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1편을 만들 때부터 시리즈물로 기획을 하거나 아예 시리즈를 동시에 촬영한 후 나눠서 개봉하는 영화들이 제법 많아졌지만 1980~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속편 제작은 1편의 흥행성적에 따라 결정되는 게 당연했다. 물론 감독이나 제작사에서는 1편을 만들면서 얼마든지 속편이나 시리즈를 구상할 수 있지만 1편의 흥행성적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과감하게 속편의 투자를 결정하는 투자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2001년 뉴질랜드 출신 피터 잭슨 감독에 의해 오랜 '속편의 공식'이 무너졌다. 1편부터 3편까지 558분(극장판 기준)에 해당하는 방대한 이야기를 한꺼번에 촬영한 후 3년에 걸쳐 개봉한 <반지의 제왕> 실사영화 트릴로지가 세계적으로 29억17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한 것이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반지의 제왕>이 대성공을 거둔 후 시리즈 영화를 동시에 촬영한 후 나눠서 개봉하는 경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2003년과 2004년에도 지난 1994년 두 번째 장편영화 <펄프 픽션>을 통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4시간6분에 해당하는 긴 이야기를 두 편으로 나눠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반지의 제왕>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 역시 전편과 속편이 아닌 두 편이 하나의 이야기였다. 타란티노 감독이 <펄프 픽션>에 이어 배우 우마 서먼과 9년 만에 재회했던 통쾌하고 화려한 여성 복수극 <킬 빌>이었다.
 
 <킬 빌>은 60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두 편을 만들어 제작비의 5배가 훌쩍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킬 빌>은 60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두 편을 만들어 제작비의 5배가 훌쩍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 CJ ENM

 
액션, 멜로, 드라마 모두 가능한 만능 여성배우

1970년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난 우마 서먼은 1985년 10대의 어린 나이부터 모델 활동을 시작했고 데뷔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세계적인 패션잡지 보그의 커버를 두 번이나 장식하며 패션계의 대형 유망주로 떠올랐다. 1987년 <키스 데디 굿나잇>을 통해 배우로 데뷔한 서먼은 1988년에 개봉해 이듬 해 아카데미 7개 부문 후보에 올라 3개 부문을 수상했던 <위험한 관계>에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1990년 <북회귀선>에서 남편의 불륜상대와 만남을 시작해 양성애자로 변하는 어려운 연기를 선보였던 서먼은 1993년 칸 영화제에 초청됐던 <형사 매드독>에서 대배우 로버트 드니로와 호흡을 맞췄다. 하지만 역시 우마 서먼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긴 작품은 1994년 타란티노 감독의 <펄프 픽션>이었다. 특히 <펄프 픽션>에서 보여준 서먼과 존 트라볼타와의 댄스 장면은 3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러 매체에서 오마주 및 패러디되고 있다.

1997년 앤드류 니콜 감독의 <가타카>에 출연해 두 번째 남편 에단 호크를 만난 서먼은 1998년 <베트맨과 로빈>에서 매혹적인 빌런 포이즌 아이비를 연기했다. 그렇게 활발한 연기활동을 이어가던 서먼은 에단 호크와의 결혼과 딸 마야 호크를 출산하던 시기 잠시 연기활동이 뜸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서먼이 거절했던 배역 중에는 <반지의 제왕>의 에오윈도 있었다(최종적으로 에오윈 역은 호주 출신 배우 미란다 오토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서먼은 2003년 <펄프 픽션>의 타란티노 감독과 재회해 또 하나의 '인생작' <킬 빌>을 만났다. 서먼이 181cm의 큰 신장을 십분 활용해 시원시원하면서도 우아한 액션연기를 선보인 <킬 빌>은 vol.1과 vol.2를 합쳐 60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 세계적으로 3억3400만 달러의 뛰어난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대중들에게 각인된 서먼의 대표작 두 편을 모두 타란티노 감독과 함께 한 것이다.

<킬 빌> 이후 여전사 이미지로 굳어지는 것을 경계한 서먼은 2013년 칸 영화제 3회 수상 경력을 가진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님포매니악>에 출연했다. 서먼은 2018년에도 트리에 감독과 재회해 공포 스릴러 영화<살인마 잭의 집>에 출연했다. 아카데미나 국제영화제 수상경력은 없지만 2011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를 인정 받는 배우 우마 서먼은 올해 <레드,화이트&로얄 블루>에서 미 대통령을 연기할 예정이다.

4시간 동안 펼쳐지는 타란티노의 액션들
 
 <킬 빌>에서 선보였던 이소룡 스타일의 노란색 트레이닝복과 일본도는 한 동안 우마 서먼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킬 빌>에서 선보였던 이소룡 스타일의 노란색 트레이닝복과 일본도는 한 동안 우마 서먼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 CJ ENM

 
타란티노 감독과 우마 서먼은 <펄프 픽션> 촬영 당시 여성의 복수를 주제로 한 액션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눴는데 그것이 바로 <킬 빌>의 시작이었다. 타란티노 감독은 우마 서먼이 30번째 생일이 될 때 함께 구상했던 여성 복수극의 시나리오를 완성해 선물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 작품이 2003년과 2004년 두 편에 걸쳐 개봉해 제작비의 5배가 넘는 수익을 올리며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은 <킬 빌> 시리즈였다.

