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길복순> 스틸 이미지

넷플릭스 오리지널 <길복순> 스틸 이미지 ⓒ Netflix

 
최근 한국 드라마, 영화는 중년 여성들이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20년 넘게 벗어 두었던 의사 가운을 입고 병원으로 복귀하고(닥터 차정숙), 평생 시민운동에 몸 바쳤던 인권 변호사가 서울 시장에 도전하고(퀸메이커), 청부살인업계의 전설적인 킬러가 되기도 한다(길복순). 

20년차 가정주부에서 1년 차 레지던츠가 된 차정숙(엄정화 분)의 고군분투를 그리는 JTBC 토일 드라마 <닥터 차정숙>은 연일 시청률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12회는 최고 시청률 18.5%(닐슨코리아 유료가구 플랫폼 기준)를 기록하며, JTBC 역대 드라마 순위 4위에 올랐을 정도다.

지난 21일 방송분에서 그동안 혹독한 시집살이와 남편의 홀대를 견디며 완벽한 주부이자 엄마가 되기 위해 애썼던 차정숙은 남편 서인호(김병철 분)의 이중생활을 모두 알게 되었고 이혼을 통보했다. 남편 없이 제2의 인생을 살아가기로 결심한 차정숙에 시청자들의 반응은 점차 뜨거워졌다. 늦었지만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 사명감과 진정성을 갖고 한 걸음씩 성장해 나가고 있는 차정숙에게 시청자들의 응원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길복순>은 그동안 젊은 남성 캐릭터의 전유물이었던 킬러 역시 중년 여성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캐릭터라는 걸 보여준 작품이다. 주인공 길복순(전도연 분)은 극 중에서 모든 킬러들이 우러러보는 선망의 대상이다. 소속사 대표인 차민규(설경구 분)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그러나 길복순도 열다섯 살이 된 딸과의 대화를 살인보다 어려워 하고, 딸의 성 정체성 커밍아웃에 당황하는 평범한 엄마이기도 하다. 이러한 매력적인 캐릭터의 간극에 전 세계의 팬들은 열광했다. OTT 플랫폼 시청 순위 집계 사이트 플렉스 패트롤에 따르면 <길복순>은 영화 부문에서 전 세계 TOP 3위(영어·비영어 통합)에 오를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넷플릭스 시리즈 <퀸메이커>는 정치 드라마로서는 이례적으로 주요 등장인물들을 모두 여성으로 채웠다. 뚜렷한 지지 기반도 없이 갑자기 서울시장 선거에 뛰어든 인권 변호사 오경숙(문소리 분)은 물론이고, 그를 돕는 대기업 전략기획실 출신 이미지 메이킹 전문가 황도희(김희애 분)부터 오경숙의 경쟁자이자 강력한 차기 시장 후보 서민정 의원(진경 분), 주인공들의 앞길을 막으려 애쓰는 재벌그룹 회장 손영심(서이숙 분), 회사에서 나간 황도희의 빈 자리를 꿰찬 야심가 국지연(옥자연 분)까지 선역, 악역의 구분 없이 이들은 다양한 캐릭터로 작품에 활력을 부여했다.

여성들로 가득한 정치 드라마는 전혀 낯설거나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퀸메이커> 역시 넷플릭스 비영어권 TV 부문 1위를 차지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중년 여배우들, 주인공이 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퀸메이커> 스틸 이미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퀸메이커> 스틸 이미지 ⓒ Netflix


물론 여성 캐릭터들을 내세운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던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지난해만 해도 신드롬을 일으켰던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열풍이 있었고, 드라마 <술꾼 도시 여자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www> <작은 아씨들>이나 영화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 <마녀> 등 여성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 영화 역시 최근 몇년간 꾸준히 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년 여배우들이 입체적인 캐릭터로 다양한 서사를 보여주는 최근의 경향은 분명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주로 주인공의 어머니에 머물러야 했던 과거에 비해, 주체적으로 위기를 돌파해 나가고 성장하는 중년 여성들의 변화는 반가울 수밖에 없다. SNS, 커뮤니티, 유튜브 댓글 등지에서도 이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인기리에 방영 중인 <닥터 차정숙>은 특히 비슷한 경험을 하며 살아온 중년 세대들에게 큰 공감을 얻고 있다. "내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차정숙 보는 재미에 산다", "나는 의사도 아닌데 왜 이렇게 (차)정숙에게 공감되는건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드라마를) 보면서 울고 있다"는 댓글도 적지 않다. 젊은 세대들도 열광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최근 <닥터 차정숙>을 재밌게 보고 배우 엄정화의 팬이 됐다는 신윤정씨는 "이런 장르의 드라마를 너무 기다려왔다. 여성의 희생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낸 부분이 좋다"고 말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이승한 대중문화 평론가는 전도연, 문소리, 김희애, 엄정화 등 스타 배우들의 영향력에 기댄 부분이 크다고 지적했다. 그는 18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이 작품들의 주연 배우들은 그동안 결혼 혹은 나이가 들면서 활동이 뜸해지던 여성 배우들의 관례를 깨고 꾸준히 활동하면서 영역을 확장해왔던 분들이다. 여성 서사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말씀했던 분들이기도 하다"며 "그동안 '여성 서사가 필요하다'는 당위 만으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배우들이 스타 파워를 그대로 지닌 채로 50대에 진입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분들을 중심으로 하는 작품이 생겨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반면 정덕현 평론가는 드라마 콘텐츠의 시청자층이 소구하는 포인트와 맞물려서 생겨난 변화라고 보았다. 그는 17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오래 전부터 드라마의 주 시청층은 여성이었다. 그러나 TV 드라마를 보는 시청층은 중년, 중장년으로 연령대가 높아지고 있고 그들의 판타지를 건드리기 위해 중년 여성이 새롭게 도전하는 캐릭터나 서사가 나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여성을 시청 타깃으로 보지 않은 드라마는 없었지만, 최근 여성 서사를 보면, 온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중년 여성 캐릭터가 많고 멜로의 틀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덧붙였다. 

