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프랑스의 작가 스탕달은 '어머니는 스승이자 나를 키워준 사람이며 사회라는 거센 파도로 나가기에 앞서 모든 풍파를 막아주는 방패같은 존재'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모정은, 세상의 절망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30년간의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했던 남자의 인생이 뒤늦게나마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그 시작은, 한 평범한 어머니가 남긴 '위대한 유산'에서 비롯됐다.
 
5월 25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낙동강변 살인사건-분홍보따리의 기적' 편을 통하여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던 두 남자의 가슴 아픈 사연과,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고군분투했던 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1991년, 부산에 거주하던 30대의 평범한 두 가장이자 친구였던 장동익씨와 최인철씨가 돌연 경찰에 체포된다. 두 사람은 낙동강변 인근에서 무면허 운전연습 대상자들을 상대로 경찰을 사칭하여 돈을 뜯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혼비백산하여 경찰서로 달려온 가족들에게 동익씨는 금방 풀려날 것이니 안심하라고 다독이며 돌려보냈다.
 
그런데 며칠 뒤 집에서 뉴스를 보고 있던 동익씨의 가족들은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2년간 미제로 남아있던 '낙동강변 살인사건'의 범인들이 검거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수갑을 찬 채로 TV에 나오고 있는 범인의 얼굴은 바로 동익씨와 인철씨였다. 경찰사칭범이 하루아침에 살인범으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그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하루아침에 살인범으로 몰린 두 사람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사건은 1990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산의 낙동강변에서 한 여성이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범행 당일날 낙동강변에서 데이트를 즐기던 남녀는 경찰을 사칭하는 2인조 강도의 습격을 당했다. 피해자 남성인 김영준씨(가명)는 큰 부상을 입었지만 겨우 달아나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여성인 현주씨는 끝내 범인들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경찰은 김씨의 증언과 현장에서 발견한 증거들을 토대로 수사에 나섰지만 범인을 추격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수사가 난항에 처해있던 1991년 11월, 부산 사하경찰서에 "낙동강변 인근에서 경찰을 사칭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한 통의 신고전화가 걸려온다. 형사들은 직감적으로 낙동강변 살인사건의 수법과 연관성을 떠올렸다.

그 용의자가 바로 동익씨와 인철씨였다. 경찰은 이들이 피해자 김영준씨가 설명했던 낙동강변 살인사건의 범인들과 인상착의가 비슷하다는 데 주목했다. 김씨도 두 사람 중 특히 인철씨의 체격과 말투를 보고 그때 그 범인이 맞다고 확신했다.
 
당시 담당 형사는 두 사람이 이미 체포될 당시부터 "경찰 사칭범이 아니라 살인 혐의로 불려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살해 혐의를 추궁하니 스스로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현장검증에서도 당시의 범행방식을 정확하게 재현했다. 사건 현장에 있던 손수건의 혈흔과 최인철의 혈액형은 모두 AB형으로 일치했다. 그렇게 모든 정황은 두 사람이 범인임을 가리고 있었다. 평범하던 두 가장은 하루아침에 강도살인-상해-강간혐의를 저지른 흉악범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믿기 어려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가족들은 체포가 된 지 무려 한 달이 지나서야 겨우 두 사람을 면회할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를 만난 동익 씨는 돌연 억울함을 호소하며 "사람을 죽인 적도, 강도를 저지른 적도 없다"고 털어놓아 그동안의 자백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동익씨는 경찰에 체포되던 1991년 11월 8일의 그날을 회상했다. 놀랍게도 경찰들은 잠깐 이야기 좀 하자며 차량에 동승시킨 두 사람을 다짜고자 폭행하기 시작했다. 이어 경찰서로 끌려간 두 사람은 온갖 고문을 당하며 범행을 자백할 것을 강요당했다. 경찰은 동익씨의 눈에 테이프를 붙이고 거꾸로 매달아놓은 이른바 통닭구이를 자세를 시키는가하면, 겨자를 푼 물을 코에 들이붓기도 했다고.
 
