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슬픔의 삼각형> 포스터 이미지

영화 <슬픔의 삼각형> 포스터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 이 기사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황금종려상 2회 수상 거장의 신작, <기생충>과 통하다
 
알프 셰베리(스웨덴, 1946/1951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미국, 1974/1979년), 빌 아우구스트(덴마크, 1988/1992년), 에밀 쿠스트리차(유고슬라비아, 1985/1995년), 이마무라 쇼헤이(일본, 1983/1997년), 다르덴 형제(벨기에, 1999/2005년), 미카엘 하네케(오스트리아, 2009/2012년), 켄 로치(영국, 2006/2016년), 루벤 외스틀룬드(스웨덴, 2017/2022년).
 
세계 최고 영화제로 공인되는 칸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2회 수상한 감독들의 이름이다. 76회째에 이른 해당 영화제에서 단 9명만이 복수 수상의 영예를 안은 바 있다. 1회만으로도 세계 영화역사에 족적을 새기게 되는 황금종려상 2회라는 명예는 학계로 치자면 노벨상 복수 수상이라 할 만하다.

그중 21세기 들어 최고의 실적을 내고 있는 이가 스웨덴의 1974년생 남성감독 루베 외스틀룬드이다. 감독은 2014년 영화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으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심사위원상으로 칸 영화제와 인연을 맺었고, 2017년 <더 스퀘어>로 첫 황금종려상을, 2022년 <슬픔의 삼각형>으로 5년 만에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들어올렸다. 21세기 들어 2회 수상을 기록한 다른 감독이 미카엘 하네케(1942년생), 켄 로치(1936년생)라는 당대 노장들인 것을 감안하면, 세계 영화제의 패왕 칸이 공인한 21세기 가장 주목할 만한 영화작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하지만 국내에선 해외 작가주의 영화와 주요 국제영화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이 아니라면 비교적 낯선 이름이다. 그의 전작들 또한 일정한 지명도를 가지긴 했어도 동 시대 거장이라 불리는 이들에 비하면 비교적 덜 알려진 편이고 국내 영화인들에게 언급되는 경우도 적다. 칸 영화제에서 속된 말로 '밀어주는' 아이콘인 걸 감안하면 뜻밖의 상황인 셈이다. 칸 영화제 수상경력이 국내 흥행과 직결되는 건 아니지만, 2019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수상 이후로 국내에서 해당 영화제와 황금종려상 수상작에 대한 관심도가 대폭 높아진 상황에서 이례적인 경우이긴 하다.

아무래도 영화가 지닌 '유럽'적 코드가 진하기도 하고,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감독의 작품세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막상 이 감독의 영화를 접하고 나면, '예술영화'로 분류되는 작품들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 영화가 제공하는 사회문제와 블랙유머의 쾌감을 누릴 수 있다는 평이 적잖다. 게다가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황금종려상 수상작, <기생충>과 겹쳐 보이는 지점이 흥미를 더한다.
 
2019년 황금종려상 주인공 <기생충>은 반지하와 전망 좋은 저택 사이 수직-하강 구조로 계급구도가 고착된 현대사회의 보편적 면모를 지극히 간결한 구조로 풀어냈다. 3년 후 황금 종려상을 물려받게 된 <슬픔의 삼각형>은 현대사회의 계급갈등을 우화적 압축을 통해 풀어낸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되, 좀 더 큰 규모의 만화경처럼 풀어내는 데 도전한다. <기생충>과 비교해 본다면 유사점이 많은 이야기 구성이지만, 현대사회 비판에서 익숙한 장치와 설정들을 조합해 활용하는 편인지라 참신함은 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보다 확장된 규모와 전개 덕분에 보다 장대한 규모의 풍자극으로 쉴 틈 없이 볼거리를 제공하며 몰아치는 맛이 있다. 봉준호가 풍자 속 슬픔의 정서를 기반으로 하는 데 비해, 루벤 외스틀룬드는 풍자를 통해 1세계라 불리는 서구 사회의 위선을 지독한 냉소로 응시하려 시도한다. 그런 태도의 차이가 두 작품이 서로 많은 요소를 공유함에도 꽤 차이 나는 뒷맛을 느낄 수 있도록 구분해 준다. 대체 <슬픔의 삼각형>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걸까 이쯤 되면 궁금한 이들이 슬슬 생길 법하다.
 
