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 입 아픈 사실. 방송계는 '부캐릭터' 전성시대다. 부캐는 '원래 캐릭터가 아닌 또 다른 캐릭터' 라는 뜻으로 온라인 게임에서 등장한 단어다. 하나의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두 번째 세 번째 삶을 살 기회를 주는 이 개념은 새로움이 생명인 예능계에 스며들었다.
그렇게 국민 MC 유재석은 MBC 예능 <놀면 뭐하니?>에서 트로트 가수 유산슬로 재데뷔했고 코미디언 김신영은 가까운 친척으로 만났을 법한 둘째이모 김다비가 되어 큰 웃음을 줬다.
▲ MC 유재석 부캐릭터 트로트가수 유산슬 포스터. 공식 이미지 캡처 ⓒ MBC
이 예능문법은 제작환경이 자유로운 유튜브에서 탄탄하게 자리 잡았다.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 <신도시 아재들>시리즈의 서준맘, 일본에서 호스트를 하던 중 로커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한국에 온 다나카 모두 코미디언들이 철저하게 연기하는 부캐다.
그리고 최근에는 스위스 국기가 그려진 빨간색 원피스에 양갈래 머리를 한 여성 BJ가 알고리즘을 타고 나타났다.
▲ BJ 리리코 및 방송준비중 화면. 유튜브 캡처 ⓒ 너튜브
그는 인터넷 방송 BJ 리리코다. 혀 짧은 목소리와 과장된 손짓을 화면 너머 시청자에게 인사를 건넨다. 자신을 스위스 유학파에 술은 입에도 못 대는 모태 솔로로 소개하는 리리코 역시 코미디언 김리안이 연기하는 부캐다.
유튜브 채널 너튜브 속 <여캠남친> 시리즈의 주인공인 BJ 리리코가 웃음을 유발하는 이야기 구조는 단순하다. 별풍선 후원 목적으로 온갖 콘셉트질을 해왔던 사실이 시청자에게 폭로돼 나락 엔딩을 맞이하는 것이다. 옷장에서 남자친구가 나오거나 실수로 떨어진 카메라에 남친의 다리털이 보여 콘셉트가 폭로된 후, 리리코가 다급하고 걸걸하게 쌍욕을 뱉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준다. 사람들은 리리코가 후원을 위해 온갖 애교를 부리며 애를 씀에도 결국 모든 게 망하고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마지막 명장면을 보기 위해 클릭한다.
<여캠남친>시리즈를 보고 있으면 웃음이 픽픽 센다. 먼저 리리코와 김리안의 간극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코미디언의 연기력이 경이롭다. 서사를 들여다보면 여성 BJ가 겪는 현실적인 어려움(사생활 관리, 생활고 등)에 주목하고 있어서 여성 BJ에 대한 다른 시각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럼에도 새로운 여성 코미디언의 발굴과 기대해볼 수 있는 다른 가능성 앞에서 상쾌하게 웃진 못했다. <여캠남친> 시리즈는 여성 BJ가 겪는 사생활 폭로, 신변 위협, 조롱에서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를 가벼운 개그 소재로 녹여내기 때문이다. <여캠남친> 세계관 바깥에서 스케치 코미디가 풍자하는 일반인 캐릭터가 왜 문제적인지 짚어보려 한다.
여성 BJ 이중성 조롱과 인터넷 방송 업계 현실 폭로 사이
유튜브 스케치 코미디(1분에서 10분까지 정도의 길이의 짧은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코미디, 유튜브에서 새로운 유행으로 자리잡음-기자주) '너튜브' 제목이 <여캠남친>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인터넷 방송 여성 BJ에게 남친이란 있어도 없어야 하는 존재다. 주 시청자층인 남성이 여성 BJ를 자신의 유사 연애 대상이라고 착각하고 몰입하는 순간부터 돈과 시간을 쓰기 때문이다. 이 생태계를 누구보다 잘 이해한 인터넷 방송 엔터테인먼트는 여성 BJ를 일상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여성으로 소비한다.
시청자와의 진솔한 소통도 사실 상업성이라는 토대 위에서 세워지기 때문에 여성 BJ가 사생활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일정 부분 합의된 기만이다. 그러나 건강한 몰입의 경계를 넘어버린 시청자는 여성 BJ의 연애를 시청자에 대한 배신으로 여기고 인터넷 방송계에서 매장시킬 수 있는 약점으로 잡고 휘두른다. 따라서 <여캠남친>이 재현하는 리리코의 나락엔딩과 사과영상은 여성 BJ의 기만에 분노한 시청자에게 조롱과 처벌서사를 보여줌으로써 대리만족을 가져온다.
물론 <여캠남친>에서 재현하는 코미디가 대변하는 건 선 넘은 시청자만은 아니다. 이 코미디가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BJ 리리코의 일상과 방송의 간극이다. 방송 중인 리리코가 시청자에게 연애는 한 번도 안 해봤다고 얘기하자 숨어있던 남자친구가 무릎을 툭툭 친다. 시청자에게 양해를 구한 리리코는 '방송 준비 중' 화면으로 돌려놓은 후 현실 김리안으로 돌아온다. "아무리 방송이라고 해도 있는 남친을 없다고 하는 게 말이 되냐"는 남친의 투정에 김리안은 능숙하게 달랜다.
