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레트로 열풍에 발맞춰 1990년대 대중가요가 다시금 조명받고 있습니다. 장르 및 시대를 아우르는 과거 명반을 현재 시각에서 재해석하며 오늘날 명반이 가지는 의의를 되짚고자 합니다.[편집자말]
 2011년 MBC < 나는 가수다 >에서 보아(BoA)의 'No.1'을 공연한 이소라

2011년 MBC < 나는 가수다 >에서 보아(BoA)의 'No.1'을 공연한 이소라 ⓒ MBC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음악 경연 예능, 그 중심과 시작에는 단연 MBC <나는 가수다>가 있다. 박정현, 임재범, 김범수 등 내로라하는 보컬리스트들이 그 역량을 뽐내는 본격적인 경쟁의 장은 삽시간에 수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어당겼다.

시청자들을 매료한 다양한 공연들 속에서도, 이소라의 'No.1'은 가장 '놀라운' 무대였다. 밝은 댄스곡인 보아(BoA)의 원곡을 음울한 록으로 탈바꿈시킨 편곡도 신선했지만 이를 소화하는 그녀의 날카로운 절규는 청중을 강하게 흡인했고 또 충격에 빠뜨렸다.

'바람이 분다', '난 행복해'와 같은 발라드곡으로 알려져 있던 이소라였기에, 많은 이들이 그녀의 '변신'에 감탄했지만 그녀에게 로커는 변신의 대상이 아닌 또 다른 자아였다. 서정적이고 우아한 형체 속에 거친 이면이 숨쉬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 페르소나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작품이 바로 그녀의 3집 <슬픔과 분노에 관한>이다. 앨범명처럼 슬픔과 분노를 다루며, 그중에서도 특히 분노를 노래하기 위해 그녀는 작품의 절반가량을 다소 거친 질감의 록에 할애했다. 우아한 목소리는 날카로워졌고, 태도에서는 전에 없던 한기가 느껴졌다. 
 
 이소라 정규 3집 < 슬픔과 분노에 관한 > 앨범 커버 이미지

이소라 정규 3집 < 슬픔과 분노에 관한 > 앨범 커버 이미지 ⓒ 동아기획

 
날 선 태도만큼 대중의 반응 역시 뜨겁지 않았다. 3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으나, 밀리언셀러에 도달한 데뷔작이나 이에 다양한 색채를 더하며 못지않은 흥행을 이어간 2집 <영화에서처럼>에 비하면 그 성과는 미미했다. IMF 시기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겠으나 '난 행복해', '처음 느낌 그대로', '청혼'의 우아함이나 산뜻함을 기대한 대중들에게 3집의 목소리는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슬픔과 분노에 관한>이 그녀의 최고작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존과 결이 다른 이 작품에 역설적으로도 그녀의 정수가, 그것도 매우 놀라운 완성도와 강렬한 질감으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노랫말, 사운드, 목소리의 완벽한 삼위일체

그녀의 음악을 관통하는 정서인 이별에 대한 슬픔은 어느 때보다도 직접적으로 표현됐다. 이토록 솔직한 슬픔은 깊어지다 못해 화자의 내면을 파고 들어가 뜨거운 분노로 승화되었고 작품은 이 과정을 포착하여 고스란히 가사로 옮겨냈다. 

원치 않은 이별을 맞이한 그녀는 처음에는 이를 부정하고 타협하려 하지만

"그대 후회되면 다시 내게로 돌아올테니" (믿음)
"안된대도 아무 상관없어요 / 내 마음만 알아줘요" (믿음)


돌이킬 수 없음을 느끼며 깊은 우울에 빠지고 정신은 피폐해져 간다.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 그대 없는 밤은 너무 쓸쓸해"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나 혼자 일어난 미친 아침은 맑아도 눈물입니다" (Blue Sky)
"내 고귀한 이성이 매를 높이 들어 나를 병들게 해 / 숨이 막히는 죄의식" (금지된)


문드러진 감정은 끝내 분노로 변모하여 떠나간 연인에게 저주를 내리고 자기혐오와 피해의식에 잠식되는 지경에 달한다.

"사랑할 때마다, 일할 때마다 저 파멸로 향한 길이 네 앞을 밝히기를" (Curse)
"죽어서 지내? 그러길 바래?" (피해의식)
"난 혼자다 / 내가 나를 벌한다 / 편한 도움도 필요치 않아 / 난 변한다 / 세상에 나를 바친다." (Praise)


직설적인 어조와 시적 수사는 그녀의 심리 표현력을 극대화함과 동시에 영험하고 섬뜩한 분위기를 더하며 서사의 설득력까지 끌어올렸다. 국내 대중음악에서 가사가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의 한계를 돌파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슬픔'이라는 부제를 가진 전반부는 발라드, '분노'라는 부제의 후반부는 록 위주로 구성하며 소리도 그 노랫말에 발을 맞춘다. 본인을 자책하며 떠나는 이를 붙잡는 '믿음', 떠난 후의 슬픔과 허전함을 곱씹는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등 이전과 유사한 정서를 표현하는 곡은 분명히 예상 범위 내에 있는 발라드다.

반면 황폐한 심리가 담긴 'Blue Sky'는 발라드 계열임에도 처연한 건반과 현악기 연주로 섬뜩한 분위기를 고조한다. 뒤이어 곡의 중반부터 록의 영역으로 진입하며 유례없는 광기를 폭발시키는 '금지된', 비교적 산뜻한 연주가 더욱 섬뜩한 'Curse'로 파괴되어 가는 정신을 형상화하고, 이후 선이 굵은 록 트랙들('피해의식', '너의 일', '나의 일')로 신경질적인 분노를 발산한다. 끝내 영적인 의식에 가까운 마지막 트랙 'Praise'로 서사를 완성하는 모습까지, 가사와 사운드의 호흡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

하나 된 노랫말과 소리로 기꺼이 드러내어진 심리에 이소라의 변화무쌍한 목소리는 놀라운 표현력을 더했다. 여전히 우아한 발라드 트랙에는 더욱 짙은 처절함을 담았고, 작열하는 록에서는 목소리를 편집증적으로 쥐어짜냈다. 특유의 비음은 장엄한 중반부와 'Praise'에서 마녀의 저주에 가까운 형태로 탈바꿈하기까지 한다. 왜 그녀가 시대와 장르를 대표하는 위대한 보컬리스트인지가 이 한 장의 퍼포먼스만으로도 여실히 드러난다.

현대 여성 아티스트의 모태가 되다

짙고 분명한 콘셉트와 서사, 절정의 문학적-음악적 표현력으로 가득 찬 <슬픔과 분노에 관한>이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성취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본작이 훌륭한 작품을 넘어 시대를 아우르는 명반인 이유는 작품과 작품 속 그녀가 결국 국내 음악사의 아름다운 역사이자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 

발라드와 록의 문법을 일체화하는 시도는 이후 그녀의 6집 <눈썹달>로 재차 완성되어 모던 록과 발라드의 주요한 본질적 융합을 이끌어냈다. 스스로 현대 여성 발라드의 이정표로 작용한 셈이다.

또한 국내 음악계는 사실상 처음으로 강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여성을 목격하게 됐다. 정상의 위치에서 감행한 과감하고 능동적인 변화로 아티스트로의 도약을 보여주며 열릴 듯 말 듯 하던 여성 아티스트의 새 시대를 완전히 열어젖힌 순간이었다. 
명반다시읽기 이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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