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인물들의 심리를 탐구해봅니다. 그 때 그 장면 궁금했던 인물들의 심리를 펼쳐보면, 어느 새 우리 자신의 마음도 더 잘 보이게 될 것입니다.[편집자말]
살아가면서 우리는 참 많은 일들을 경험한다. 기쁘고 즐거울 때도 있지만, 슬프고 불안하고 긴장되는 날들을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일을 겪기도 한다. 이런 상처들은 너무 깊어서 쉽게 낫지도 않을뿐더러 다 나은 듯하다가도 또다시 덧나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경험하는 것을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tvN 드라마 <청춘월담>은 사극이긴 하지만, 트라우마가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또 이를 어떻게 삶 속에 통합하고 극복해가는지를 꽤나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청춘월담>의 인물들을 통해 트라우마가 우리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본다.
 
세상과 타인에 대한 믿음의 상실
  
 세자 환은 '귀신의 서'를 받은 후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세자 환은 '귀신의 서'를 받은 후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 tvN

 
형의 죽음으로 세자가 된 환(박형식)은 어느 날 자신에 대한 저주를 담은 '귀신의 서'를 받는다. 팔을 못 쓰게 될 것이며, 벗이 자신을 위협하며,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갈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내용의 편지를 받은 환은 이후 두려움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그리고 정말로 화살에 맞아 오른팔을 한동안 쓰지 못하게 되고, 죽마고우 성온(윤종석)을 의심하게 되는 등 저주가 현실이 되는 듯한 일들이 벌어진다. 아버지 주상(이종혁)은 이런 환을 위로해주기는커녕, 혼자서 극복해야 한다고 다그친다. 심지어, 오른팔을 계속 쓰지 못할 경우, 왕세자의 자리가 위태로울 것이라고 경고까지 날리며 '아무도 믿지 말라'고 강조한다.
 
환이 겪은 이 모든 일들은 심리적으로 심한 외상을 남기는 트라우마라 볼 수 있다. 의지하고 믿었던 형의 사망 하나만으로도 트라우마를 경험할 수 있는데,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편지와 일련의 사건들, 그리고 이런 두려움마저 숨겨야 하는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즉, 환은 트라우마에 둘러싸인 채 살아왔던 것이다.
 
이렇게 트라우마에 반복적으로 노출될 때, 정서적 불안과 두려움을 넘어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믿음이 와해되는 경험을 한다. 즉, 세상이 안전하다는 믿음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환이 보이는 대표적인 트라우마 증상 역시 세상에 대한 신뢰의 상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토록 자주 내관들을 내치고, 재이(전소니)도 쉽게 믿지 못한다. 자신이 제시한 여러 시험들을 통과해 낸 재이를 '믿는다' 하면서도 발견된 편지 하나에 믿음을 거둬들이고 다시금 의심한다(7회). 그토록 친애하던 벗이었던 성온 역시 수시로 의심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리고선 이를 후회하기를 반복한다. 트라우마는 그를 '공포와 의심의 감옥' 속에 가두어 버린다.
 
해리성 기억상실 
 
한편, 환의 스승의 딸인 재이는 총명하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남장을 하고 고을의 여러 억울한 이들을 도우며 살아온 재이는 이런 모습을 존중해주고 지지해주는 따뜻한 가정에서 자랐다. 혼담이 오가던 어느 날, 재이는 가족들이 자신 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한다.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럽고 처참한 죽음을 목격하는 일은 정신적 트라우마를 남기는 가장 대표적인 일 중 하나다. 이런 일을 목격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일 텐데 재이는 자신이 가족을 몰살했다는 누명까지 쓰고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이렇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경험하고 하루아침에 다른 삶을 살게 된 재이에게 찾아온 트라우마의 주요 증상은 바로 '해리성 기억상실'이다. '해리성 기억상실'이란 심리적으로 심한 외상을 경험했을 때 그 무렵의 일들을 기억 속에서 지워냄으로써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심리적 현상 중 하나다. 재이는 자신의 누명을 풀고, 가족들을 죽인 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애쓰지만 매번 사건을 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순간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이런 해리성 기억상실은 충격적인 일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을 품게 만들기도 한다. 의남매처럼 지냈던 영이가 자결하며 남긴 편지가 발견된 7회 재이는 가람(표예진)에게 영이와의 관계에 대해 확인하지만 가람의 말조차 믿지 못하며 '내가 가람이에게까지 숨긴 채 영이와 만났던 건 아닐까?'라고 스스로를 의심한다. 이는 해리성 기억상실증을 잘 묘사한 부분이었다.
 