▲ 방송 화면과 마이크를 끈 후 남자친구를 달래는 리리코. 유튜브 캡처 ⓒ 너튜브
"내가 이걸 왜 하겠어, 너랑 데이트비용 지금 벌려고 하는 거잖아, 쟤네 그냥 다 일이야 일."
아직 탄탄한 시청자층도, 든든한 후원도 없는 리리코가 방송을 이어가는 이유는 생계와 연애 모두를 책임지기 위해서다. 연인과의 데이트를 위해 시청자 비위에 맞춰 애교를 부리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리리코는 우리네 직장인들과 다를 거 없다. 단지 그의 직업이 인터넷 방송을 하는 여성이라는 것뿐, 보통 사람과 같이 현재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방송에서 주 시청자인 남성들에게 귀여운 여성성을 어필해 돈을 벌어야 함과 동시에 현실에서 능력 없는 남친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으로서 이중부담을 지는 리리코의 애환. 사람들은 긍정적인 에너지와 끈질길 생활력을 가진 리리코를 응원한다.
이처럼 오히려 <여캠남친> 시리즈는 방송과 현실의 간극을 보여줌으로 여성 BJ에 대한 시청자들의 그릇된 환상을 깨고 오로지 이미지에 매몰돼 여성 BJ를 소비하는 시청자의 우매함까지 풍자한다. 방송인과 시청자라는 다대일 관계에서 나만을 위한 방송인이라는 착각과 그릇된 욕망은 과연 어디까지 이해받을 수 있을까. 방송이 끝난 리리코는 김리안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연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보통의 사람인데 말이다.
<여캠남친> 시리즈가 말하지 않는 것
<여캠남친> 시리즈가 위와 같이 BJ 리리코를 입체적으로 그려냈다고 해도 터지는 웃음 끝에 자꾸만 씁쓸함이 남는다. 이 코미디는 왜곡된 인터넷 방송 시청문화와 범죄의 경계에 있는 시청자를 향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방송에 꾸준히 출석하는 닉네임 '리리코나락'은 문제적 시청자를 투영한 캐릭터다.
오로지 채팅으로 등장하지만, 후원 문구로 리리코를 조롱하고 심지어 리리코의 집 주소로 치킨을 보내기까지 한다. 해당 회차에는 "집 주소까지 아는 것 보면 거의 스토커인 듯", "리리코나락 치킨도 보내주고 찐팬이네"와 같은 댓글이 달렸다. 유튜브 시청자 또한 '리리코 나락'에 대한 양면적인 평가를 하는 와중에 문제의 심각성은 웃음 속에서 희석된다.
▲ 닉네임 <리리코나락>의 후원 화면. 유튜브 캡처 ⓒ 너튜브
리리코는 개그적 허용으로 실체가 들통나 나락에 갔다가 기사회생하기를 반복한다. 논란으로 방송을 쉴 때는 알바로 생계를 때우고 여론이 잠잠해졌을 때 방송을 재개하는 식이다. 그렇다면 과연 현실은 어떨까?
▲ 여성BJ 대상 범죄 관련 기사 헤드라인 ⓒ 고은
기사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여성 BJ를 향한 조롱과 희롱, 그리고 죽음은 하나의 비탈길 위에 있다. 20대 남성은 여성 BJ가 남친을 숨겼다는 이유로 칼을 휘둘렀고 40대 남성 BJ는 노출 방송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동료 여성 BJ를 살해했다. 스토킹, 폭행에 가족 살인까지. 여성 BJ를 대상으로 한 범죄는 코미디가 아닌 현실이다.
결국 여성 BJ가 유아 퇴행적인 콘셉트를 전략으로 취하고 애인을 숨겨야 소비되는 업계의 구조적 문제를 소거한 이 코미디는 필연적으로 여성 BJ의 사회적 위치를 취약하게 만드는 전제 위에서 재현된다. 시청자의 환상과 욕망에 부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매장된 여성 BJ에게 이는 피부로 느끼는 폭력이다.
일반인 타킷 삼는 코미디에 동조할 수 없는 이유
변하지 않는 진실은 리리코는 가짜고 이를 재현하는 개그우먼 김리안은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로 인해 어떠한 위협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연기가 진짜 같을수록, 잘 짜인 연극 속 김리안과 리리코의 간극이 극적일수록 그는 능력 있는 코미디언 반열에 오른다.
여성 BJ의 고통 혹은 죽음이 또다시 떠오른다면, 부캐로 지은 허구의 세계관이라는 이유로 <여캠남친> 코미디가 면죄부를 얻을 수 있을까. 풍자란 현실과 호흡하기 때문에 그 웃음이 만들어내는 영향력에 책임이 있다. 코미디언이 수상 소감에서 선한 영향력을 빼놓지 않고 언급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언제부터 개그의 본질이 만만한 대상을 골라 웃음거리가 될 만한 약점을 빼내 잘 짜여진 서사로 포장하는 일이 됐는지 모르겠다. 부캐 전성시대가 타깃으로 삼는 대상이 일반인,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의 사람이라면 우리는 이제 이 웃음이 과연 누구를 대변하고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알고리즘을 타고 눈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