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축구협회는 28일 오후 서울월드컵경기장 회의실에서 이사회를 열고 징계중인 축구인 100명에 대해 사면 조치를 의결했다.

대한축구협회는 28일 오후 서울월드컵경기장 회의실에서 이사회를 열고 징계중인 축구인 100명에 대해 사면 조치를 의결했다. ⓒ 대한축구협회

 
대한축구협회(KFA)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축구인들에게 대한 '대사면' 조치를 기습적으로 발표하여 논란에 휩싸였다. 절차적 투명성에 어긋난 것은 물론이고, 승부조작 등 심각한 범죄를 일으켰던 이들도 포함되어 그 명분과 공정성에도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다.
 
대한축구협회는 지난 3월 28일 오후 서울월드컵경기장 회의실에서 이사회를 열고 징계 중인 축구인 100명에 대해 사면 조치를 의결했다고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국민적 관심이 모아진 우루과이와의 평가전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이번 사면 검토 대상자는 각종 비위 행위로 징계 중인 전현직 선수, 지도자, 심판, 단체 임원 등이다. 제명 징계를 받고 징계 효력 발생일로부터 7년, 무기한 자격정지 또는 무기한 출전정지의 경우 징계효력 발생일로부터 5년, 유기한 자격정지 또는 출전정지자는 징계처분 기간의 절반 이상 경과한 인물들이 포함됐다.
 
협회는 사면 조치를 단행한 배경으로 지난해 달성한 월드컵 10회 연속 진출과 카타르 월드컵 16강 진출을 자축하고, 축구계 화합과 새 출발을 위해 사면을 건의한 일선 현장 의견을 반영했다고 밝혔다. 오랜 기간 자숙하며 충분히 반성했다고 판단되는 축구인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부여하는 취지도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협회측도 비판적인 반응이 나올 것을 의식한 듯, "성폭력이나 성추행에 연루된 사람은 제외했고, 승부 조작의 경우에도 비위의 정도가 큰 사람은 사면 대상에서 뺐다"고 덧붙이며 "이번 사면이 승부 조작에 대한 협회의 기본 입장이 달라진 것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예의주시하고 있다. 국내 모든 경기에서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예방과 감독을 철저히 할 예정"이라고 부연설명했다.
 
싸늘한 축구팬 반응, '꼼수' 비판

그러나 이번 사면에 대한 축구팬들의 반응은 매우 싸늘하다. 불과 하루도 안 되어 온라인과 SNS 상에서는 축구팬들의 분노 어린 성토가 가득하다. 월드컵 16강 진출과 K리그 개막 등으로 높아진 축구의 화제성에 편승하여 은근슬쩍 명분도 떨어지는 끼워넣기식 사면을 기습적으로 단행한 것을 두고 '꼼수'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다른 비위 행위자들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축구계를 심각한 위기에 빠뜨렸던 승부조작 사태 가담자들에게까지 면죄부를 줬다는 게 충격적이다. 2011년 당시 K리그 축구선수들이 불법 베팅 사이트의 투자자들로부터 돈을 받고 승부조작을 한 것으로 드러났고, K리그와 리그컵 경기를 포함해 총 21경기에서 승부조작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축구계에서 영구 제명된 선수만 50명에 이른다.
 
협회는 당시 제명된 인물들 중 가장 죄질이 나쁜 2명을 제외하고 최성국, 권집, 염동균 등 총 48명을 이번 사면 명단에 포함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대사면으로 인하여 앞으로 축구계에서 승부조작 전과가 있는 인물들도 감독이나 코치 등 지도자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다.
 
스포츠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공정성이다. 연령, 계급, 빈부격차를 초월하여 누구든지 공정한 게임을 통하여 승부를 가리는 것이 스포츠의 매력이다. 승부조작은 암묵적 거래에 통하여 공정성을 훼손함으로써 스포츠의 근간을 부정하는 중범죄다.
 
