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락한 중국 작가주의 감독의 명맥을 잇다

중국영화를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계기는, 어릴 적 비디오로 섭렵하던 홍콩영화를 제외한다면 1990년대 이후 문화개방으로 볼 수 있게 된 국제영화제 수상작들이었다. 예술영화로 소개되었던 당시 작품들은 장예모와 천 카이거의 영화들, 훗날 '5세대'라는 구분으로 분류하게 된 감독들의 것이었다.

<붉은 수수밭>과 <귀주 이야기>, <국두>, <홍등>, <인생>으로 이어지는 장예모의 80-90년대 작품들, <황토지>로부터 <대열병>, <해자왕>, <현위의 인생>, 그리고 <패왕별희>로 정점에 올랐던 천 카이거의 동 시기 작품들은 국내에서도 적잖은 이들의 인생영화 목록에 새겨질만한 놀라운 발견이었다.

이 (1950년 전후 출생의) 5세대 감독들은 중국현대사의 격랑을 몸소 체험해온 경험과 함께 문화대혁명이 종결된 후 개혁 개방 과정에서 영화교육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마침 서방과 관계 개선이 이뤄지던 참이라 해외 영화제에 소개될 계기도 넓어지던 참이다. 그런 타이밍 덕에 5세대 감독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약할 수 있었다.
 
이후 그 후배격인 6세대 감독들에 대한 기대는 결코 적지 않았다. '지아장커'나 '왕빙' 같은 이름이 곧 세계영화계에 등장했다. 이제 일군의 새로운 신예들에 의해 급속한 개혁개방의 한가운데에서 소외되고 시련당하는 현대 중국인들의 이야기가 다양한 경로와 방식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지아장커의 <스틸 라이프>는 싼샤 댐 건설로 수몰된 마을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왕빙의 <철서구>는 20세기 광산과 공장으로 번영하며 경제발전의 일익을 담당했지만 이제는 쇠락한 동북지방의 황량한 풍경을 다뤄 세계적인 주목을 얻었다. 5세대와는 15년 정도의 격차가 있는 이들은 '지하전영'(한국의 '독립영화'와 유사개념)으로 정부당국의 검열 밖에서 출발한 측면에서도 중국의 개혁개방정책과 함께 탄생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수시로 벽에 부딪히기 시작한다. 여전히 존재하는 중국정부의 검열과 함께 경제성장과 함께 대두된 상업주의의 광풍 속에서 이제 중국영화의 주류는 독립예술영화 작가들과 무관하게 된 지 오래다. 지아장커는 당국과 밀고 당기기에 치여 가며 정체되어가고, 왕빙은 해외를 떠도는 중이다. 주류영화계에서 줄타기를 잘 해내던 (<집결호>와 <대지진>의) 풍소강(펑 샤오강)도 점점 당국과 긴장이 높아져간다. 그런 가운데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영화시장이 된 중국 내에선 자국 내수용도 + 초강대국의 위상을 과시하는 일종의 '국뽕'영화가 범람하는 중이다. 그런 가운데 표현의 자유가 널뛰는 상황에서 이제 당국과의 대립에다 국수주의에 기운 대중의 기호가 굳어지면서 과거 세계 영화계를 놀라게 하던 중국 '지하전영'은 힘을 잃어버렸다.
 
이제 한때 중국영화를 언급할 때 반드시 첫 번째로 언급되었던 세대 구분은 별 의미가 없어진 셈이다. 그동안 세계에 드러나지 않던 유구한 문명유산과 함께 그 어떤 픽션보다 더 스펙터클한 격동의 현대사를 품어내는 예술영화들로 서구 영화계에서 인정받는 대신, 자국 내 흥행수입만으로도 10억 달러 달성이 임박했다는 막강한 내수시장과, 그 시장을 통제하는 공산당 정부의 기호를 맞추는 게 핵심적인 고려가 된 것이다. 그 결과 국수주의와 오락만능이 결합된 중화 블록버스터가 양산되고 있지만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국외의 관심은 반대급부처럼 쪼그라드는 중이다.
 
