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한 장면.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한 장면. ⓒ tvN

 
"모든 걸 걸었다. 진심이었다."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에 후회없이 무언가에 최선을 다했다고 당당히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축복받은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월 31일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는 '모든 걸 걸고' 특집 편을 통하여 배구여제 김연경, 중학생댄서 김우주군, 축구심판 정동식씨가 출연하여 불꽃같이 열정적인 자신만의 인생 이야기를 전했다.
 
교실에서 선보인 댄스 영상 하나로 온라인 사이트 조횟수 900만 뷰, 좋아요 117만 개를 돌파한 화제의 중학생 댄서 김우주군이 출연했다. 우주군은 취미로 유튜브를 보면서 따라하기 시작한 나홀로 댄스 영상을 꾸준히 올린 것이, 누리꾼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SNS 스타로 부상했다.
 
우주군이 소화한 스털디 댄스는 미국 뉴욕에서 시작된 힙합 장르의 하나로 하체를 격렬하게 활용하여 단단한 체형을 표현하는 춤이 특징이며, 현재 전 세계 10대들 사이에서 뜨거운 인기를 끌고 있다. 우주군이 유명세를 타면서 SNS를 통한 메시지가 자주 온다며 특히 "귀엽다. 잘생겼다"는 외모 칭찬에 유독 약한 반응으로 웃음을 자아냈다.
 
우주군은 또래의 10대 학생들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면서도 집에서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꼭 춤을 춘다고 고백했다. 장래에 음악을 하는 드러머를 지망하고 있다는 우주군은 춤뿐만이 아니라 드럼, 우쿨렐레, 작곡, 옷 커스텀 등을 독학으로 습득할 만큼 다양한 재능을 가진 취미부자였다.
 
우주군은 "최근 수학 성적이 35점 나왔다"는 현실적인 고민에 울상을 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른이 빨리 되고 싶지는 않다. 이때만 즐기고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니까"라며 자신의 꿈과 현실에 솔직한 요즘 10대다운 모습을 보였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한 장면.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한 장면. ⓒ tvN

 
'축구선수 김민재의 도플갱어'로 화제가 된 정동식 축구심판이 다음 자기님으로 출연했다. 11년 차 K리그 베테랑 심판인 정동식은, '독도는 우리땅'을 부른 가수 정광태의 조카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유튜브 촬영의 일환으로 축구 국가대표 김민재가 활약 중인 나폴리를 직접 방문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현지 분위기를 체험한 정동식 심판은, 나폴리에서 올시즌 우승을 견인한 김민재의 위상이 구단의 역대 최고 레전드인 마라도나 근처까지 임박했다며 놀라운 인기를 인증했다. 정동식은 현지에서 자신을 김민재로 착각한 나폴리 축구팬들이 대거 몰렸던 일화를 설명했다. 정동식은 "김민재 덕분에 너무나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어서 감사하다. 김민재가 앞으로도 승승장구하기를 기원한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고교까지 선수생활을 했던 정동식은 본인이 선수로 대성하기 어렵다는 것을 자각하고 심판의 길을 선택했다. 정동식은 "선수로서는 안됐지만 심판으로서 최고의 무대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고백했다.
 
아마리그부터 시작하여 최상위인 K리그 심판까지 올라가는 데 무려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경제적으로 집안 형편이 여유롭지 못했던 정동식은 생계를 위하여 신문-우유 배달에서 노숙인 상담원, 공사장 일용직까지 전전했고, 피땀 흘려 모은 돈이 사기를 당해 한순간에 사라지는 힘든 순간도 겪었다.
 
한때 "삶을 포기하고 싶은 감정까지 들었다"고 회상한 정동식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바닥에서부터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한때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살 때도 있었지만, 주위 사람들이 자신의 곁에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을 느끼고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정동식은 그때부터 거울을 보고 매일 30초간 웃는 연습을 하며 노력하면서 얼굴도 마인드도 점차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정동식은 '그라운드 위의 포청천'으로 불리며 능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심판직업의 특성상 팬들의 비난과 원망은 항상 그림자처럼 짊어지고 가야 하는 몫이다. 정동식은 "심판도 누군가의 가족이다. 욕을 들으면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심판 가족들은 경기장에 오기가 힘들다"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경기 후 귀가하면서 "내가 이렇게 비난받아야 되는 사람인가"라며 회의감에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는 정동식은, 그럼에도 "욕을 먹는 것은 심판의 숙명"이라고 받아들였다.
 
정동식은 현재 심판을 하면서도 불안정한 수입 때문에 환경공무관과 퀵서비스 일들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동식은 "힘들지 않다. 해야 되는 일(가장으로서 역할)과 하고 싶은 일(심판)을 병행하고 있기에 저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며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드러냈다.
 