이 밖에 드라마 속 환의 동생 명안대군(임환빈) 역시 10회 국문장면을 몰래 보고서는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그는 수시로 끔찍했던 장면을 떠올리며 괴로워하고, 자신도 그런 일을 당할까봐 두려워하며 악몽을 꾸고 혼자 잠들지 못한다. 이런 침습적 사고와 플래쉬백은 트라우마의 전형적인 증상들이다.
  
 재이는 사랑하는 가족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누명까지 쓴다.

재이는 사랑하는 가족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누명까지 쓴다. ⓒ tvN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힘
 
하지만 트라우마를 경험했다고 해서 늘 이런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나은 삶을 갈망하는 인간 내면의 힘은 트라우마를 딛고 성장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이 힘을 견인해내는 것이 바로 공감과 수용의 경험이다. 드라마 속 인물들 역시 이런 경험을 통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3회 내관차림을 하고 환 앞에 나타난 재이가 억울함을 호소했을 때 환은 '그 마음 내가 안다'는 눈빛을 보낸다. 형의 죽음에 대해 의심받고 있는 환이 재이의 처지에 공감한 부분이었다. 아마도 재이는 이때 환을 믿기로 했을 것이다. 그리고 생사여탈권을 쥔 환이 자신을 의심하고 시험해도 아랑곳없이 변함없는 믿음을 보낸다.
 
이런 둘의 상호작용은 서로에게 힘이 된다. 재이는 내관이라는 신분으로 세자를 도우면서 무고한 죽음을 막아낸다. 이를 통해 재이는 전통적 여성의 역할에 갇히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로 다짐한다. 10회 재이는 세자에게 "누명을 벗더라도 혼인하지 않고 내관으로 살겠다"며 이렇게 말한다.
 
"전 언제나 오라비의 이름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쓸모있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비록 가짜지만 사내의 이름을 가졌고, 그 이름으로 사람들 앞에서 제 의견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두 목숨을 살려내었고, 한 가족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이전까지 누명을 벗고 성온과 혼인하는 게 목표라고 했던 재이가 외상을 딛고 한 걸음 더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환은 재이를 통해 세상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 간다. 끊임없이 의심하는 환을 한결같이 대하는 재이의 태도는 '사람을 믿는다는 것'에 대한 감각을 세자에게 회복시켜주었을 것이다. "믿어야 사람을 얻을 수 있다"는 재이의 말도 세자에게 도움이 되었겠지만, 아마도 자신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믿어주는 재이의 태도가 더 큰 귀감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서서히 믿음을 회복한 세자는 9회 '믿음'으로서 성온의 누명을 풀어주고 신의를 다진다. 이렇게 굳건해진 믿음은 마침내 귀신의 서의 저주를 떠올리지 않고 활을 쏠 수 있는 상태로 이끌어 준다(12회).
 
물론, 그럼에도 트라우마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13회 재이와 성온의 목숨이 위태한 순간에 환은 '이들이 죽는다면 나의 저주 때문'이라며 다시금 예전으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 저주가 틀리기를 증명해다오'라며 자신과 싸우기도 한다. 이처럼 트라우마는 끊임없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하지만, 이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환은 한 걸음 나아간 것이라 볼 수 있다.
 
 재이는 환의 끊임없는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고 행동한다.

재이는 환의 끊임없는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고 행동한다. ⓒ tvN

   
나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 드라마의 인물들을 보면서 최근 몇 년 사이 우리가 겪은 일들이 떠올랐다. 세월호, 10.29 참사의 장면들은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직·간접적인 트라우마를 남겼을 것이다. 누군가는 드라마 속 인물들이 겪는 트라우마 증상들을 지금-여기서도 경험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청춘월담>의 인물들은 보여준다. 다양한 트라우마의 경험을 공감과 수용의 태도로 대하고, 서로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말이다. 드라마 속 인물들처럼 우리도 서로 의지하며 지치지 않고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럴 때 지난 몇 년 사이 함께 겪어낸 트라우마의 경험들이 성장의 발판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송주연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청춘월담 전소니 박형식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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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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