그런 가운데 낯선 이름이 홀연히 등장했다. 국내에선 탕웨이 주연 작품으로 알음알음 알려진 2018년 영화 <지구 최후의 밤>을 선보인 89년생 감독 '비간'이다. 중국 예술영화 또는 작가주의의 미래로 주목받는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은 그해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부문에 초청되었고, 그 후광에 힘입어 이듬해 국내에서도 개봉했다. 소수이지만 열광적인 팬 층과 함께 평단의 격찬이 뒤따랐다. 그리고 이 미지의 감독의 데뷔작이 뒤늦은 개봉을 맞았다. 2015년 작품이니 8년이나 걸린 셈이다. 이 기념비적인 첫 장편은 여러 면에서 후속작의 초기 버전 혹은 연작의 출발점에 가까운 면모가 도드라진다.
 
구이저우 성 묘족 자치구 한 구석에서 벌어지는 환상동화
 
(감독의 후속 작품 <지구 최후의 밤>의 배경이기도 한) '카일리'는 데뷔작에서도 주요 무대로 등장한다. 실제 감독 본인의 고향인 카일리가 스크린 안과 밖을 공히 점유한다. 이 매력적인 배경은 영화의 진주인공 같은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영화를 본 다음이라면 이 강조가 결코 허투루 던지는 게 아니란 점을 이해하리라 믿는다.
 
영화의 주인공 '천성'은 모종의 사연으로 감옥에서 형기를 마친 뒤 출소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중년 남자는 노령의 여성 의사와 함께 마을 진료소에서 일하는 중이다. 같은 동네에 사는 그의 유일한 형제는 천성과 사이가 좋지 않지만 그는 형제의 아들인 어린 웨이웨이를 무척 아낀다. 그러나 웨이웨이의 아버지는 생업에 게으른데다 아이를 집에 가둬두다시피 한 채 늘 놀러 다니기만 한다. 그래서 형제는 만날 때마다 다툰다. 천성은 조카를 자기가 대신 키우겠다고 하지만 그의 형제는 참견하지 말라며 대립한다.
 
그런 가운데 어느 날 웨이웨이가 집에서 사라지고 천성은 조카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리고 함께 일하는 여의사에게서 자기 대신에 인근 마을인 '전위안'으로 찾아가 옛 지인에게 어떤 물건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 지인은 한때 여의사와 마음이 오가던 이지만 지금은 중병으로 오늘내일하는 중이라고 한다. 마침 천성이 겨우 알아낸, 조카가 가 있다는 곳도 전위안이다. 이참에 겸사겸사 천성은 전위안으로 향하는 여행길에 오른다. 그 가운데 천성의 사연 많은 과거와 웨이웨이의 행방이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의 주안점은 그 관계의 규명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천성은 산 넘고 물 건너 웨이웨이를 찾는 여정을 이어간다. 하지만 어느새 조카를 찾아 나선 주인공의 행로가 마치 라비린토스 미로에 말려든 것처럼 공전하기 시작한다. 천성의 이동코스는 시간과 공간이 뒤엉킨 듯 모호한 상황이 거듭된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뜻밖의 인물들이 불쑥 솟아나듯 천성의 앞에 연이어 등장한다. 그와 자꾸 마주치는 청년은 자신이 '웨이웨이'라 자처하고, 지나던 마을에서 머리손질을 하기 위해 들른 미용실 여인은 천성의 과거사를 굳이 캐묻는다. 그리고 천성은 그를 위해 잘 못하는 노래를 마치 작별선물처럼 읊조린다. 그런 가운데 진실여부가 의심스러운 '원시인' 목격담이 수차례 언급된다. 여행길에 만난 이들은 그 초자연적 존재를 피할 방책을 알려주지만 천성은 그 비법을 마다하고 초현실적인 경로에 자기 몸을 맡긴다. 과연 주인공의 여정은 어떻게 마무리될까 통 종잡을 수 없다.
 