현장에 함께한 아들 정현우군은 "아빠는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자부심을 드러냈고, 아들의 이야기에 뭉클해진 정동식은 "놀아주지 않으니까 싫어하는 아빠인줄 알았는데, 열심히 살아온 보람을 느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유재석 역시 아빠이자 가장의 마음에 공감하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배구황제' 김연경이 걸어온 길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한 장면.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한 장면. ⓒ tvN

 
세계배구계를 대표하는 국제배구연맹으로부터 "10억 명 중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한 선수"라는 극찬을 들은 인물이 있다. BBC는 2012 런던올림픽 당시 배구계 명장 지오반니 귀데티의 평가를 통하여 "이 선수를 보기 전에는 배구가 팀스포츠라고 생각했다. 러시아의 힘, 미국의 체격, 한국의 기술, 브라질의 민첩성을 모두 갖춘, 단연코 세계 최고"라고 정의하며 한 선수를 극찬한 바 있다. 모두가 바로 '배구황제' 김연경에게 쏟아진 헌사다.
 
한국 배구의 역사를 바꾼 '살아있는 전설' 김연경이 마지막 자기님으로 출연했다. 김연경은 현재 대표팀을 은퇴했지만 어드바이저 신분으로 합류하여 후배들을 돕고 있는 근황을 전했다. 평소 김연경과 친분이 있던 유재석은 김연경이 어색한 모습으로 촬영된 사진이나 화보를 접할 때마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꼭 연락해서 놀리며 장난을 친다고.
 
김연경은 지난 시즌이 끝나고 은퇴 가능성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다. "정상에 있을 때 내려오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고민을 했지만 결정한 것은 아니었는데 언론에 보도되면서 일이 커졌다"고 해명했다. 김연경은 고심 끝에 소속팀 흥국생명과 계약하며 한 시즌 더 선수생활을 이어나가기로 결정했다.
 
김연경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배구를 시작하여 19세에 프로에 진출해 신인왕과 MVP를 휩쓸고 6관왕을 달성하며 국내 배구계를 평정했다. 2009년부터는 일본, 튀르키예, 중국 등 해외무대를 넘나들며 가는 팀마다 모두 우승을 달성했다. 또한 국가대표로 16년간 활약하며 3번의 올림픽과 4번의 아시안게임에 출전했으며, 런던올림픽 MVP, 인천 아시안게임 우승, 도쿄올림픽 4강 등의 눈부신 업적을 쌓고 불세출의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김연경은 가장 기억나는 기록으로 런던올림픽 MVP를 꼽았다. 한국여자배구는 김연경을 앞세워 36년 만의 4강 진출이라는 업적을 이뤘고, 김연경은 경기당 평균 25.9점, 총점 207점을 기록하는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다. 김연경은 "4위 팀에서 MVP가 나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당시에는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올림픽을 몇 번 나가보니 엄청난 일이라는 걸 실감했다"고 밝혔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한 장면.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한 장면. ⓒ tvN

 
사실 김연경은 배구를 시작했던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오히려 또래보다도 키가 작고 왜소했다. 비주전으로 세터를 비롯한 여러 포지션을 땜빵식으로 전전해야만 했다. 고교 진학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던 김연경은, 절친 김수지의 부친이기도 한 김동열 감독에게 "너는 잘 될 거고 키는 앞으로 클테니까 걱정할 것 없다"는 조언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실제로 김연경은 고1 때부터 본격적으로 신체조건과 재능이 만개하며 최고의 선수로 올라섰다. "배구가 너무 좋아서 힘든 시기를 버텨낼 수 있었다. 지인들의 위로와 격려가 큰 힘이 됐다"고 회상했다.
 
고교를 졸업할 무렵엔 위상이 급격히 달라진 김연경은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로 당당히 흥국생명에 입단하게 된다. 그런데 정작 김연경은 "그때는 기쁜 감정이 없었다. 솔직히 흥국생명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며 "1순위라는 건 전년도 꼴찌팀에 가야 하는 거니까. 프로팀마다 이미지가 있는데 그 당시 흥국생명은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는 않는 팀이었다"는 솔직한 발언으로 현 소속팀을 디스하며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김연경이 입단한 이후로 흥국생명은 많은 선수들이 가고 싶어하는 팀으로 위상이 바뀌었다.