그리고 승부조작의 위험은 아직 스포츠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절대 아니다. 실제로 축구계에서 승부조작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지 불과 몇 년 사이에 프로야구와 농구, 씨름 등에서도 승부조작 사태가 잇달아 터지며 체육계 전체가 한바탕 뒤집어진 바 있다. 축구계 역시 2015-2016년에는 경남 FC와 전북 현대가 각각 심판 매수를 통한 승부조작 시도가 또다시 적발되어 큰 파문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승부조작은 대개 불법도박이나 조직범죄와 연계된 경우도 많아서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가 어렵다. 성적지상주의가 지배하고, 운동과 결과밖에 모르는 환경에서 자라는 스포츠인들은 유혹에 더 휘둘리기 쉬운 상황이다. 개개인의 문제를 떠나 누구나 언제든 방심하면 이런 사태가 재발할 수 있다는 그 구조적인 위험성에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특히 축구계의 문제는 다른 종목에 비하여 미온적이고 안이한 후속 대처가 더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2016년 심판매수 사태 당시에도 일각에서는 구단 차원의 리그 퇴출까지도 거론됐지만, 당시 프로축구연맹은 해당 구단들에게 소폭의 승점 삭감과 벌금 정도로 처벌을 마무리되면서 '솜방망이 처벌' 논란을 자초했다. 당시 축구인 이영표는 이를 두고 "K리그가 승부조작하기 좋은 리그가 되어버렸다"고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세계축구계와 다른 종목들은 승부조작과 관련된 사안에서는 대부분 엄격한 '무관용'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프로야구 KBO리그는 허구연 총재는 지난해 3월 취임 당시 음주운전, 성범죄, 약물복용과 함께 승부조작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4불(不)"로 지정하며 그 위험성을 재차 강조한 바 있다. 2021년 프로농구 KBL에서는 승부조작 혐의로 2013년에 제명된 강동희의 사면 복권을 검토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재정위원회를 거쳐 여론의 거센 반발을 확인하자 격론 끝에 결국 무산됐다.
 
시대에 역행하는 결정

국내 법원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10년대 한국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스포츠계 승부조작 사건은 총 43건이었다. 이 중 가장 많은 13건이 바로 축구였다. 게임-경마(이상 8건), 야구(7건) 등을 압도적으로 제칠 만큼 부끄러운 기록을 세웠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축구계는 부끄러움이나 경각심은 커녕, 또다시 시대에 역행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것도 국민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는 대표팀의 '월드컵 프리미엄' 후광을 등에 업고, 정작 엉뚱한 이들을 구제하는 데 선심을 베풀었다. 만일 승부조작에 연루된 인물들이 다시 축구계에 복귀하여,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는 교육자가 되거나, 축구 실무에 관여하는 행정가가 된다면 과연 구성원들이 한국축구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신뢰할 수 있을까. 어린 유망주들은 무엇을 보고 배울 것인가.
 
협회가 명분으로 제시한 월드컵 16강 진출과 비위 행위자 사면이 도대체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이들이 한국축구계 발전과 대표팀의 성공에 기여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이들에게 굳이 면죄부를 주는 것을 축구계 '화합'이라고 포장할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
 
또한 협회는 죄질이 심한 이들은 제외했다고 변명한다. 하지만, 최성국처럼 단순 가담을 넘어서 브로커 역할을 했던 것이 드러난 인물까지 포함되었다는 것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단순히 시간이 좀 흘렀다고 해도 이렇게 간단하게 넘어가는 전례를 만든다면, 앞으로 축구를 하는 사람들이 비위 사안에 대해 경각심을 가질 수 있을까.
 
과정도 지극히 잘못됐다. 국민없는 국가가 존재할 수 없듯이, 팬이 없는 스포츠도 생각할 수 없다. 국가권력의 정점인 정부도 대사면을 발표할 때는 사회적인 여론을 반영하고 최소한의 명분을 갖추기 위하여 심사숙고한다. 심각한 비위 행위자들을 덜컥 사면한다고 했을 때는 협회나 축구계 관계자들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닌, 팬들의 여론을 수렴하고 고민하는 '공론화'의 과정이 선행되어야 했다.
 
협회는 과연 이 사안에 대하여 팬들의 생각을 듣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했는가. 어떤 스포츠 팬들이 승부조작도 용서해주자는 발상에 동의하겠는가. 그리고 누가 협회에게 자의적인 잣대로 면죄부를 줄 권리까지 허락했는가. 외부 여론과는 철저히 동떨어진 채 일방적으로 결정된 협회의 이번 결정은, 여전히 스포츠계 특유의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끼리끼리' 문화를 보여주는 듯하여 더욱 씁쓸한 장면이다.

협회의 이번 결정은 축구계 역사에 최악의 오점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승부조작에 대한 예방도, 대책 수립도 없는 상황에서 관련자들에게 섣부른 면죄부만 선물한 협회의 이번 선택은, '초대형 범죄를 저질러도 시간이 흐르면 구제받을 기회가 있다'는 잘못된 시그널만 남긴 셈이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축구협회 승부조작 대사면 최성국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