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디스크어워즈 신인상과 디지털음원대상을 휩쓴 걸그룹 아이브의 첫 정규앨범이 지난 4월10일 발매됐다. 아이브 정규 1집은 110만장의 초동판매량을 기록하며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지난 1일에는 걸그룹 르세라핌이 정규1집을 발표해 발매 첫날 100만장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대중음악 팬들은 아이브와 르세라핌의 정면대결(?)을 기대했지만 서로 20일 간의 격차를 두고 앨범을 발매하면서 두 걸그룹의 맞대결은 이뤄지지 않았다.

사실 이는 영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언론에서는 여름이나 명절,연말 같은 성수기마다 극장가에서 맞대결을 벌이는 대작들을 소개하기 바쁘지만 정작 배급사에서는 다른 기대작과의 맞대결을 피하기 위해 개봉시기를 치밀하게 조율한다. 실제로 마블 스튜디오의 <어벤저스>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 같은 대작들이 개봉할 때는 한국영화 기대작들이 좀처럼 같은 시기에 개봉하는 무모한 맞대결을 벌이지 않는다.

하지만 때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거 같은 규모의 작은 영화가 엄청난 호화캐스팅과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영화와 맞대결을 벌여 의외의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선전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지난 2013년 여름 크리스 에반스와 에드 해리스, 틸다 스윈튼 등 할리우드 스타배우들을 대거 캐스팅해 만든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와 맞대결을 벌여 쏠쏠한 흥행성적을 기록했던 김병우 감독의 <더 테러 라이브>가 대표적이다.
 
 <더 테러 라이브>는 제작비 35억 원의 상대적으로 작은 영화였음에도 전국 558만 관객을 모으며 크게 흥행했다.

<더 테러 라이브>는 제작비 35억 원의 상대적으로 작은 영화였음에도 전국 558만 관객을 모으며 크게 흥행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액션 스릴러 영화의 단골소재가 되는 테러

사회, 정치적인 목적으로 특정 인물이나 장소, 또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폭력을 가해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테러는 반드시 근절돼야 하는 범죄행위다. 지난 2001년의 9.11테러와 2015년 130명의 희생자를 만든 파리 테러 등은 여전히 세계인의 기억에 아프게 남아있는 대표적인 테러 사건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할 테러들도 가상의 이야기인 영화 소재로 등장하면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

키아누 리브스와 산드라 블록 주연의 영화 <스피드>에 등장하는 테러리스트 하워드 페인(고 데니스 호퍼 분)은 노골적으로 거액을 요구하며 버스 승객을 인질로 잡았다. 무고한 시민을 인질로 삼았다는 점은 <더 록>의 험멜 장군(에드 해리스 분)도 마찬가지였지만 험멜 장군에게는 전쟁터에서 희생된 동료 군인들의 명예를 살리겠다는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험멜 장군은 돈에 눈이 멀었던 부하에게 하극상을 당하며 사살된다.

제라드 버틀러와 모건 프리먼이 출연했던 앤트완 퓨콰 감독의 액션 스릴러 <백악관 최후의 날>에서는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백악관이 폭파되고 미 대통령이 인질로 잡히는 아찔한 상황이 벌어진다. 한국계 배우 릭 윤이 연기했던 한국 국무총리 경호팀장 강연식이 북한 테러리스트의 우두머리로 등장한다. <백악관 최후의 날>은 오락영화로서의 재미는 충분했지만 한국인들이 보기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설정 오류들이 많은 영화이기도 하다.

슈퍼히어로들이 대거 출연하는 마블 히어로 영화에도 테러리스트가 등장한다. <캡틴 아메리카:시빌 워>에서는 트찰라(고 채드윅 보즈먼 분)의 아버지이자 와칸다 국왕이었던 트차카(존 카니 분)가 소코비아 협정 발표 당일 폭탄테러사건에 휘말려 사망한다(당시 트차카는 아들이자 다음 왕위를 물려받을 트찰라에게 블랙팬서의 힘을 물려준 상태였다). 이는 블랙팬서가 '시빌 워'에서 토니 스타크 편에 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한국에서도 2020년대 들어 테러와 관련된 영화들이 많이 제작됐다. 2021년에 개봉한 황정민 주연의 <인질>에서는 인기배우 황정민이 테러범들에게 납치되는 이야기의 영화였고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은 항공 테러리스트로 변신한 임시완의 악역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작년 11월에 개봉했던 황인호 감독의 <데시벨>에서도 이종석이 소리에 반응하는 폭탄을 설계한 테러리스트 전태성 역을 맡았다.

비극적인 테러 상황까지 이용하는 악인들
 
 테러 상황을 자신의 출세에 이용하려 했던 윤영화 앵커는 오히려 방송국과 경찰에게 철저히 이용 당한다.

