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중반 악역연기로 명성이 높던 배우 손병호는 예능프로그램 <해피 투게더>에 출연해 대학시절 친구들과 즐겨 했다는 게임 하나를 시청자들에게 소개했다. 돌아가면서 누군가의 특징을 이야기하면 그에 해당하는 사람이 손가락을 접는 일종의 '이미지 게임'인데 방송 후 전국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비록 손병호가 직접 개발한 게임은 아니었지만 대중들은 현재까지도 이 게임을 통칭 '손병호 게임'이라고 부르고 있다.

인간관계는 6단계만 거치면 누구나 지구상의 모든 사람과 연결될 수 있다는 '6단계 분리 이론'은 통칭 '케빈 베이컨의 6단계 법칙'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물론 배우 케빈 베이컨이 이 이론을 가장 먼저 주장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이론을 연구한 미국의 한 대학생이 여러 장르의 영화에서 오랜 기간 활동한 케빈 베이컨을 기준으로 삼아 이론을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케빈 베이컨의 6단계 법칙'으로 불리게 됐다.

이처럼 케빈 베이컨은 주연과 조연, 단역을 가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액션과 멜로, 스포츠물, 호러물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오랜 기간 꾸준히 활동한 배우로 유명하다. 비록 아카데미나 주요 국제영화제 수상경력은 없지만 케빈 베이컨의 연기에 대해 의심하는 관객은 거의 없다. 특히 1995년에 개봉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고 마크 로코 감독의 법정 스릴러 <일급살인>은 케빈 베이컨의 눈부신 열연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일급살인>은 1940년대 동료 제소자를 살해한 헨리 영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일급살인>은 1940년대 동료 제소자를 살해한 헨리 영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 (주)익영영화

 
'6단계 법칙'의 주인공이 된 연기파 배우

어느덧 환갑을 훌쩍 넘긴 지금이야 깊은 눈을 가진 연기파 배우로 유명하지만 케빈 베이컨도 젊은 시절엔 넘치는 끼를 자랑하는 청춘스타 중 한 명이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배우로 활동해 1980년 < 13일의 금요일 >에 출연한 베이컨은 1984년 국내에서는 <자유의 댄스>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던 < Footloose >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 Footloose >는 고 패트릭 스웨이지의 <더티댄싱>과 함께 1980년대 중반을 대표하는 '댄스영화 양대산맥'이었다.

베이컨은 1990년대 들어 더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1990년에는 사후세계를 연구하는 의대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조엘 슈마허 감독의 <유혹의 선>에 출연했고 1991년에는 케빈 코스트너와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을 다룬 < JFK >에 출연했다. 해병대 법무장교이자 군검찰 잭 로스 대위를 연기하며 톰 크루즈와 치열한 법정다툼을 벌였던 <어 퓨 굿 맨> 역시 1990년대 초반 빼놓을 수 없는 베이컨의 대표작이다.

그렇게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던 베이컨이 본격적으로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한 작품이 바로 1995년에 개봉한 <일급살인>이었다. 베이컨이 실존인물이기도 한 살인용의자 헨리 영을 연기한 <일급살인>은 23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 1700만 달러의 성적에 그치며 흥행에는 실패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하지만 케빈 베이컨은 <일급살인>에서 엄청난 열연을 펼치며 관객들의 극찬을 받았다.

베이컨은 2000년에도 공포 스릴러 영화 <할로우맨>에 출연했고 2003년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미스틱 리버>에서 숀 펜, 팀 로빈스 같은 또래 배우들과 연기호흡을 맞췄다(베이컨은 <미스틱 리버>에 함께 출연한 1960년생 숀 펜보다 2살이 많고 팀 로빈스와는 1958년생 동갑이다). 2009년에는 TV영화 <챈스 일병의 귀환>에 출연해 이듬해 골든글러브와 미배우조합상 TV미니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11년 <엑스맨:퍼스트 클래스>에서 에너지를 흡수하고 방출할 수 있는 빌런 세바스찬 쇼를 연기하며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선보인 베이컨은 2016년엔 보스턴 마라톤 폭탄테러 사건을 다룬 <패트리어트 데이>에 출연했다. 올해도 <비버리 힐스 캅4>를 비롯해 여러 작품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베이컨은 형 마이클 베이컨과 함께 '더 베이컨 브라더스'라는 밴드로 활동하는 뮤지션이기도 하다.

인권이 무시되던 악명 높은 교도소
 
 케빈 베이컨은 <일급살인>을 통해 제1회 그리스틱스 초이스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케빈 베이컨은 <일급살인>을 통해 제1회 그리스틱스 초이스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 (주)익영영화

 
영화 <일급살인>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영화에서 헨리(케빈 베이컨 분)가 복역했던 미 샌프란시스코의 알카트라즈라는 교도소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교도소 중 하나인 알카트라즈는 가장 탈출하기 어렵고 제소자들의 인권을 보장해주지 않는 교도소로 악명을 떨치다 지난 1963년 폐쇄됐다. 지금은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는 알카트라즈는 <일급살인>과 <더 록>에 등장하며 더욱 유명해졌다.

