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드미 감독의 <양들의 침묵>은 199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남녀 주연상, 각색상까지 주요 5개 부문을 휩쓸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 영화가 주요 5개 부문을 모두 수상한 것은 1935년 <어느 날 밤에 생긴 일>과 1976년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이후 역대 세 번째였다. <양들의 침묵> 이후 31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네 번째 '아카데미 그랜드슬램'은 나오지 않고 있다.

<양들의 침묵>에서는 안소니 홉킨스가 희대의 연쇄살인마 한니발 렉터를 연기하며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놀라운 사실은 <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의 출연 분량이 단 24분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한 영화의 주연이라고 하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홉킨스는 24분의 시간 동안 관객들을 완전히 압도했고 50대의 적지 않은 나이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의 영광을 차지하며 뒤늦은 전성기가 찾아왔다.

이처럼 영화에서는 출연 분량에 상관없이 관객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들이 있다. 한국에서는 <넘버3>의 송강호와 <타짜>의 김윤석이 엄청난 존재감을 보여준 후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로 성장한 바 있다. 그리고 2013년 이 영화에서는 젊은 여성 배우 박신혜가 짧은 분량에도 큰 존재감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13년 한국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모은 최루 영화 < 7번방의 선물 >이었다.
 
 총제작비가 55억 원이었던 < 7번방의 선물 >은 개봉 6일 만에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

총제작비가 55억 원이었던 < 7번방의 선물 >은 개봉 6일 만에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 ⓒ (주)NEW

 
짧지만 깊은 인상 남긴 '큰 예승이' 박신혜

광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박신혜는 2003년 이승환의 <꽃>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며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고 같은 해 드라마 <천국의 계단>에서 최지우의 아역을 연기하며 배우로 데뷔했다. 이후 시트콤과 단막극에 출연하며 연기경험을 쌓던 박신혜는 드라마 <천국의 나무>와 <궁s> <깍두기>, 영화 <전설의 고향> 등에 출연했지만 스타로 올라서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던 2009년, 박신혜는 드라마 <미남이시네요>에서 남장여자 캐릭터 고미남/고미녀를 연기하며 국내는 물론 아시아 전역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10년에는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으로 273만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그리고 2013년 1280만 관객을 동원하며 그 해 관객동원 1위를 차지한 < 7번방의 선물 >에서 성인 예승 역을 맡아 안정된 연기를 선보이며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다.

그 해 가을 드라마 <상속자들>을 히트시키며 확실하게 스타 연기자로 자리 잡은 박신혜는 이듬해 한석규, 고수, 유연석 등과 영화 <상의원>에 출연했다. 그리고 2014년 <피노키오>, 2016년 <닥터스> 등의 드라마를 통해 청춘 멜로 장르에서의 강세를 이어갔다. 2017년에는 대선배 최민식과 함께 <해피엔드> <은교> 등을 만들었던 정지우 감독의 신작 <침묵>에 출연했지만 전국 49만 관객에 머물며 흥행에서는 재미를 보지 못했다.

2018년 현빈과 증강현실 게임을 소재로 한 판타지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 출연한 박신혜는 2020년 두 편의 영화를 선보였다. 2020년 6월에 개봉한 영화 < #살아있다 >는 190만 관객을 동원했고 넷플릭스에서 공개돼 글로벌차트 1위를 차지하며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그 해 9월에는 전종서와 함께 단편 영화 <몸 값>으로 주목 받은 이충현 감독의 장편 데뷔작 <콜>에 출연했다.

2021년 조승우와 함께 드라마 <시지프스: the myth>에 출연한 박신혜는 2021년 11월 대학 동문이자 배우로 활동 중인 최태준과의 결혼과 임신소식을 밝혔다. 그리고 작년 1월 비공개로 결혼식을 올린 후 그 해 5월 아들을 출산했다. 결혼과 출산 이후 잠시 공백기를 가졌던 박신혜는 올해 하반기 JTBC를 통해 방영될 메디컬 로맨틱 드라마 <닥터 슬럼프>에서 <닥터스> 이후 약 7년 만에 의사를 연기할 예정이다.

뻔한 최루영화? 1200만이 함께 울었다
 
 예승이(오른쪽)는 그토록 갖고 싶던 세일러문 가방을 선물 받은 날, 아빠와 영원한 이별을 해야 했다.

예승이(오른쪽)는 그토록 갖고 싶던 세일러문 가방을 선물 받은 날, 아빠와 영원한 이별을 해야 했다. ⓒ (주)NEW

 
< 7번방의 선물 >은 작정하고 관객들의 눈물을 짜내기 위해 만든 최루영화다. 성폭행 살인자라는 누명을 쓴 지능이 떨어지는 주인공 이용구(류승룡 분)과 나이보다 훨씬 똘똘한 딸 예승(갈소원/박신혜 분), 무섭고 나쁜 사람들인 줄 알았지만 용구의 순수함에 감화되는 제소자들과 교도관들, 그럼에도 여전히 잔인한 현실까지. < 7번방의 선물 >은 관객들의 눈물을 뽑아내기 위해 127분 동안 부지런히 달려간다.

