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변했을 수도 있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 군대 훈련소 생활관(당시엔 내무반으로 불렸다)에는 TV가 없었다. 군대 훈련소란 입소한 훈련병들이 정해진 기간 동안 철저하게 통제된 생활을 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여유 있게 TV를 볼 '자유시간' 따윈 주어지지 않았다. 이따금씩 시청각 정신교육을 위해 TV를 사용할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는 TV가 설치된 다른 장소로 이동해 시청각 교육을 실시했다. 

대신 각 생활관에는 스피커가 있어 훈련병들에게 필요한 사항을 방송을 통해 전파하는데 이용했는데 훈련병들이 스피커를 통해 가장 많이 듣는 음악(?)은 다름 아닌 매일 오전 6시에 울리는 '기상나팔'이었다. 하지만 훈련소에서도 가끔 취침시간에 짧은 시간이나마 국군방송의 라디오를 틀어줄 때가 있었다..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생활을 하는 훈련병들에게 강압적이지 않은 군DJ의 목소리는 성시경 만큼 감미롭게 들리곤 했다.

사실 자대에 배치된 후 생활관에 설치된 TV 시청에 익숙해지면 군 라디오 방송을 듣는 군인은 점점 줄어든다. 하지만 사제방송을 접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이면 군 방송은 군인들에겐 유일한 위로가 되곤 한다. 특히 전시상황으로 파병된 군인들에게는 군 라디오가 큰 힘이 될 수 밖에 없다. 베트남 전쟁 당시 주월미군 방송의 DJ로 활동했던 애드리언 크로나워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굿모닝 베트남>을 보면 그 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굿모닝 베트남>은 1억 달러가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지만 안타깝게도 국내에서는 극장개봉을 하지 못했다.

<굿모닝 베트남>은 1억 달러가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지만 안타깝게도 국내에서는 극장개봉을 하지 못했다. ⓒ 브에나비스타 픽쳐스

 
칸 영화제와 아카메미를 휩쓴 연기파 배우

미국 텍사스주에서 태어난 포레스트 휘태커는 학창시절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하다가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접은 후 대학에서 음악과 연기를 전공했고 1982년 <리치몬드 연애소동>을 통해 배우로 데뷔했다. <플래툰>과 <컬러 오브 머니> 등에서 단역으로 출연했던 휘태커는 1987년 <굿모닝 베트남>에서 고 로빈 윌리엄스의 동료이자 조력자 에드워드 갈릭 역을 통해 처음으로 상업 영화에서 큰 배역을 맡았다.

베트남 전쟁을 독특한 시각으로 바라본 휴먼 드라마 <굿모닝 베트남>은 세계적으로 1억23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고 휘태커는 이듬 해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버드>에서 주연으로 캐스팅됐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버드>에서 전설적인 알토 색소포니스트 찰리 파커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 휘태커는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일찌감치 연기 잘하는 배우로 인정 받았다.

휘태커는 2000년대 중반까지 여러 영화에서 주연과 조연을 넘나들며 존재감을 뽐냈지만 주연작을 기준으로 흥행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1996년에는 고 휘트니 휴스턴 주연의 <사랑을 기다리며>를 연출하며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휘태커는 2004년 케이티 홈즈 주연의 <대통령의 딸>까지 총 5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감독으로서는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진 못했다. 

하지만 휘태커는 2006년 케빈 맥도널드 감독의 <라스트 킹>에서 우간다의 광기 어린 독재자 이디 아민 역을 맡아 '인생연기'를 선보였다. 아민을 연기하기 위해 살을 20kg이나 찌우고 직접 우간다에서 아민의 주변 사람을 만나며 캐릭터 연구에 몰두한 휘태커는 독재자로만 알려진 아민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며 극찬을 받았다. 휘태커는 <라스트 킹>으로 미국과 영국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크리틱스 초이스의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2010년대 들어서도 활발한 연기활동을 이어간 휘태커는 2013년 김지운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 <라스트 스탠드>에 출연했고 2015년에는 <테이큰3>에서 유능한 경찰반장을 연기했다. 2016년 <로그 원:스타워즈 스토리>에서 분리주의 연합에 반대하며 온데론 반군으로 활동했던 쏘우 게레라와 2018년 <블랙팬서>의 와칸다 원로 주리 역시 휘태커가 묵직한 존재감을 뽐냈던 캐릭터들이었다.

전쟁 속에서도 로큰롤과 유머는 살아있다
 
 로빈 윌리엄스는 <굿모닝 베트남>으로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할리우드의 스타배우로 자리 잡았다.