전통 시조와 고전명작 오마주가 어우러진 '영화적 체험'의 향연
 
"카일리 블루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카일리 블루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찬란

 
영화를 보면서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할 사건의 논리적 전개와 명쾌한 서사의 기승전결은 감독 비간이 고작 26살에 연출한 놀라운 데뷔작에서 절대로 결정적 요소가 아니다. <카일리 블루스> 속에서 펼쳐지는 일련의 이야기는 마치 주인공의 꿈 속 상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몽환적이고 불투명한 점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영화 속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주인공을 둘러싼 몇몇 단서가 해명되긴 한다.

왜 천성은 감옥에 다녀오게 되었고 형제와는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은지, 웨이웨이의 행방은 어떻게 된 것인지 등의 사연은 일정부분 설명되어 의문을 풀어준다. 하지만 감독이 의도한 게 명백하게 느껴질 만큼 상당부분이 열린 해석과 결말 방식으로 처리된다. 대신에 그 서사의 공백을 메워주는 건 따로 있다.
 
① 지정학적 요소
 
비간 감독은 자신의 학생단편영화 때부터 고향 카일리를 전면적으로 활용한다. 카일리는 물론 중국의 서남단에 속하는 구이저우 성의 소수민족 자치구를 적극 활용하는 로컬 로케이션이 돋보인다. 중국과 인도차이나 반도 접경인 이 아열대 기후지역은 '장가계' 등으로 대표되는 깊은 밀림과 험준한 계곡들로 가득하다(<아바타> 시리즈의 '판도라' 혹성이 이 지역의 이미지를 차용했을 정도다). 과거에 제갈량이 남만지방을 평정하러가 고전했다는 해당 지역의 구불구불한 좁은 길과 험악한 환경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소수민족들이 고유한 문화와 자치를 누렸던 배경을 간접체험하게 만든다. 철도 등의 대중교통이 온전히 자리 잡지 못한 가운데 오토바이나 거룻배를 이용해야 하는 주인공의 행로는 신비스러운 오지탐험의 분위기로 관객을 이끈다.
 
② 거장 감독에 대한 헌사와 차용
 
영화는 예술영화 작가들의 고전에서 천연덕스럽게 차용한 테크닉과 이미지로 채워진다. 본 작품에선 영화 시작 후 30분, 후속작인 <지구 최후의 밤>에선 1시간 10분이 지나서야 화면에 영화 제목이 떠오르는데 누가 봐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대표작 <스토커(잠입자)>의 '오마주' 자체다. 영화의 한문 제목인 '노천사변'은 바로 <스토커>의 원작, 동구권 SF의 거장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대표작인 '노변의 피크닉'을 차용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차용하는 경우도 드물다.
 
게다가 <스토커>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작가로서 자신이 가진 명확한 주제의식에 철저하게 귀속되는 영화이니 본격적으로 줄거리가 전개되기 전에 포기할 관객은 포기하라는 나름대로 친절한(?) 배려로 근 1시간을 스토리와 크게 연관되지 않는 화면으로 채운 바 있다. 비간의 영화 역시 초반엔 종잡을 수 없는 파편적인 묘사가 적지 않고 본격적인 시작은 한참 지나서야 이뤄진다. 너른 평야 대신에 비좁은 길 좌우로 펼쳐진 계곡에 다닥다닥 붙은 가옥과 골목을 빙빙 도는 극단적 롱 테이크 장면들 역시 해당 기법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던 여러 거장 감독의 이름을 절로 떠올리게 만드는 순간들이다. 무성한 밀림의 활용법은 '정글 영화'의 대표라 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을 연상케 한다.
 
③ 중국 전통문화의 활용
 
중국은 인류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찬란한 문명을 일찍이 이룩한 나라다. 거대한 국토 곳곳에 주류민족인 한족 외에도 수백의 소수민족과 독자적인 역사가 존재하고, 동토부터 사막, 열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풍광이 간직된 지역이기에 문화예술 소재 또한 무궁무진하다. 그렇게 인문과 자연이 함께 흥미로운 구석이 가득한 중국에서 앞선 세대 감독들은 사회적 쟁점과 고유의 문예적 요소를 아울러 빼어난 작품들을 선보인 바 있다. 하지만 어느새 중국사회와 영화는 그 매력적인 특질 대신에 '짝퉁' 자본주의 체제의 정상을 맹목적으로 좇는 형국이다. 그런 가운데 변모해가는 중국사회 풍경은 물론 남방 소수민족과 그들의 거주지역에 감춰진 이국적인 요소들의 기묘한 결합을 통해 낯설고 신비로운 기운의 향연을 펼치는 감독의 재능은 특기할 만하다.
 