사실 < 7번방의 선물 >은 평론가들은 물론이고 관객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제법 갈렸던 영화다. 실제로 < 7번방의 선물 >은 전반부에 웃음을 주다가 후반부에 몰아서 눈물을 짜내는 신파적이고 뻔한 최루영화의 공식을 따라간 영화로 짜임새 있게 잘 만들었다고 평가하긴 힘들다. 특히 예승이가 교도소에서 공연을 하는 성가대에 어떻게 포함됐는지, 그리고 그런 예승이를 어떻게 교도소 7번방으로 데려올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부실하다.

하지만 < 7번방의 선물 >은 무려 1280만 관객이 선택한 영화다. 물론 지금은 1000만 영화가 꽤 많아졌지만 여전히 1000만 관객은 일종의 사회·문화적인 붐이 일어나야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처럼 쉽지 않은 1000만 관객을 총 제작비 55억 원에 불과(?)한 < 7번방의 선물 >이 개봉 한 달도 안 돼 돌파했다는 것은 그만큼 영화의 정서가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할 만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특히 예승의 생일날 용구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다 예승의 목소리를 듣고 돌아와 예승을 끌어 안으면서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은 영화의 대표적인 '눈물벨'이다. 용구와 예승의 오열 후 시점은 현대로 돌아오고 사법 연수생이 된 예승은 모의재판에서 아빠의 변호사 역할을 맡아 무죄판결을 받는다. 재판이 끝난 후 아빠와 이별했던 곳으로 온 예승은 열기구를 타고 탈출에 성공한 용구와 어린 시절 자신을 상상하며 아빠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4편의 천만 영화를 보유하고 있는 '1억 배우' 류승룡에게도 < 7번방의 선물 >은 대단히 의미 있는 작품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가 이병헌, <명량>이 최민식에 이은 서브 주인공이었고 <극한직업>이 마약반 형사 4인방이 모두 주인공이었다면 < 7번방의 선물 >은 류승룡이 단독 주연을 맡은 유일한 천만 영화이기 때문이다. 류승룡은 < 7번방의 선물 >을 통해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활짝 열었다.

조금 어설퍼서 더 귀여웠던 갈소원의 연기
 
 < 7번방의 선물 > 개봉 당시 1200만 관객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갈소원은 현재까지도 청소년 배우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 7번방의 선물 > 개봉 당시 1200만 관객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갈소원은 현재까지도 청소년 배우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 (주)NEW

 
지난 2008년 <과속스캔들>에서 황정남(박보영 분)의 아들 황기동을 연기한 왕석현은 다소 어색한 연기에도 당돌하면서도 순수한 매력을 뽐내며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처럼 아역배우들은 성인 연기자 못지 않은 똘똘한 연기로 관객들을 놀라게 할 때도 있지만 순수한 매력으로 관객들에게 어필할 때도 적지 않다. < 7번방의 선물 >에서 예승을 연기했던 갈소원 역시 조금은 어설프지만 순수함을 극대화한 연기로 천만 관객 동원에 크게 기여했다.

실제로 이환경 감독은 어린 예승 역 오디션 당시 어린아이다운 캐릭터를 위해 연기가 다소 어설펐던 갈소원을 선발했다고 한다. 실제로 갈소원은 < 7번방의 선물 >에서 발음도 좋지 않았고 연기도 그리 능숙하지 않았지만 귀여운 매력을 극대화한 연기로 7번방 제소자들과 관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2006년생으로 어느덧 고등학생이 된 갈소원은 올해도 ENA 수목드라마 <딜리버리맨>에 출연하며 연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왕의 남자>부터 < 7번방의 선물 > <국제시장> <택시운전사>까지 조용히 천만 영화 네 편에 출연한 정진영은 < 7번방의 선물 >에서 제소자에 의해 자식을 잃은 교도소의 보안과장을 연기했다. 처음엔 용구를 흉악범으로 오해해 난폭하게 대하지만 용구의 순수함과 진심을 알게 된 후에는 적극적으로 용구를 돕는다. 영화 초반 성인이 된 예승이 그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용구의 사형이 집행된 후 예승의 양아버지 역할을 한 듯 하다.

용구가 아동 성폭행 및 살해범으로 잡혀 간 것은 최동훈 경찰청장(조덕현 분)의 딸 지영이 빙판에 미끄러져 머리를 다치고 사망했기 때문이다. 사실 지영의 사고는 용구에게 세일러문 가방을 파는 곳을 알려주기 위해 서둘러 달리다가 생긴 것이다. < 7번방의 선물 >에서 지영을 연기했던 강예서는 아역 및 청소년배우로 활동하다 2019년 걸그룹 버스터즈로 데뷔했고 현재는 오디션 프로그램 <걸스플래닛>을 통해 9인조 걸그룹 케플러로 활동하고 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7번 방의 선물 이환경 감독 박신혜 류승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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