감독의 확고한 통제 하에 쏟아지는 이야기의 향연
 
 영화 <슬픔의 삼각형> 스틸 이미지

영화 <슬픔의 삼각형>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영화는 3부로 나눠지는 단막극의 형태를 취한다.
 
# 1부 <칼 & 야야>, 장대한 서사의 애피타이저
 
1부는 유일하게 전체 줄거리에 등장하는 젊은 모델 겸 인플루언서 커플, '칼'과 '야야'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영화가 시작되면 눈에 들어오는 오디션 대기 장소에는 웃통을 벗고 성적 매력을 뿜어내는 수십 명의 남성 패션모델들이 있다. 리포터는 그들과 유쾌한 분위기로 인터뷰를 진행하던 중에 포즈를 주문한다. 눈에 들어 선발될 기회를 노리는 그들은 리포터가 희롱하듯 주문하는 특정 브랜드 이미지에 맞춰 제꺽제꺽 표정과 자세를 전환한다.

이 과정에서 '도도' 족과 '만만' 족으로 구분되는 패션브랜드 이미지가 관객들에게 실감나게 전달된다. 도도 족, 즉 성공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고가 브랜드 착장을 상정하면 모델 지망생들은 즉시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포즈에 서로 밀어내듯 거리를 둔다. 하지만 대중적이고 친근한 중저가 브랜드를 주문하면 순식간에 그들은 화목하게 어깨동무를 한 채 활짝 웃는다. 도도 족의 상징으로 발렌시아가 브랜드가, 만만 족의 표상으로는 스웨덴 의류 브랜드 H&M이 언급된다. 각 브랜드의 특성과 지향이 한눈에 들어오는 교재 같은 장면이다.
 
무리 속에 섞여 있던 칼이 자기 차례가 되어 오디션 장소에 들어선다. 그의 프로필을 보면서 수군거리며 귓속말을 하는 심사위원들을 통해 그가 모델로서는 전성기가 지났음을 관객들은 알아차리게 된다. 여기에서 감독은 대중에겐 잘 드러나지 않는 현대 패션업계의 특성을 조명한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슬픔의 삼각형'은 패션-뷰티업계 용어로 눈썹 사이 주름을 지칭한다. 또한 감독의 모국 스웨덴어로는 '인생에서 겪는 다단한 어려움'을 뜻한다고 한다. 칼에게서 그런 슬픔의 삼각형을 발견한 오디션 스태프들은 보톡스 시술로 처리하니 마니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현실 인생에서 뿌리내린 주름조차 단시간 시술로 메울 수 있다는, 실체 대신 이미지의 우위선언 격인 대목이다.
 
이어서 대부분의 다른 분야와는 정반대로 패션업계에선 남성에 비해 여성모델이 3배 더 많은 보수를 받는다는 것과, 업계 내부의 음침한 뒷이야기, 캐스팅을 위해 성적 접촉의 유혹에 직면하는 남성모델들의 사정이 언급된다. 그리고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패션쇼 현장이 시선을 잡아끈다. 눈부신 하이패션의 향연장이지만 처음 시각적 충격을 벗어나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하면, 지극히 위계서열적인 패션업계 행사에서 각종 진보적인 구호와 도발적 이미지가 난무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평화와 빈곤문제 해결, 환경보전의 메시지가 공허하게 식장을 채우지만 정작 거물이 자리를 잘못 앉게 된 순간 소수의 자리보전을 위해 한줄 전체가 수평으로 한 칸씩 이동하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그런 패션쇼 현장을 압도하는 건 한창 주가가 오르는 모델 야야다. 그녀는 칼의 연인이다.
 
행사가 끝난 후 둘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시며 단란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칼은 알아서 계산해주길 바라는 야야의 태도에 예민해진 나머지 설전을 벌인다. 겉으로 보기엔 유튜브에서 흔하게 발견 가능한 커플 브레이크 현장이다. 하지만 패션계에서 칼과 야야의 입지와 위상 차이를 이미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는 둘이 벌이는 유치찬란해 보이는 말싸움이 좀 다르게 다가올 법하다.