며칠째 계속된 잔혹한 고문에 견디다 못한 두 사람은 결국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허위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검찰과 법원에 고문 당한 사실을 알리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아무도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 결국 동익씨와 인철씨는 법정에서 살해-강간 혐의가 인정되어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포기하지 않았던 어머니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가족들은 두 사람의 무고함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 않았다. 당시 인권 변호사였던 문재인(전 대통령)에게 의뢰하여 변호를 부탁했다. 변호인 측은 동익씨가 눈이 좋지않아 초등학교도 중퇴할 정도의 시력으로 캄캄한 밤에 범행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반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2심에서도 무기징역을 내렸다. 재판부는 현재 시력이 나쁜 것은 인정하나 2년 전에는 좋았을 수 있다고 판단하며 변호인 측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증인으로 출석한 총무과 직원이 당시 신발 검사과에서 일한 동익씨의 시력이 나빴을 리 없다고 증언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정작 해당 직원은 사무직으로 동익 씨가 일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재판부는 증인의 말만 그대로 수용했고, 경찰의 고문행위 역시 인정하지 않았다. 동익씨 측은 다시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고 결국 무기징역형이 최종 확정됐다.
 
하지만 동익씨의 어머니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매주 한 번씩 진주 교도소를 찾아 동익씨와 인철씨를 만났다. 절망에 빠진 아들이 혹시 잘못된 생각이라고 할까 "밥 굶지 말라, 든든하게 먹어라. 살아있어라"면서 격려했다. 한편으로 도움이 될 만한 곳을 다 찾아다니며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애지중지하며 들고 다니던 '분홍 보따리'를 내밀었다고 한다. 그 안에는 어머니가 변호사들에게 부탁하여 한 장씩 복사해서 꼼꼼하게 모아둔 아들의 수사 기록이 가득 모아져 있었다.
 
어머니는 "근거를 남겨놔야 한다. 변호사라도 사건이 끝나면 다른 사건을 맡을 거고 기록을 계속 가지고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흉악범으로 형이 확정된 죄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지만 아들의 무고함을 믿는 어머니의 구명 의지는 확고했다.
 
수감 생활 10년이 지난 2003년 8월, 동익씨는 모범수로 무기징역에서 20년형으로 감형을 받았다. 억울한 옥살이였지만 10년만 지나면 출소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동익씨는 가족 합동 접견에서 가족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다는 희망에 들떴다. 그런데 접견을 며칠 앞두고 돌연 어머니가 못 오신다는 연락을 받게 됐다.
 
사실 동익씨의 어머니는 오랜 시간 암 투병 중인 상태였다. 아들의 구명을 위해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버텨오다가 결국 안타깝게 숨을 거둔 것이다. 아들의 감형 소식도 듣지 못한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던 순간에도 차마 눈을 감지 못했다고 한다. 장례식이 끝난 후에야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뒤늦게 전해들은 동익씨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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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다시 10년의 시간이 흐르고 2013년 4월 26일, 동익씨는 마침내 21년 6개월여 만에 출소하여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33살의 청년은 어느덧 56살의 중장년이 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 사회와 격리되어 살다 나온 동익씨는 특히 너무나 그리워하던 딸과 거리를 좁히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사람들이 아빠에 대하여 물어보면 뭐라고 말해야하나"는 딸의 질문에, 동익씨는 "사업하다 잘못되어 그리(감옥에 다녀온)된 것이라고 하자"고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동익씨는 동생을 통하여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전에 분홍보따리에 모아둔 수사 자료들을 전해받았다. 역시 감형을 받고 출소한 인철씨와도 만나며 두 사람은 과거의 억울함을 풀고 당당해지기 위해 재심을 신청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동익씨가 만난 대부분의 법조 전문가들은 "대법까지 확정된 사건을 뒤집기는 어렵다"며 난색을 표시했다. 포기하지 않고 진실 규명을 이어가던 2016년 동익씨는 당시 새내기 기자 문상현씨를 만나게 된다. 문 기자는 자료를 살펴본 이후 사건이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재심 전문 변호사인 박준영 변호사에게 연락을 해서 동익씨의 사연을 전했다. 자료를 검토한 뒤 박 변호사는 연락을 취하여 "이들은 범인이 아니다"라는 확신 어린 결론을 내렸다.

