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는 멤버들의 군복무로 완전체 활동을 쉬고 개인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BTS는 빌보드 Hot 100차트 1위 6곡을 배출했고 유튜브 조회수 1억 뷰가 넘는 노래를 무려 51곡이나 보유한 세계적인 보이밴드다. 하지만 BTS의 오랜 팬들은 BTS가 '방탄소년단'으로 더 많이 불려지던 데뷔 초, 'No More Dream'과 'N.O', '상남자'로 이어지는 '< SKOOL > 3부작'으로 활동하던 풋풋하던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이는 영화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일부 영화 마니아들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4관왕에 빛나는 <기생충>을 능가하는 봉준호 감독 최고의 작품은 2003년작 <살인의 추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중에서도 200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차지한 <올드보이>보다 서울관객 16만에 그쳤던 <복수는 나의 것>이 더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관객들도 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이처럼 소위 '거장'이라고 불리는 감독들은 오늘날 높은 명성을 얻게 해준 작품들보다 조금은 촌스러웠던(?) 시절에 만든 초창기 작품들이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아카데미 감독상 2회 수상에 빛나는 대만 출신의 세계적인 거장 이안 감독의 경우도 마찬가지. 특히 이안 감독이 대만을 배경으로 찍은 유일한 작품인 <음식남녀>는 노년의 요리사와 세 자매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의 사이를 돌아볼 수 있는 수작이다.
 
 <음식남녀>는 1995년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음식남녀>는 1995년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 (주)지맥엔터프라이즈

 
1990년대 홍콩 청순 여배우의 대표주자

대만 출신 배우 오천련은 20대 초반이었던 1990년 고 진목승 감독이 연출한 유덕화 주연의 <천장지구>를 통해 데뷔했다. 오천련은 <천장지구>에 나올 당시 영화 출연 경험이 거의 없는 초짜 신인이었지만 청초한 매력을 뽐내면서 단숨에 왕조현을 위협하는 중화권 여성스타로 떠올랐다. 특히 유덕화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오천련을 오토바이에 태우고 질주하다가 흐르는 코피를 닦는 장면은 홍콩영화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천장지구>로 스타덤에 오른 오천련은 이듬해 <지존무상2: 영패천하>에 출연했고 1992년에는 신예스타 곽부성과 함께 <천장지구2>에 출연했다. 아무래도 전편과 비교될 수 밖에 없었던 <천장지구2>는 흥행이나 비평에서 모두 1편에 미치지 못했지만 오천련의 매력은 전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참고로 <천장지구2: 속천장지구> <천장지구3: 천장지구 완결> 등은 오천련이 출연한 <천장지구1, 2>와는 다른 '제목낚시'에 가까운 영화들이다.

1994년 주윤발과 함께 <도신2>에 출연하는 등 주로 홍콩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던 오천련은 1994년 오랜만에 고국인 대만으로 건너가 이안 감독의 <음식남녀>에 출연했다. 오천련이 항공사에서 일하는 주사부(고 랑웅 분)의 둘째 딸 가천을 연기한 <음식남녀>는 잔잔하지만 깊이 있는 이야기와 화려한 음식의 향연으로 극찬을 받으며 1995년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천장지구> 시리즈는 1992년까지 두 편으로 막을 내렸지만 오천련은 배우 커리어 내내 <천장지구>의 그늘이 계속 따라 다녔다. 1994년에는 <신변연인>이라는 영화가 < 95천장지구- 신변연인 >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고 정이건과 함께 출연했던 <묘가 천장지구>라는 영화도 있었다. 심지어 1997년 유덕화와 재회한 중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멜로영화는 <천장지구 3 - 풍화가인>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1999년 여명과 함께 멜로영화 <반생연>, 같은 해 제작진과 출연진이 모두 바뀐 <음식남녀2>에 출연한 오천련은 1999년 <끝나지 않았어요>를 끝으로 활동이 뜸해졌다. 2004년 일본과 한국의 합작영화 <호텔 비너스>, 액션영화 <강호>에서 조연으로 얼굴을 비춘 오천련은 2007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배우생활을 접은 오천련은 현재 내조와 육아에 전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희생이 가족의 '행복'을 위한 길은 아니다
 
 <음식남녀>에 출연한 세 자매는 각자 능동적인 인생을 살면서 새로운 행복을 선택한다.