사회 전반의 통상적인 남성우월 권력구조와 패션업계 내 전복된 지형이 자아내는 불일치가 교차되면서 둘 사이에 생성되는 묘한 구도가 이목을 잡아끈다. 그렇게 티격태격하지만 둘은 이미 제법 겪었던 상황인지 젊은 연인다운 봉합에 도달한다. 칼은 전통적인 성 역할과 주머니 사정 차이에서 오는 혼란에 갈등하고, 지금은 잘 나가지만 활동수명이 짧아 모델경력 끝나고 나면 '트로피 와이프' 밖에 할 게 없다며 자조하는 야야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라는 동병상련 때문이다.
 
# 2부 <요트>, 현학적인 소동극과 화장실 유머의 결합
 
 영화 <슬픔의 삼각형> 스틸 이미지

영화 <슬픔의 삼각형>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2막에서 칼과 야야 커플은 지중해 호화요트 크루즈여행 중이다. 전설적인 그리스 선박 왕 오나시스의 소유였다는 2억 5000만 달러 가치의 고급스러운 대형요트는 자신을 이용할 능력이 되는 이들에게 기꺼이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모든 게 완벽하게 조직된 것처럼 보이는 요트 내에서 접객 담당 간부 승무원 '폴라'는 배에 탑승한 슈퍼리치 승객들의 기호와 요구에 맞춰줄 것을 승무원들에게 당부한다. 비록 서비스업이 매우 고난이도의 노동일지언정, 오직 항해가 끝나고 임금이 들어오는 순간을 생각하자며 폴라는 승무원들과 함께 파이팅을 외친다. 그 직후, 고도로 조직화된 것으로 묘사되는 크루즈 내 운영방식이 화창한 해상에서 척척 공개된다. 하지만 보는 이들에겐 점점 무언가 부조리하다는 감정이 느껴질 테다.
 
배의 갑판과 객실에는 여유를 만끽하는 승객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칼과 야야 커플을 제외하면 대부분 나이가 있고 게다가 백인 일색이다. 그들은 허물없이 테이블이나 벤치에서 어울리며 인사를 나누지만 상대에 대해 확인하고 분석하려 든다. 자신과 격이 맞는지 체크하는 태도가 역력하다. 그럼에도 일단 매우 화기애애하다. 그런 이들을 시중드는 승무원들 역시 선남선녀의 전형처럼 등장한다. 이들 역시 백인 계열이 절대다수다. 거기에 외모도 훤칠하고 세련된 제복으로 아름다운 바다와 선상 풍경에 배경처럼 녹아든다. 웃음을 짓고 친절하며 절도가 넘친다.

하지만 그들이 어울리는 현장과는 이격된 배 곳곳에는 승객들의 호화로운 여행을 떠받치는 다종다양한 노동의 고단함이 그려진다. 동남아시아 여성들은 화장실 청소를 하고 서남아시아와 아랍계 남성들은 기계장치를 손보거나 갑판과 선내 구석구석을 돌본다. 중무장한 경비병들은 도처에서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 전날 밤의 쾌락으로 푹신한 침대에 흐트러진 칼과 야야 커플은 청소를 위해 방문한 메이드가 자신들의 낙원에 들어서지 못하게 막는다.
 
칼과 야야가 대충 추스르고 식사와 여흥을 위해 방문한 공용공간의 다른 승객들은 각자 소개를 들어보니 다들 배경이 대단한 최상위 수준 부자들이다. 유일하게 인플루언서 협찬으로 배에 탄 이 젊은 커플은 자신들과는 동떨어진 승객들의 성공비결에 귀를 쫑긋하거나 다른 승객들처럼 당연한 듯 소비자 모드로 사소한 갑질을 하면서 크루즈 여행을 만끽한다. 하지만 대략적인 선내의 계층 지형과 점잖은 척하던 승객들의 위선이 한바탕 펼쳐진 뒤 아무 문제없을 것 같던 호화 요트에서의 휴가는 점점 균열을 맞이한다. 그리고 선장이 주최하는 선상만찬 자리에서 부자들의 파라다이스 같던 크루즈 여행은 그만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 3부 <섬>, 전복된 세계의 축소모델 속에서 결말로 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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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슬픔의 삼각형>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이제 가장 극단적인 우화가 될 3막의 시간이다. 모든 안전대책이 마련되어 있던 것 같았던 호화 요트는 어이없는 상황을 걸쳐 사라지고 만다. 수많은 탑승객 중 고작 8명이 무인도에 불시착해 구조를 기다린다. 섬에 표착한 이들은 요트 내에서 피라미드처럼 자리를 잡고 있던 계급 구도로 분류하면 1층(승객) 5명, 2층(상급 승무원) 1명, 3층(하급 승무원) 2명으로 구분된다. 칼과 야야 커플, 뇌졸중으로 말을 할 수 없는 중년 여성, IT 업계 CEO 중년 남성, 비료재벌 CEO 노년 남성, 간부 승무원 폴라, 자신이 기계실 승무원이라 주장하는 정체불명의 흑인 청년, 그리고 화장실 청소담당 필리핀 여성 애비게일이 생존자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당장 이들에겐 식량도 통신수단도 아무것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7명이 망연자실한 상태로 서로 의심하며 싸우던 찰나에 구명정 속에 탄 채 애비게일이 마지막으로 해변에 도착한다. 구명정 내에 비치된 식량과 물로 급한 허기를 달래고 일행은 이후 대책을 강구하지만 사회적으로 잘 나가던 상류층 승객들은 정작 섬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다. 유일하게 애비게일만이 물고기를 잡고 불을 피울 줄 안다. 그리고 그가 타고 온 구명정 속의 물자 역시 일행의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이다.