프로에서 막내 생활은 쉽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프로팀에도 불합리한 '똥군기' 문화까지 있었다. 어릴 때도 당차게 할 말은 하던 김연경은 연봉협상 때 "내가 여기 운동을 하러온 건지 빨래를 하러 온 건지 모르겠다"며 구단에 이의를 제기했고, 잘못된 스포츠계 구습과 관행들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데뷔와 동시에 국내리그를 평정한 김연경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당시만 해도 국내 배구선수의 해외진출 사례 자체가 아예 없던 시기였다. 김연경은 한국무대와 국제대회에서 만난 외국인 선수들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고 해외리그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됐다. 그렇게 여자프로배구 출범 이후 김연경은 최초로 해외에 진출한 선수가 되었다. 김연경은 해외에서도 가는 팀마다 우승을 견인하며 '해버지(해외축구의 아버지'로 불린 박지성에 이어, '해머니(해외배구의 어머니)'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김연경은 유럽에서 활동하며 세계 각국을 대표하는 에이스급 선수들-명장들과 함께 뛰는 소중한 경험을 쌓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연습할 때부터 하루하루가 너무 재미있었다"며 해외생활을 회상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은 낯선 해외 생활에 적응하는 데 큰 힘이 됐다. 김연경은 처음 해외로 나갔을 때 영어를 전혀 못하는 상황에서도 짧은 단어만으로 동료들과 소통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영어를 서로 못하는 브라질 대표팀 주장 나탈리아와는 바디랭귀지와 3개 국어를 동원하여 소통하며 절친이 됐다고.
 
초기에는 김연경도 텃세를 느꼈던 시절이 있었다. 토스를 안 주거나 실수가 나오면 김연경을 탓하는 경우도 있었다. 김연경은 동료들의 리액션을 그대로 학습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했고, 배구 실력으로 자신의 진가를 증명하며 신뢰를 얻었다. 김연경은 "선수는 코트 안에서 보여주면 되는 거다. 기회가 왔을 때 보여주니까 그때부터 선수와 팬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김연경은 유럽 정규리그와 챔피언스리그까지 석권하며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도 승승장구했다. 우수한 신체조건을 지닌 해외 선수들과 맞서기 위하여 상대 블로킹을 보지 않고 때리는 '노룩 스파이크'는 그녀의 전매특허가 됐다. "그렇게 안 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기술적으로 해야만 살아남 수 있다고 생각해서 끊임없이 연구했다"는 게 김연경의 고백이다.
 
"항상 100%, 120%를 쏟아부었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한 장면.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한 장면. ⓒ tvN

 
튀르키예에서 활약하던 시절, 김연경은 남녀배구선수 연봉랭킹 1위를 기록했다. 심지어 중국에서 유럽으로 다시 복귀할 때는 중국 구단으로부터 심지어 백지수표를 제안받은 적도 있었다. 당시 상상을 초월하는 허용 범위에 유재석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김연경은 "지금도 가끔 그때 백지수표에 금액을 썼으면 어땠을까 이야기하기도 한다"고 회상하면서도 "그때는 중국보다 더 큰 리그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천하의 김연경이라도 슬럼프는 없었을까. 김연경은 해외에서 좋은 활약을 하고 있을 때도 가끔씩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혼자 지내는 게 많이 힘들었다"고 경기 외적인 어려움을 고백했다. 또한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로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자부심에도 정작 인기종목들에 밀려 경기가 중계되지도 못할 때는 "왜 나는 몰라주고 관심이 없을까" 서운함을 느낀 순간도 있었다고.
 
하지만 김연경은 "해외에서 뛸 때도 항상 우리 나라를 대표해서 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태극기를 달고 뛰고 싶었다"고 회상하며 "배구를 보러온 팬들이 내 팬이 되어서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우리나라도 배구를 잘한다'고 어필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한국배구를 책임진 간판 슈퍼스타라는 무거운 기대와 책임감은 김연경에게도 적지않은 부담이었다. 김연경은 "압박감이나 중압감이 있었다. 대표팀을 계속할 때는 생각이 많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시기를 잘 버텨내면 이겨내다보면 항상 좋은 순간이 찾아왔다"며 결과로 증명하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거듭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마지막 올림픽이었던 도쿄 대회에서 에이스이자 리더로서 보여준 김연경의 투혼은 큰 감동을 선사했다. "이제 마지막 국가대표라고 생각하니까 감정이입이 많이 됐다"고 고백한 김연경은 세르비아전을 마치고 인터뷰에서 그동안 국가대표 시절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며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김연경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대표팀 출전을 강행하면서 개인적으로 소속팀에서는 시즌을 망치고 연봉을 날리는 등의 손해를 본 일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올림픽에서는 "차곡차곡 우리가 쌓아서 올라가는 것들이 너무나 행복하고 좋았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우리가 그보다 더 할 수 있을까? 없었을 것 같다"고 평가하며 "항상 100%, 120%를 쏟아부어서 힘들었던 순간이 많았다. 그 정도로 모든 걸 걸었다. 진심이었다"며 태극마크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김연경은 도쿄올림픽을 끝으로 홀가분하게 대표팀을 은퇴했고 많은 팬들은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어느덧 프로에서도 선수생활 말년에 접어든 김연경은 이제 또다른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김연경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재단을 준비하며 유소년 배구 육성에 기여하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유승민(탁구)에 이어 한국을 대표할 IOC 선수위원에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김연경은 유재석과 함께 둘리춤을 선보이는 팬서비스로 유쾌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배구여제가 써내려간 아름다운 도전의 스토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유퀴즈 김연경 정동식심판 유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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