로빈 윌리엄스는 <굿모닝 베트남>으로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할리우드의 스타배우로 자리 잡았다. ⓒ 브에나비스타 픽쳐스

 
전쟁은 매우 끔찍한 일이기 때문에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들도 무겁고 진지하고 때로는 참혹한 분위기로 흘러갈 수 밖에 없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로 남아있는 베트남전쟁도 마찬가지. 하지만 <굿모닝 베트남>은 121분의 런닝타임 중 절반 이상의 시간을 유쾌한 분위기로 이끌어 간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악착같이 버티고 피어나는 한 송이 꽃처럼 <굿모닝 베트남> 역시 무거운 전쟁영화들 속에서 다른 색깔을 보여주는 영화다.

미국 방송국의 그리스 지부에서 활동하다 베트남 사이공의 주월미군 방송국으로 부임한 라디오 DJ 애드리언 크로나워(로빈 윌리엄스 분)는 진지한 방송을 하라는 간부의 명령을 어기고 유쾌하게 방송을 진행한다. "굿모닝 베트남~"으로 시작되는 크로나워의 방송은 유명 정치인이나 지휘관의 성대모사는 기본이고 때론 소모전으로 길어지고 있는 베트남 전쟁을 풍자하기도 하며 전쟁터에서는 금기시되는 최신 로큰롤 음악을 틀어준다.

크로나워의 방송은 현지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되지만 크로나워가 마음에 두고 있던 베트남 여인의 남동생이 통칭 '베트콩'으로 불리는 남베트남 반정부 게릴라 조직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결국 크로나워는 타부대로 강제전출 명령이 내려지고 떠나기 전 베트남에서 친해진 주민들과 즐겁게 소프트볼 경기를 하고 사이공을 떠난다. 그리고 크로나워가 마지막으로 남긴 테이프에는 "굿바이 베트남~"이라는 베트남을 향한 인사가 담겨 있었다.

영화 <굿모닝 베트남>이 노골적인 코미디 장르가 아님에도 런닝타임 내내 유쾌하면서도 인간적인 매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역시 로빈 윌리엄스의 열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로빈 윌리엄스는 한 명의 게스트도 없이 방송시간 내내 원맨쇼를 펼치며 신들린 진행을 선보이는 크로나워를 완벽하게 표현했다. 이토록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유쾌한 배우가 생전 우울증에 시달리다 끝내 자살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아직도 믿기 힘들다.

<굿모닝 베트남>은 로빈 윌리엄스와 포레스트 휘태커에게도 대단히 의미 있는 작품이었지만 이 영화를 연출한 배리 레빈슨 감독의 첫 번째 흥행작이기도 하다. <굿모닝 베트남>으로 제작비의 10배 가까운 수익을 올린 레빈슨 감독은 1989년 <레인맨>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고 1998년에는 더스틴 호프만과 로버트 드니로 주연의 <웩 더 독>으로 베를린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아리따운 베트남 여인을 연기한 태국배우
 
 주인공 크로나워가 첫 눈에 반하는 베트남 여인은 태국출신 배우가 연기했다.

주인공 크로나워가 첫 눈에 반하는 베트남 여인은 태국출신 배우가 연기했다. ⓒ 브에나비스타 픽쳐스

 
<굿모닝 베트남>은 조력자이자 후임DJ 에드워드 가릭 역의 포레스트 휘태커조차 크게 돋보이지 않을 정도로 로빈 윌리엄스의 존재감이 컸던 영화다. 하지만 군인 역할로 등장한 배우들이 각자의 위치에 맞는 연기를 통해 이야기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군사기를 올려주던 크로나워의 방송스타일을 지지하던 테일러 장군(노블 윌링햄 분)은 크로나워를 전출시킨 선임 부사관을 괌으로 전출시키며 "여긴 단지 라디오 방송국일 뿐이야"라고 일갈한다.

크로나워의 진행방식에 불만을 품고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디커슨 특무상사는 크로나워가 베트콩과 내통하고 있다고 트집 잡으며 그를 강제 전출시킨다. 디커슨 특무상사를 연기한 고 T.J. 월시는 <굿모닝 베트남> 이후에도 <분노의 역류>에서 시의원, <어 퓨 굿 맨>에서 해군기지 부지휘관, <아웃브레이크>에서 백악관 수석보좌관 등 주로 '나랏일'을 하는 인물을 많이 연기했다. T.J. 월시는 <네고시에이터>를 끝으로 1998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굿모닝 대통령>에서 크로나워가 첫 눈에 반하는 베트남 여인 트링 역은 베트남이 아닌 태국 출신 배우 친타라 수카파타나가 연기했다. 하얀 색의 베트남 전통의상 아오자이를 입고 청순한 매력을 뽐내며 코로나워의 눈을 사로잡은 트링은 '베트콩의 누나'라는 현실적인 한계 때문에 끝내 크로나워와 이뤄지지 못한다. 그래도 마지막 작별의 순간에는 크로나워에게 먼저 손을 내밀며 이별의 아쉬움을 나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굿모닝 베트남 배리 레빈슨 감독 포레스트 휘태커 고 로빈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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