초반에는 폴라의 권위에 애비게일이 주눅이 든 것처럼 보이지만 이내 그는 자신만이 생존수단을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상징적인 권력의지를 발휘해 자신을 '캡틴', 즉 '선장'이라 인정하라고 다른 이들에게 요구한다. 이제 요트에서와는 역전된 힘의 관계가 무인도 해변에서 펼쳐지고 무기력한 다른 이들은 애비게일의 지위를 받아들일 수밖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그렇게 영화 속에서 1시간 넘게 펼쳐졌던 풍경, 즉 유람선 내에서 현실 자본주의 세계 질서를 그대로 재현했던 구조가 붕괴된 자리에는 이제 능력주의와 원시적 거래 형태가 등장해 대신 자리를 차지한다. 애비게일의 '힘'을 통해 여성 중심의 모계 공동체 생활이 이어진다. 애비게일의 압력에 폴라가 동참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 이후 한동안 (고전적 난파/생존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폭력이 전제된 극한의 실용주의와 대안공동체 실험이 엇박자로 구현된다. 누군가는 역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확장 세계관 속 기차 객실의 소우주와 <파리대왕>에서 원시 공동체의 변질되는 과정을 떠올릴 법하다. 여기에 <귀부인과 승무원> 부류의 성적 긴장감이 상황극 형식으로 일어나게 된다.

3부의 전복적 상황은 여성주의 시각과 생존주의-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문법 중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해석과 감흥 면에서 큰 차이가 날 이야기다. 물론 <슬픔의 삼각형>은 목가적 원시 공동체로 이야기를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는 영화다. 과연 이 기이한 우화가 어떻게 결말을 맺을지 관객 각자가 추리를 펼치는 가운데, 생존주의 장르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일정하게 예상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해석이 분분할 열린 결말이 다가온다.
 
1848년 공산당 선언의 21세기 버전, 영상언어로 풀어지다
 
 영화 <슬픔의 삼각형> 스틸 이미지

영화 <슬픔의 삼각형>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이 블랙코미디 영화에서 놀라운 점이자 호불호가 결정적으로 갈려지게 될 포인트는 2부 중반 요트의 마지막 순간으로 향하는 전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난장판이 된 선상만찬 이후 다들 멀미와 구토를 연발하며 흩어진 가운데 오직 둘만이 비위도 좋게 만취한 상태로 자리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 둘은 러시아 출신 비료재벌 자본가 승객 VS 미국 출신 사회주의자 선장이다.