묘족의 대표적 자치구 지역인 영화 속 현실배경을 제작진은 절묘하게 형상화한다. 전통가옥의 구조적 특징은 등장인물들의 바로 뒤를 따라가며 촬영한 카메라에 의해 마치 비밀통로를 통과하는 체험으로 변모한다. 실제로 지금도 있을 법한 물이 새는 나룻배와 얼기설기 연결된 가교의 질감, 전통과 현대가 너저분하게 교차하는 황량하고 낙후된 시골과 개발 붐의 살풍경함이 줄지어 등장한다. 그렇게 굳이 시사적 주제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일종의 '박물지'처럼 중국 남부 내륙지방의 현주소를 시각적 이미지로 구현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천성은 아마추어 시인으로 줄곧 시가를 창작하고 시 구절은 마치 풍경과 조화를 이루듯 연속된다. 거기에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원시인' 목격담이 이어지며 신비주의를 설파한다. 실제로 '예티'라 불리는 인간형 유인원의 존재는 중국 오지 곳곳에서 전승되는 중이며 심지어 진시황의 만리장성 축조 당시 도망친 이들의 자손이 남방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전설도 전해질 정도다. 그런 중국 민담과 전설을 기억한다면 영화 내내 구전되는 원시인 이야기는 색다른 체감으로 변모할 테다.
 
독창적 스타일의 작가주의 떡잎이 영그는 과정을 목격하다
 
"카일리 블루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카일리 블루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찬란

 
비간 감독은 갓 대학을 졸업한 직후 자신의 장편영화를 찍기 위한 사전준비 겸해서 고향 카일리에서 웨딩 촬영을 열심히 했다고 한다. 감독의 아르바이트 동료는 곧 <카일리 블루스>의 몇 안 되는 촬영 스태프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들이 시골마을 야외 결혼식장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익힌 실전 테크닉은 곧 이 데뷔작품의 극단적인 카메라 워킹으로 구현되어졌다.
 
제작진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할 법한 고향 동네의 기묘한 비주얼은 이 영화가 시침 뚝 떼고 그들 동네에선 너무나 흔한 시골 마을 배경을 초현실주의 판타지로 변모시켜버린다. 중국 소수민족 중 묘족의 가장 큰 자치구인 '첸둥난먀오족둥족자치주'는 아직 중국 전역에서 일어나는 서구화가 완성되지 않았기에, 이제 다른 1세계 국가의 도시들과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특색을 잃어버린 대도시 색채를 면하는 드문 지역에 속한다. 그렇게 서구적 시각에선 생경한 오리엔탈리즘을 간직한 덕분에 카일리라는 장소는 감독의 뻔뻔한 의도를 제대로 구현해버린다. 

여기에 주인공 천성을 맡은 배우 진영충을 포함해 거의 대부분의 배우가 비전문 연기자로 채워진 덕분에 오히려 극한의 리얼리티를 이룩한 셈이다. 전문 연기자라면 오히려 티가 났을 텐데, 실제 자신들의 동네에서 생활연기를 펼치기에 오히려 '그림'이 된 셈이다. 물론 기구한 인생역정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실제 감독의 친척인) 진영충과 극중 천성의 캐릭터는 온전히 결합된다.
 
