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드라마는 무엇일까. 한국에선 1980년부터 2002년까지 방영된 <전원일기>나 1990년부터 2007년까지 방영된 <대추나무 사랑걸렸네>가 단박에 떠오를 텐데, 범위를 세계로 넓힌다면 이들 드라마보다 몇 배 쯤 오래된 드라마가 몇 편쯤 있는 것이다.
 
리모컨 버튼 하나 딸깍하면 채널이 넘어가니 얼마나 쉽고 치열한 경쟁일까. 빠르게 변화하는 세태 가운데 대중의 선택을 꾸준히 받아내는 드라마를 찾기란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다.

<전원일기>나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와 같은 작품이 한때는 시대와 공명하였으나 어느덧 낡고 늙은 이야기로 취급받고 마침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음을 떠올리면 TV 드라마가 시대를 따라잡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짐작할 수 있다.
 
닥터 후 포스터
닥터 후포스터BBC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드라마
 
<닥터 후>는 세계 주요국 드라마 가운데 가장 오래 방영된 드라마다. 영국 공영방송인 BBC에서 1963년 11월 23일 첫 방송이 나간 이래 현재까지 방송되고 있을 만큼 역사가 깊고, 후비안(Whovian)이라 불리는 팬덤까지 전 세계 곳곳에 만들어 놓을 만큼 영향력 또한 크다. 시공간을 오가는 전 우주적 SF드라마답게 기발한 상상력과 당대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TV 드라마로 구현해낸 시도는 세계 드라마 역사 가운데서도 <닥터 후>를 손꼽을 만한 작품으로 남겼다.
 
1990년부터 2004년까지, 말하자면 한국에서 <대추나무 사랑걸렸네>가 한창 방영되던 시기 동안 휴방한 이 드라마는 지난 2005년 오랜 침묵을 깨고 화려하게 부활한다. 소위 뉴 시즌이라고 불리는 시즌으로, 한국에서도 KBS가 전격 방영을 결정하며 2000년대 중반 한국의 외국 드라마 전성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닥터 후> 뉴 시즌 1 종영 뒤 <위기의 주부들>과 <그레이 아나토미>가 편성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무튼 <닥터 후>의 부활은 뉴 시즌 1의 공헌이 결정적이다. 주인공은 역시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간을 오가는 닥터(크리스토퍼 에클스턴 분)이고, 그가 런던에서 우연히 알게 된 여성 동반자 로즈(빌리 파이퍼 분)와 함께 모험하며 위기를 극복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닥터 후 스틸컷
닥터 후스틸컷BBC
 
시공간을 오가며 벌이는 좌충우돌 모험
 
닥터는 외양은 인간처럼 보이지만 전 우주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문명을 이룩했던 타임로드라는 종족의 마지막 생존자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간을 오가는 능력을 갖췄으나 달렉이란 전투종족과의 싸움 끝에 마침내 종족 전체가 멸망하고 만다.
 
드라마는 시종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십 수 년간의 공백 때문일까, 드라마는 도입부터 보는 이를 압도하는 설정을 펼쳐낸다. 그건 다름 아닌 지구의 종말, 닥터가 로즈를 데리고 처음으로 건너간 시간은 무척 많은 날이 흐른 뒤 멸망을 앞둔 지구의 모습이다. 미국의 원주민 보호구역이나 한국의 그린벨트처럼 보호구역으로 묶여 오랜 기간 보존돼온 지구가 마침내 유지비가 더 많이 든다는 판단 하에 폐기되는 날이 오고야 마는 것이다.
 
주체 역시 인간이 아닌 여러 우주인들로, 인간은 사실상 멸종된 이후다. 마지막 남은 인간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이는 이미 수차례 수술을 거쳐 인간의 형상을 갖고 있지 않다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에겐 인간다움은 물론 인간으로서의 기억이랄 것이 거의 없지만, 마찬가지로 인간이며 지구에 대해 알지 못하는 다른 우주인들에게 제 상상력을 사실인 양 팔아먹기에 이른다.
 
닥터 후 스틸컷
닥터 후스틸컷BBC
 
지구의 종말, 상상한 적 있나요?
 
<닥터 후> 뉴 시즌 1이 펼쳐낸 이 같은 광경은 이 드라마가 21세기 관객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감상을 던질 수 있음을 증명한다. 언젠가는 멸망할 것이 틀림없는, 그러나 누구도 그를 현실적으로 고려한 적 없는 지구며 종의 끝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그것이 결코 존엄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이야기하는 건 그 자체로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장면이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은 그저 우연히 제게 주어진 우월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를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닥터 후>는 인간보다 우월한 문명을 가진 종족의 모습과 그들에게 닥쳐온 여러 주요한 순간들을 통해 인간의 삶이 얼마나 무가치해보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한편에선 모든 인간이 나름의 힘을 다해 살아가는 삶이 또한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내보이고, 시간을 자유롭게 오가는 이조차 바꿔내지 못하는 어느 순간의 무거움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감상이야말로 <닥터 후>를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게 만든 이유가 아닌가 한다. 오늘의 관객을 감동시키고 과거의 영광이며 미래의 희망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 바로 그런 것 말이다.
 
닥터 후 스틸컷
닥터 후스틸컷BBC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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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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