<음식남녀>에 출연한 세 자매는 각자 능동적인 인생을 살면서 새로운 행복을 선택한다. ⓒ (주)지맥엔터프라이즈

 
이안 감독의 장편 데뷔작 <쿵후 선생>부터 <결혼 피로연> <음식남녀>로 이어지는 초창기 세 작품을 흔히 이안 감독의 '대만 아버지 3부작'으로 부른다. <쿵후 선생>은 태극권 교수직을 은퇴한 주선생이 결혼한 아들과 함께 살기 위해 뉴욕으로 건너오며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결혼 피로연>은 결혼을 종용하는 아버지와 동성연인을 숨기고 위장결혼을 준비하는 아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대만 아버지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음식남녀>는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쿵후 선생> <결혼 피로연>과 달리 대만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미각을 잃고 은퇴한 호텔 주방장 출신의 아버지와 장성한 세 딸의 이야기를 담은 가족영화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네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로 소개된다. 여러 캐릭터의 이야기가 번갈아 나오지만 이야기의 진행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기 때문에 관객들이 따라가기엔 크게 어려움이 없다.

화려한 대만의 음식들이 관객들의 눈을 사로 잡지만 <음식남녀>의 주요 스토리는 역시 아버지와 세 딸의 갈등이다. 둘째 가천(오천련 분)은 세 딸 중에서 가장 먼저 독립을 선언하지만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날린다. 갓 스무 살이 넘은 막내 가령(왕유문 분)은 친구의 남자친구와 눈이 맞아 그의 아이를 갖게 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맏언니 가진(양귀매 분)도 가족들과 상의도 없이 동료 교사와 불쑥 혼인신고를 하고 가족들에게 '통보'한다.

하지만 아버지인 주사부는 딸들의 연이은 충격 고백들을 모두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사실 영화의 가장 큰 반전을 쥐고 있는 인물은 아버지 주사부였기 때문이다. 주사부는 큰 딸 가진의 친한 언니이자 어린 딸을 홀로 키우는 싱글맘 금영(실비아 청 분)과의 결혼을 선언하면서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금영의 어린 딸에게 매일 도시락을 배달하고 금영 모친의 지루한 수다를 받아준 것도 모두 주사부의 '큰 그림'이었다.

<음식남녀>는 네 명의 인물이 가족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각자 자신의 인생을 능동적으로 살아가면서도 충분히 가족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다. <음식남녀>는 이안 감독이 본격적으로 미국에서의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고국인 대만을 배경으로 관객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작품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영화였다. 

'대만 아버지 3부작'에 모두 출연한 배우
 
 고 랑웅(오른쪽)은 이안 감독의 초창기 세 작품에서 모두 아버지 역으로 출연했다.

고 랑웅(오른쪽)은 이안 감독의 초창기 세 작품에서 모두 아버지 역으로 출연했다. ⓒ (주)지맥엔터프라이즈

 
이안 감독의 '대만 아버지 3부작'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세 작품 모두 아버지 역할을 맡은 배우가 같다는 점이다. <쿵후 선생>에서 은퇴한 태극권 교수를 연기한 고 랑웅은 <결혼 피로연>에서는 평범한 미국 이민자 아버지 역을 맡았고 <음식남녀>에서는 미각을 잃은 요리 고수를 연기했다. 1930년생으로 <음식남녀> 출연 당시에도 노장배우였던 랑웅은 2000년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에 출연한 후 2002년 세상을 떠났다.

주사부의 첫째 딸 가진을 연기한 배우 양귀매는 대만을 대표하는 여성배우로 지난 2005년 <달은 다시 떠오른다>를 통해 금마장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주사부의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느라 독신으로 살아가지만 뒤늦게 만난 동료 체육교사와 사랑에 빠진 후 곧바로 혼인신고를 해버렸다. 특히 영화 중반 학생들의 장난이었던 연애편지를 보고 설레면서 혼자 온갖 상상을 하는 연기가 상당히 재미있다.

아버지 주사부가 새로운 아내로 소개하며 <음식남녀>의 장르를 순식간에 '반전 서스펜스'로 변질(?)시킨 금영 역의 실비아 창은 대만에서 배우와 감독을 겸하고 있는 인물이다. 1980년대까지는 금마장 여우주연상을 세 번이나 수상했을 정도로 대만 최고의 배우로 군림했고 1981년 <그몽불수기>를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실비아 창은 지난 1월 <포브스>에서 선정한 '아시아를 대표하는 50대 이상 여성 50인'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음식남녀 이안 감독 오천련 랑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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