2부 내내 다른 간부 승무원들의 재촉에도 몸이 안 좋다며 선실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않던 선장은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승객과의 장광설 대결에서 열의에 가득 차 있다. 선장은 배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직무는 유기한 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일관하지만 오직 승객과의 '입 배틀'에는 눈을 반짝이며 물러서지 않는다. 둘이 휴대전화에 저장된 온갖 문장을 인용하며 술주정을 벌이는 가운데 부자 승객들은 차례로 토사곽란을 일으키며 화면에 온통 구토를 쏟아낸다. 해당 장면은 얼핏 미국 슬랩스틱 코미디 장르에서 종종 등장하는 화장실 유머코드와 연결되듯 보이지만 그 실제 용도는 전혀 다르게 사용된다. 현학적으로 다가오는 주정과 토론의 갈림길 같은 대화와 끝이 없을 것처럼 연속되는 구토의 향연은 서로 정확히 연결되어 있다.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의 어록을 줄줄이 인용하며 자본주의 질서를 찬양하는 구소련 출신 '똥 팔이' 비료재벌 대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 및 미국과 유럽의 3세계 수탈 및 위선을 소리 높여 고발하는 미국 출신 호화유람선 선장의 설전은 뜯어보면 노골적으로 구현되는 근·현대 서구사상사 논쟁 그 자체이다. 특히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공산주의자) 선언' 해석에 대한 설전이 감독이 영화를 통해 전하려는 주제의식과 잇닿아 보인다. 공산당 선언은 사실상 작품의 다른 묘사와 설정 전체를 아우르며 영화의 설정과 전개를 결정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전혀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던, 1848년에 발행된 소책자에서 '자본주의는 모든 구멍으로 오물을 쏟아낸다!'는 예언적 구절과 <슬픔의 삼각형> 영화 속 분출되는 토사물(과 <기생충>을 떠올리게 하는 '분뇨의 역류'까지) 묘사는 하나로 통합되는 체험으로 전환된다.
 
선장 역할을 맡은 명배우 우디 해럴슨의 극중 역할은 사실상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 그 자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유럽 정치영화'의 맥을 이어가는 작품세계를 가진 감독은 복지국가 북유럽 백인 중장년 남성 지식인이 '캐비어 좌파'(혹은 '강남 좌파')로 자신을 규정하고 신랄하게 자신이 누리는 환경에 대해 성찰하지만 세상을 바꾸거나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데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무력감을 냉소 가득한 선장 캐릭터로 고스란히 표상해낸다. 즉 선장은 감독의 '스피커'이자 '오너캐' 자체인 셈이다.

국제영화제들에서 각광을 받지만 대중적으로는 '먹물 지식인의 한계'를 구현한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곤 하는 경향의 영화들 중 근래 가장 대표작이라 할 <슬픔의 삼각형>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돌출된 존재이자 '똥 팔이' 재벌 외에는 다른 이들과 연결고리가 부재한 이 캐릭터의 존재 이유는 그것으로밖에 설명될 수 없다. 몰락해가는 세계를 응시하지만 그 세계 밖으로 빠져나와 신세계를 개척할 용기는 없는 서구 지식인의 현주소를 표상하는 존재다.
 
반대로 다른 모든 이들과 연결성을 갖지만 선장의 장광설을 실제로 행동으로 구현하는 존재는 하급 승무원 애비게일이다. 그는 2부에선 화장실 청소, 즉 '똥'을 치우던 존재감 제로의 캐릭터였다. 하지만 3부에서 애비게일은 모든 타인들의 생사여탈을 손에 거머쥔 '캡틴'이다. 모두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자신의 명줄이 걸렸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또한 자신이 생에서 처음 얻은 권력과 신분이 어떤 위상인지 깨닫게 되기에 이른다.

선장을 대신해 그와 마지막까지 입씨름을 벌이며 사상은 전혀 다르지만 지적 유희의 쾌감으로 부대꼈던 '똥 팔이' 러시아 재벌은 재빠르게 태세를 전환해 애비게일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필사적으로 영합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인식이 정확한 것이다. 소련 체제에서 공산주의를 배웠지만 체제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러시아 신흥재벌들처럼 자신이 그저 관리책임을 지던 '콤비나트'(공업단지)를 사유화한 뒤, 모두가 하찮게 여기지만 식량 생산에 필수불가결한 비료산업의 거물로 떠오른 이 재벌은 소련 붕괴 때 기민하게 발휘했던 판단력을 다시금 발휘한다. 그가 시장을 장악하고 자신이 타고 있던 수천억 대 요트를 사버리겠다며 제멋대로 날뛸 수 있던 건 그가 '생산력'과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섬에서 그 권능을 가진 이가 누구인지는 누가 봐도 빤한 것이다.
 
'멋진 신세계'라는 환상에서 벗어났지만 대안은 못 찾은 지식인의 성찰
 
애비게일은 자신이 가진 생산력과 생산수단을 통해 8명의 단출한 원시 공동체 내에서 권력을 획득한다. 여성이 중심된 모계 구조다. 금력과 육체적 힘으로 군림하던 남성들이 여성들의 동맹 앞에 무릎을 꿇는다. 하지만 그렇게 구현된 공동체는 결코 평등한 목가적 이상향과는 거리가 멀다.