테러 상황을 자신의 출세에 이용하려 했던 윤영화 앵커는 오히려 방송국과 경찰에게 철저히 이용 당한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설국열차>는 400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으로 '캡틴 아메리카' 크리스 에반스와 <더 록> <트루먼쇼>의 에드 해리스, 아카데미 수상자 틸다 스윈튼 등 할리우드 유명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다. 제작비 35억 원에 불과한 하정우 원톱 주연영화 <더 테러 라이브>는 도저히 상대가 될 거 같지 않았다. 하지만 <설국열차>와 같은 주에 개봉을 강행한 <더 테러 라이브>는 558만 관객을 동원하는 이변을 일으켰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더 테러 라이브>는 영화 시작과 동시에 마포대교에서 폭탄이 터지고 후반부에서는 극 중에 등장하는 SNC방송국의 옆 건물이 폭파되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리 CG를 사용했다 해도 35억 원의 제작비로 이 정도 스케일의 영화를 완성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하지만 <더 테러 라이브>는 대부분의 장면이 윤영화(하정우 분)가 뉴스를 진행하는 부스 안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제작비를 크게 절감할 수 있었다.

<더 테러 라이브>의 일등공신은 역시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테러사건을 통해 자신의 떨어진 명예를 회복하려는 전직 마감뉴스 앵커 윤영화 역을 소화한 하정우였다. 하정우는 런닝타임의 상당부분을 상대배우 없이 홀로 이끌어 가야 했음에도 특유의 안정된 연기로 윤영화의 심리변화를 관객들에게 실감나게 전달하며 왜 자신이 한국영화의 독보적인 젊은 배우로 군림하는지 증명했다.

<더 테러 라이브>에서는 착한 사람이 악한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고 악한 사람 역시 더한 악인에게 팽을 당하는 등 악인이 득세하고 선인이 피해를 보는 소위 '권악징선'의 세상을 풍자하고 있다. 실제로 윤영화는 전 부인 이지수 기자(김소진 분)의 실적을 가로채 유명 언론인으로 떠올랐고 후엔 정부로부터 뇌물을 받은 비리언론인으로 나온다. 하지만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는 방송국(차대은)과 경찰(박정민)에게 철저히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진다.

<더 테러 라이브>에서 연출과 각본을 모두 맡은 김병우 감독은 <더 테러 라이브>를 통해 청룡영화상과 황금촬영상,부일영화상,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등 4개 영화제의 신인감독상을 휩쓸며 상업영화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하지만 2018년 제작비가 140억 원으로 크게 늘어나고 하정우와 이선균을 캐스팅해서 만든 차기작 <PMC: 더 벙커>는 167만 관객에 그치며 손익분기점(약 400만)에 한참 비치지 못했다.

<슬의생> 양석형 교수의 무시무시한(?) 과거
 
 이경영은 <더 테러 라이브>에서 '더러운 방송국 사람'이 어디까지 더러워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경영은 <더 테러 라이브>에서 '더러운 방송국 사람'이 어디까지 더러워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드라마 <미생>의 김동식 대리와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양석형 교수를 기억하는 관객들에게 <더 테러 라이브>의 테러리스트 박노규 목소리를 연기한 배우가 김대명이었다는 점은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일 것이다. 영화 내내 한 번도 얼굴이 나오지 않고 목소리로만 출연한 김대명은 침착하면서도 낮은 음성으로 여느 액션영화에 등장하는 테러리스트와는 다른 느낌의 테러리스트 연기를 소화하며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여러 영화에서 온갖 나쁜 일들을 '진행시키는' 배우 이경영은 <더 테러 라이브>에서도 SNC 방송국의 보도국장 차대은 역을 맡아 윤영화 앵커를 이용해 방송국과 자신의 목표를 '진행'시켰다. 실제로 차대은은 경찰청장의 죽음으로 상황이 꼬이자 윤영화에게 마포대교의 인질을 희생시켜 정부에게 박노규 체포의 명분을 주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윗선의 약속대로 뉴스시청률이 70%를 돌파하자 미련 없이 윤영화 앵커를 홀로 남겨두고 현장을 벗어난다.

배우 이선균의 아내이자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다양한 색깔의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 전혜진은 <더 테러 라이브>에서 경찰청의 대테러팀장 박정민 역을 맡았다. 침착성과 카리스마로 당황하는 윤영화를 잘 통제했지만 실은 박정민 역시 자신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 윤영화를 이용해 테러범을 잡는 것에만 집중한다. 심지어 윤영화가 청와대 비서실장을 협박하자 그의 입을 막기 위해 윤영화 사살을 지시하기도 했다.

<더 테러 라이브>는 테러 상황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는 악인들로 가득한 영화지만 그 와중에도 유일한 선역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윤영화 앵커의 전 부인인 SNC의 이지수 기자였다. 이지수 기자는 테러범에게 자신을 제외한 여자와 아이들이라도 구조를 허락해달라고 설득하는 선한 행동을 보여준다. <더 테러 라이브>로 주목 받은 배우 김소진은 2017년 <더 킹>의 안희연 검사 역을 통해 5개 영화제의 여우조연상을 휩쓸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더 테러 라이브 김병우 감독 하정우 이경영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