후반부를 장식하며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고야 말, 무려 40여 분에 달하는 핸드 헬드 - 롱 테이크 장면은 종종 너무나 당황스러울 지경이긴 하다. 영화학과 저학년 습작에서 시험해볼 법한 투박한 카메라 워킹이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하지만 자신들이 어릴 적부터 뛰어놀며 익혔을 복잡한 협곡 마을 골목길 배경을 완벽하게 활용해낸 덕택에 별다른 특수효과 없이도 타임 루프의 판타지 느낌 물씬 풍기는 분위기를 뽑아낸다. 촬영기법 자체는 이미 다른 예술영화들에서 종종 접할 수 있는 데다 아무래도 초기작인 만큼 세련되지도 않지만, 감독이 구현하고자 하는 이미지에 극단적으로 집착하는 집념이 기이한 만화경을 구현하는데 성공한다.
 
"카일리 블루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카일리 블루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찬란

 
주인공 천성이 이 오지마을에 도착해 만나는 이들은 시공간이 뒤엉킨 비현실적 풍경을 완성하는 마지막 '단추'다(이 영화에서 '단추'는 퍼즐처럼 지속적으로 호명되는 장치다). 그들이 곳곳에서 머리를 불쑥 내미는 마을 곳곳의 장소들 - 노점식당, 미용실, 수선집 등 - 은 이 남쪽 오지에도 점점 뻗어오는 (거친 마무리의 시멘트 신축건물들처럼) 살풍경한 근대화와 개발의 기운을 전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그런 조화 덕분에 감독의 연출방식은 초현실주의에 가까운 반면, 영화 속 배경은 다큐멘터리 풍으로 다가오는데, 그 덕분에 롱 테이크 화면 속 마을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데 아울러 교차시키는 환상적인 시공간으로 온전히 활약하기에 이른다.
 
도무지 예측 불가능한 전개 속에서 당황스러운 가운데 관객은 주인공이 갈아입은 셔츠에 담긴 함의와, 초자연적 존재를 쫓는다는 나무막대 부착여부에 어느 순간부터 두근두근 상상을 시작할 테다. 그리고 영화 내내 과연 실존하는지 의심되는 기차의 존재는 초반에 최초의 영화 중 하나로 세계 영화역사에 기록된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 풍의 느낌을 선보인 뒤, 거듭 관객의 판단을 들었다 놨다 해버린다. 그렇게 감독은 마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태국 정글 연작들을 합쳐서 반으로 나눈 것만 같은 기이한 영화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굳이 이 89년생 감독이 앞선 지하전영 세대 구분에 묶이거나 의식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비간의 작품세계는 중국현대문학으로 치자면 위화나 옌렌커보다는 모옌이 선보이는 마술적 리얼리즘에 근접한 작업 스타일이다. 행간에 은유되는 사회현실 묘사가 허투루 쓰이진 않지만 직설적인 고발이나 비판 대신에 하나의 요소이자 배경으로 설정하는 방식에 다면적으로 해석 가능한 운문조의 전개는 상상력을 한껏 자극한다.

그렇게 서구를 열심히 뒤쫓으며 어느덧 미국의 지위를 노리게 된 중국사회를 그대로 닮은 현 중국 영화산업 주류와는 분리된 독창적 영화작가가 등장했다. 우리에게 여전히 흥미로운 볼거리를 선보일 대륙의 저력이 만만하지 않다. 그 수천 년 역사가 품고 있는 구전되어온 흥미진진한 저잣거리 야담의 정수를 솜씨 좋은 이야기꾼이 풀어내는 출발점을 <카일리 블루스>로 목격할 수 있다.
 
<작품정보>
 
카일리 블루스 Kaili Blues, 路邊野餐
2015|중국|드라마/미스터리
2023.05.24. 개봉|110분|12세 관람가
감독 비간
출연 진영충(천성 역), 셰리쉰(크레이지 페이스 역), 여세학(나이든 웨이웨이 역),
곽월(양양 역), 뤄페이양(어린 웨이웨이 역), 자오다오칭(나이든 의사 역)
수입 및 배급 찬란
공동제공 소지섭, 51k
 
2015 68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 신인감독상
2015 52회 금마장 신인감독상/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상
2015 37회 낭트3대륙영화제 최우수작품상

 
카일리 블루스 비간 지구 최후의 밤 중국영화 진영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