애비게일은 1부 속 칼과 야야가 패션업계 구도 내에서 상대적으로 역전된 처지 때문에 일어나던 위계문제를 제기한다. 야야가 업계 내 우월적 지위로 칼을 수행비서처럼 부려먹던 것에 비해, 3부 속 애비게일은 생존을 위한 식량과 편의를 무기로 야야의 방관 하에 칼을 분할 점유한다. 1부와 3부 핵심설정이 수미상관으로 연결되는 순간이다. 난삽하게 펼쳐지는 것 같은 짧지 않은 이야기가 문득 깨닫게 되는 순간 서로 거미줄처럼 접속되어 있는 설정인 것이다. 모든 게 다 계산되어 있구나 하는 오싹함과 경탄이 동시에 발현된다.
 
물론 3부의 공동체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애비게일 개인에게는 한풀이 겸 아마 일생 처음으로 자신이 주도권을 쥔 삶의 시간일 테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논의되는 입주 가사도우미 외국인력 수입 관련 부정적인 입장에서 거론되는 홍콩이나 싱가포르 사례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과거 1960~1970년대 한국 신축아파트 설계에는 현관 옆에 창고 같은 작은 방이 있었다. 바로 '식모' 방이다. 그렇게 필수업무를 수행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이제 외국인-타자가 대신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핵심은 '존재하지만 주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의 존재다. 애비게일은 비록 이전의 문명세계에서 자신이 누리던 혜택은 부재하지만 훨씬 만족감이 높은 섬에서의 삶인 게 분명하다.
 
하지만 다른 모든 이는 원래의 질서를 회복하고 싶다. 현재 애비게일이 지닌 독점적 지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징후도 포착된다. 채집과 낚시에서 수렵으로 이행되면서 인류 초창기 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으로 해석될 장면이 등장하고 그 직후에 공동체의 지속 여부를 놓고 결정적 전환점이 영화 속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뼈대를 이루다시피 집요하게 강조되는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단계 이론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에 그런 것이다. 그리고 체제를 뒤집는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과 노력을 수반하는 작업인지, 막상 전복된 상황에서 더 나은 세상이 금방 도래하는 것도 아니라는 묵시록적인 예지도 결론으로 향하는 데 한몫 보탠다.
 
3부에 살아남은 모두가 (막을 수 없어 뵈는) 자본주의 구질서 복귀에 동일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칼이 애비게일과의 대화를 통해 풀어내는 본인의 입장은 흥미로운 상상을 펼치게 만든다. 반대로 야야가 애비게일에게 대하는 태도는 이 영화가 끝난 후 등장인물들에게 닥칠 미래를 예측하게 만드는 장치로 기능한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이 주는 충격력은 유사 장르의 전형성을 뛰어넘어 관객을 도발한다. 그 도발에 대한 관객 각자의 태도를 통해 <슬픔의 삼각형>은 고도의 냉소를 띤 문명론 성찰이냐, 아니면 고장난 테이프처럼 반복해 답습되는 정치성 가미된 과잉된 설정 유희냐 중 일방향으로 구부러질 테다.
 
<작품정보>
슬픔의 삼각형 Triangle of Sadness
2022|스웨덴,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그리스|코미디/드라마
2023. 05. 17. 개봉|147분|15세 관람가
감독/각본 루벤 외스틀룬드
주연 샬비 딘(야야 역), 해리스 디킨슨(칼 역), 우디 해럴슨(토마스 스미스 역),
돌리 드 레온(애비게일 역), 즐라트코 부리치(드미트리 역), 비키 베를린(폴라 역)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공/공동배급 ㈜플레이그램
공동배급 메가박스중앙(주)
공동제공 ㈜하이스트레인저
 
2022 75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CST 아티스트 테크니션상(Andréas Franck 외)
2022 35회 유럽영화상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즐라트코 버릭), 각본상
2022 48회 LA비평가협회상 여우조연상(돌리 데 레온)
2023 굴드바게상 작품상, 감독상, 여우조연상, 남우조연상, 분장상, 의상상
슬픔의 삼각형 루벤 외스틀룬드 우디 해럴슨 즐라트코 부리치 돌리 드 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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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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