모성에 대한 새로운 담론
 
 JTBC에서 방영중인 드라마 <닥터 차정숙> 관련 이미지.

JTBC에서 방영중인 드라마 <닥터 차정숙> 관련 이미지. ⓒ JTBC

 
무엇보다 최근 중년 여성을 내세운 작품들이 많아지면서 모성 담론 역시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모양새다. 지난 3월 종영한 tvN <일타 스캔들>에서 남행선(전도연 분)은 남해이(노윤서 분)의 친엄마는 아니지만 조카를 위해 엄마라 불리며 제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반면 <닥터 차정숙>에서 차정숙은 엄마로서의 뒷바라지를 기대하는 수험생 딸의 요구를 거절하고 자아 찾기에 나서기도 한다. 

이에 대해 황진미 평론가는 18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과거에는 진정한 모성을 위해서라면 여성의 자아실현은 대개 포기해야 하는 가치였다. 그렇지만 (<닥터 차정숙>에서) 차정숙도 똑같은 고민을 하지만, 엄마로서 가정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의 일에 매진하는 방향으로 딸에게 좋은 교육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자아실현이 모성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성의 실현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 달라졌다고 본다. 또한 <일타스캔들>의 경우, 모성이 반드시 낳아야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습득될 수 있는 것이고 모성 수행이 나의 결단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점에서 새롭다"고 말했다.

이어 황진미 평론가는 <길복순>을 예로 들며 그동안 이기적으로 그려졌던 모성이 사회적 의미로 확장되었다고 짚었다.

"도덕이나 윤리에 대해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았던 킬러 길복순이 사춘기 딸과 대화화면서 최초로 윤리적 고민을 하지 않나.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딸과 소통해야 하는데, 딸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좋은 엄마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킬러라는 직업이라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킬러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직장에서 일할 때, 그게 돈벌이를 위해서는 맞는 길이어도 사회를 위해서는 옳은 일이 아닐 때도 있다. 직장에 함몰되고 있을 때 엄마로서 이 일이 자식에게 떳떳한가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은 훌륭한 자각이다. 

과거에는 좋은 엄마가 된다는 것은 자식에게 더 헌신한다는 의미였다. 모성은 주로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방향으로 그려지기 일쑤였다. 입 바른 소리를 하던 여성도 엄마가 되면 자식을 위해 오히려 편협해지고 천박해지는 서사가 훨씬 많았다. 지금의 여성 서사는 여성이 열심히 커리어를 쌓고 근사한 시민이 되는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모성과 윤리를 보여주는 점에서 더 확장된 여성 서사라고 본다."(황진미 평론가)


마지막으로 이승한 평론가는 이러한 중년 여성 서사의 열풍과 새로운 모성 담론이 가능했던 것은 제작진도, 시청자와 관객도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인식의 변화가 바탕에 있었던 덕택이라고 강조했다.

"'가족'이라는 걸 정의하는 단위, 정상가족의 구성에 대한 인식이 예전에 비해 달라졌다. 우리가 알고있던 어머니 서사에서 탈피되어서 새롭게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시기이지 않나. (중년 여성의 새로운 서사는) 물론 여러 사람의 노력에 의한 결과이겠지만, 이러한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한 세대가 50대에 진입하면서 생겨난 자연스러운 환경의 영향도 크다고 생각한다. 연기하는 사람도, 수용하는 관객도 (이 변화가) 당연한 시점이 되지 않았나. 여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환경이라서 (중년 여성 서사 열풍이) 가능한 게 아니었나 싶다." (이승한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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