<일급살인>은 헨리 영이라는 실존인물의 교도소 내 살인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실제 헨리 영 사건은 알카트라즈 교도소가 폐쇄되는 데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영화는 당시의 신문기사를 직접 따와 에피소드를 만들었고 당시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자문을 받아 완성했지만 영화적 재미를 위해 각색된 부분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는 은행강도였던 헨리가 영화에서는 식료품점에서 5달러를 훔치다 감옥에 간 인물로 표현된 것이 대표적이다.

<일급살인>이 개봉할 당시 케빈 베이컨의 나이는 만 36세였다. 하지만 베이컨은 자신의 나이보다 10살 가까이 어린 헨리의 감정을 실감나게 연기하며 관객들을 몰입시켰다(게다가 극 중 헨리는 17살 때 감옥에 들어왔기 때문에 정신연령은 더욱 낮다). 특히 영화 후반 늘어지는 재판에 지쳐 유죄를 인정받고 싶어하던 헨리가 제임스(크리스찬 슬레이터 분)의 심문에 "알카트라즈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절규하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었다.

케빈 베이컨의 엄청난 메소드 연기에 다소 가려지긴 했지만 하버드 법대 출신의 초임 변호사 제임스 스탬필을 연기했던 크리스찬 슬레이터의 열연도 상당히 빛났다. 데뷔 초 <볼륨을 높여라>와 <트루 로맨스> 등에 출연하며 반항적인 청춘스타로 전성기를 달리던 슬레이터는 <일급살인>을 통해 연기변신을 시도했다. 슬레이터는 헨리 영과 조금씩 가까워지는 제임스 역을 통해 한정돼 있던 연기영역을 대폭 넓힐 수 있었다.

1989년 코미디영화 <드림걸>로 데뷔한 고 마크 로코 감독은 1992년 <프리즌 브레이크>의 티백으로 유명한 로버트 네퍼와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에 출연했던 더멋 멀로니가 나온 <흔들리는 영웅>을 연출했다. 로코 감독은 1995년 3번째 연출작 <일급살인>으로 감독으로서 능력을 인정 받았지만 2008년 애드리언 브로디와 키이라 나이틀리가 출연한 <더 재킷>의 각본과 제작에 참여한 후 이듬해 5월 세상을 떠났다.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 게리 올드만의 악역연기
 
 '악역연기의 대가' 게리 올드만은 <일급살인>에서 공무원의 탈을 쓴 알카트라스 교도소의 실세 밀튼 글렌 부소장을 연기했다.

'악역연기의 대가' 게리 올드만은 <일급살인>에서 공무원의 탈을 쓴 알카트라스 교도소의 실세 밀튼 글렌 부소장을 연기했다. ⓒ (주)익영영화

 
1994년에 개봉한 뤽 베송 감독의 <레옹>에서 마약을 유통하는 비리형사 노먼 스탠스필드, <에어 포스 원>에서 대통령 전용기를 납치하는 러시아 테러리스트 에고르를 연기한 게리 올드만은 할리우드에서 알아주는 '악역전문배우'다. 실제로 게리 올드만은 악역을 맡은 영화들에서 영혼을 갈아 넣은 듯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며 스크린을 장악해 버린다. 실제로 몇몇 영화는 게리 올드만의 '포스'에 가려 주인공이 보이지 않을 정도.

게리 올드만은 <일급살인>에서도 여지없이 악역을 맡았다. 헨리를 3년 동안 독방에 가두고 그에게 장애를 입히는 알카트라즈 교도소의 실세 밀튼 글렌 부소장 역이었다. 하지만 글렌 부소장은 <레옹>의 스탠스필드나 <에어 포스 원>의 에고르와 달리 겉보기엔 아주 건실해 보이는 공무원이다. 하지만 글렌 부소장은 탈옥을 시도한 헨리가 자신의 고용보장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3년 동안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지하독방에 가둬 버린 악랄한 인물이다.

제임스는 메리라는 동료 변호사이자 애인이 있는데 메리는 제임스의 장래를 걱정하면서도 변호사로서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해고된 제임스 대신 헨리 사건의 변호를 맡는다. 하지만 제임스의 변호를 원했던 헨리는 일부러 메리에게 심한 농담을 하며 메리가 자신의 변호에서 손을 떼게 만든다. 메리를 연기한 엠베스 데이비츠는 <쉰들러 리스트> <다크엔젤> <브리짓존스의 일기>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등에 출연한 바 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일급살인 고 마크 로코 감독 케빈 베이컨 크리스찬 슬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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