박 변호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사건이 이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절차와 실체가 다 문제가 있었다. 특히 절차에서는 고문, 서류 조작과 서류 은폐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박 변호사는 이들의 재심 사건을 맡기로 결정했고, 이 사건을 취재중이던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팀과 함께 단서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결국 밝혀진 무고함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박 변호사와 <그것이 알고 싶다>팀의 노력으로 뒤틀렸던 사건의 진실들이 하나둘씩 세상에 드러났다. 당시 경찰의 진술조서에는 날짜가 기재되어 있지 않았고, 경찰이 두 사람을 처음 용의자로 지목한 경찰사칭 범행은 1건을 제외하고 모두 피해자를 확인할 수 없는 '불상'으로 표시되었을 만큼 수사 자체가 시종일관 부실했던 것이 드러났다.
 
가장 결정적인 증거로 꼽힌 혈액형은 AB형이 아닌 A형과 B형의 혼합으로도 나올 수 있는 반응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범행 도구로 지목한 각목과 주먹만한 돌로는 피해자의 상흔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심지어 피해자를 들어서 옮겼다고 진술한 두 사람의 이야기와 달리 피해자의 등에는 끌려서 이동된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는 범인이 2명이 아닌 1명일 수도 있다는 중요한 단서였다. 결국 동익씨와 인철씨의 증거들은 모두 경찰의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과 조작으로 이루어졌던 것.
 
박 변호사는 재심을 청구했으나 2년 넘게 소식이 없었다. 박 변호사는 재심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검찰 과거사위원회에 조사를 신청해둔 상태였는데 이로 인하여 오히려 시간이 계속 지연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 하지만 긴 기다림 끝에 과거사위는 '경찰의 고문으로 인한 범인 조작'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이듬해 재심 청구 3년 만에 재심 개시결정이 내리면서 동익씨와 인철씨의 인내는 헛되지 않았다.
 
그리고 2021년 2월 4일, 부산 고등법원에서는 재심 재판 결과, 마침내 '무죄'가 선고됐다. 억울한 누명으로 인한 30년의 고통스러운 세월이 뒤늦게나마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판결이 내려진 직후 동익씨와 인철씨는 울컥하는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동익씨는 "오늘같은 날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려왔다. 가슴이 벅찬다"고 고백했다. 동익씨와 인철씨는 손을 맞잡고 서로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드러냈다.
 
무죄 판결을 받고 나서 동익씨는 부모님이 계시는 납골당을 찾았다. 동익씨의 인생을 되찾아준 어머니의 분홍 보따리도 함께 들고 있었다. 동익씨는 "엄마 기록이 있었기에 진실이 밝혀졌으니까, 이제 아무 걱정 없이 편해지시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사건은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비록 동익씨와 인철씨의 무고함은 밝혀졌지만, 억울한 사람들을 고문하고 죄를 뒤집어씌운 경찰들,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은 검사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도 사과하지도 않았다. 또한 동익씨와 인철씨가 범인으로 몰려 수십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동안, 결국 낙동강변 살인사건의 진짜 범인은 체포되지도 않고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어버린 것도 씁쓸함을 남긴다.
 
심지어 당시 담당 형사들은 고문 사실을 끝까지 부인하는가 하면, 취재를 하러온 제작진 앞에서 테이프를 자신의 입에 붙이며 답변을 거부하기도 했다. 지금은 변호사가 된 담당 검사는 동익씨와 인철씨가 방문하자 되려 고성을 지르며 화를 내는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였다.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무고한 사람들의 인생을 망쳐놓고도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사과 없이도 평온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기막힌 상황이다.
 
동익씨와 인철씨는 형사보상금과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금을 청구했고, 아주 다행히도 전액을 보상받았다. 그리고 이들은 보상금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했고 박준영 변호사도 동참했다. 자유와 명예를 되찾은 두 사람은 함께 추억의 장소인 해운대를 방문하여 "앞으로 잘 살자, 궂은 일은 잊어버리고"라고 다짐하며 새로운 인생을 기약했다.
 
한 어머니의 분홍보따리가 만들어낸 기적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30년에 걸쳐 결백을 밝히고 인생을 되찾은 두 사람을 다시 웃게 만든 힘은, 어쩌면 분홍 보따리에 담겨있던 어머니의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사랑이었을 것이다.
꼬꼬무 낙동강변살인사건 재심청구 영구미제 과거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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