사실 <킬 빌>에 대해 "1편이랑 2편 중에 뭐가 더 재미 있어?"만큼 어리석은 질문도 없다. <킬 빌>은 영화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vol.1과 후반부에 해당하는 vol.2가 있을 뿐, 1편과 속편의 개념이 없는 작품이다. 물론 4시간이 넘는 런닝 타임이 다소 길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킬 빌>은 복잡한 스토리 대신 스타일리시한 액션 장면들이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큰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영화다.

다만 생생한 폭력 장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타란티노 감독의 성향은 <킬 빌>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특히 vol.1에서 베아트릭스 키도(우마 서먼 분)와 오렌 이시이(루시 리우 분)가 이끄는 88인회의 대결에서는 사지가 무처럼 썰려 나가고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장면들이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화면이 흑백으로 전환될 정도. 하지만 일부 관객들은 흑백전환이 오히려 영화의 영상미를 살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미국의 힙합그룹 우-탱 클랜의 RZA가 총괄 프로듀싱을 담당한 사운드트랙 역시 이질적인 듯 하면서 영화와 묘하게 어울린다. 특히 < Battle Without Honor Or Humanity >라는 곡은 <무릎팍도사>를 비롯한 여러 예능프로그램에서 사용돼 국내에서도 매우 유명해졌다. 키도와 오렌 이시이가 싸움을 시작할 때 나오는 < Don't Let Me Misunderstood >도 2008년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나쁜 놈,이상한 놈>에서 메인테마로 편곡돼 사용됐다.

타란티노 감독은 농담반,진담반으로  vol.1 초반에 죽은 버니카 그린(비비카 A.폭스 분)의 어린 딸이 키도에게 복수하는 내용을 그린 <킬 빌 vol.3>를 20년 후에 제작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실제 타란티노 감독은 vol.1과 vol.2를 촬영하면서 vol.3에 들어갈 일부 장면을 미리 찍어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오는 2024년 마지막 영화를 만들고 은퇴하겠다고 선언한 타란티노 감독의 은퇴작이 <킬 빌 vol.3>가 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필살기' 써야 이길 수 있었던 최종빌런
 
 <킬 빌>의 최종빌런 빌은 키도를 암살자로 키운 스승이자 그녀가 속했던 암살집단을 만든 인물이다.

<킬 빌>의 최종빌런 빌은 키도를 암살자로 키운 스승이자 그녀가 속했던 암살집단을 만든 인물이다. ⓒ CJ ENM

 
<킬 빌>은 결혼식장에서 자신이 속했던 킬러집단의 멤버들에 의해 예비신랑과 뱃속의 아이를 잃은 베아트릭스 키도가 킬러집단의 멤버들과 창설자 겸 리더 빌(데이비드 캐러딘 분)에게 복수를 하는 액션영화다. 하지만 굳이 시놉시스를 읽지 않고 영화의 제목만 보더라도 <킬 빌>이 빌을 죽이려는 영화임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빌은 주인공이 죽이려는 최후의 빌런답게 영화 속에서 엄청난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빌은 당연히 죽은 줄만 알았던 키도의 아이를 애지중지 키워 키도의 뒤를 이을 암살자로 만들려 했고 분노에 휩싸인 키도는 빌과 마지막 대결을 벌인다. 키도를 암살자로 키워낸 빌은 키도보다 한 수 위의 실력자였지만 키도가 또 한 명의 스승 파이 메이(유가휘 분)에게 전수 받은 '오지심장파열술'을 사용해 복수에 성공한다. 빌을 연기한 고 데이비드 캐러딘은 지난 2009년 태국 방콕의 한 호텔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되며 세상을 떠났다.

<미녀 삼총사> 시리즈로 유명한 중국계 미국 배우 루시 리우는 <킬 빌>에서 vol.1의 최종보스 오렌 이시이를 연기했다. 이시이는 (극 중에서)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일본 야쿠자계를 통일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자신도 강하지만 주변에 강한 부하들을 대거 거느리고 있다. 하지만 전설적인 일본도 장인 핫토리 한조(치바 신이치 분)가 만들어준 명검을 들고 찾아온 키도에 의해 조직이 전멸 당하고 본인도 잔인하게 최후를 맞는다.

vol.2에서 '캘리포니아 마운틴 스네이크'로 불리는 여성킬러 엘 드라이버는 키도의 스승인 파이 메이를 독살했다(사실 엘의 한쪽 눈을 멀게 한 일물이 파이 메이였기 때문에 엘 입장에서 파이 메이는 원수였다). 키도는 엘의 공격에 밀리는 듯 했지만 기습적으로 나머지 한쪽 눈을 공격해 엘을 실명시키면서 승리했다. 잔인한 킬러 엘을 연기했던 데릴 한나는 1984년 <스플래시>에서 톰 행크스와 애틋한 멜로연기를 선보였던 배우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킬 빌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우마 서먼 데이비드 캐러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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