누>의 숨은 주역으로 활약했다.

극 중에서 김인권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우물에 갇히는 학대를 받았던 트라우마 때문에 물을 무서워하는 약점이 있지만 탁월한 수학적 감각으로 정확한 계산과 타이밍을 통해 5명의 밀고자들을 차례차례 살해한다. 하지만 김인권은 마지막 밀고자인 두호(지성 분)를 '거열형'으로 살해하기 직전 이원규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박용우는 <혈의 누>를 통해 춘사영화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

90년대 여러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감초연기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최종원 배우는 <혈의 누>에서 이원규와 함께 동화도에 파견된 최차사를 연기했다. 최차사는 크게 존재감이 없는 듯한 캐릭터지만 이원규에게 적재적소에 도움을 주면서 보이지 않게 이원규의 조력자로 활약했다. 특히 최차사는 이중성을 가진 인물들로 가득한 <혈의 누>에서 영화 내내 이중성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드라마와 예능을 넘나들며 다양한 매력을 보여주고 있는 윤세아는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2005년 <혈의 누>에서 2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소연 역에 캐스팅되며 영화로 데뷔했다. 소연은 강객주(천호진 분) 일가가 몰살당했을 때 극적으로 목숨을 부지하지만 두호의 밀고로 섬에 돌아온 사실이 알려지고 섬 주민들에게 쫓긴 끝에 총을 맞고 바다에 떨어져 사망한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혈의 누 김대승 감독 차승원 박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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