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을 고대한 복수가 마침내 완수됐다. 학교폭력 생존자 '문동은'은 신의 은총 없이 제힘으로 존엄을 고쳐 세웠다. 신이 끝끝내 주지 않은 1%의 운은 조력자 주여정과 강현남의 사랑과 연대로 넘치게 대신했다. 용서는 없으니 영광도 없을 거라던 그 한마디가 마음에 걸려 한숨에 회차를 따라간 결과, 오른팔 상처 위에 수 놓인 꽃 타투와 사랑하는 이와 미래를 그리는 동은을 볼 수 있었다.

회개도 사죄도 없던 가해자들은 어떻게 됐을까? 서로의 스모킹 건을 하나씩 쥐어서 유지한 공동체는 동은이 던진 모난 돌 하나에 산산조각난다. 가해자 5인을 기다린 결말은 죽음이거나, 차라리 죽음이 부러울 만큼 처참하게 부서진 일상이다. 서사는 '악의 징벌'과 '영광의 회복'을 이뤄낸 후 통쾌한 마무리를 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선 드라마의 큰 줄기인 '생존자의 사적 복수'가 납득될 만한 사건들이 드러났다. 부모가 사회적 위치와 전문 지식을 이용해 아들의 죄를 면피하거나 학교폭력 가해자가 학교폭력을 다룬 콘텐츠를 윤리적 고민 없이 만드는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고, 앞으로도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한편, <더 글로리>의 영향으로 생존자 앞에 마이크가 놓이는 것 또한 체감할 수 있었다. 부정의한 사건들이 알려질수록 <더 글로리>를 시청한 사람들에게 내재된 공통의 감각이 무엇인지 떠올려보게 되는 이유다.
 
 마주선 동은과 여정. <더 글로리> 스틸컷

마주선 동은과 여정. <더 글로리> 스틸컷 ⓒ 넷플릭스

 
매력적인 악인과 안쓰러운 약자 사이

<더 글로리>에는 3명의 생존자가 나온다. 인생을 걸고 복수하는 문동은, 남편에게 맞지만 명랑한 년으로 자신을 호명하는 강현남, 가해자들의 가장자리를 택한 김경란이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연진을 똑바로 마주한 소희는 결국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모두 사회의 외면과 위계에 의한 폭력이 주는 고통을 공유하지만, 그 공통점이 절대적이지 않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3명의 생존자들은 얼핏 보기에 몸과 마음이 궁핍해 보인다. 피부는 거칠고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것 같고 '저 사람 지금 행복한가?' 하는 무례한 질문까지 튀어나오게 만든다. 하지만 <더 글로리>는 이 동정에 명확한 선을 긋는다. 생존을 위한 모습은 아름답지 않고 타인의 잣대로 판단 불가한 위엄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은과 현남의 연대와 동은과 경란의 관계는 피해자에게 부여됐던 일종의 이미지를 흔든다.

강현남이 빨간 립스틱을 바른 이유

강현남은 집 앞 슈퍼에서 한 번은 스쳤을 것 같은 친숙함을 가진 중년 여성이다. 삶의 기쁨인 딸 선아가 있고 두 사람은 가정폭력에 오랜 시간 노출됐다. "나는 매 맞지만 명랑한 년"이라고 자신을 부른 현남은 뭐라도 해낼 동은을 알아보고 도움을 청한다. 다름 아닌 남편을 죽여 달라는 것. 복수에 뜻이 맞은 두 여성은 제대로 한 편 먹고 서로의 지지자가 되어준다.

현남에게는 복수하는 여자의 판타지가 있다. 가죽잠바를 입고 핸들을 잡은 비장한 눈빛과 빨갛게 칠한 입술만이 돋보이는 장면이 판타지의 완전체다. 동은은 그런 현남의 판타지를 실현시킨다. 복수 업무에 필요한 차를 받은 현남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이동성을 갖게 된다. 남편의 폭력, 연진의 협박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선아와 장애물 없는 도로를 쭉 달리는 장면은 현남과 선아의 해방으로 보였다.

"엄마 진짜 개멋져!"라는 말을 들은 현남은 이제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 남편의 폭력도, 연진의 협박도 통하지 않을 만큼 존엄을 회복한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현남의 주머니 속 빨간 립스틱이 답이 되어줄 것 같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의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에 빨간 립스틱이 구호 물품으로 도착한 것처럼, 인간이 살기 위해선 숨 쉬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스스로를 가꾸고 소중히 대하는 일이 현남에게 생의 활기를 불어넣고 잊었던 인간성을 돌려주었다. '이모님 구합니다'라는 익명의 문자에 다시 빨간 립스틱을 집어 든 현남에게 기대되는 내일과 모레는 반드시 온다.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동은에게 가는 현남. 유튜브 캡처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동은에게 가는 현남. 유튜브 캡처 ⓒ 넷플릭스

 

회색지대에 선 주변의 얼굴, 김경란

폭력의 속성을 이해하고 있는 동은-현남은 복수에 뜻이 맞아 연대하고 종국에는 서로를 구한다. 그렇다면 피해자들의 연대는 언제나 순하고 아름답기만 할까. 현실에선 극악무도한 가해자와 완전무결한 피해자가 무 자르듯 나눠지지 않는다. 정규분포 가운데에 있는 보통의 사람들 사이, 가해와 피해가 난맥 속에 얽혀 있다.

경란은 평범하고 겁 많은 보통의 사람이다. 동은의 단짝이었던 경란은 연진이 동은에게 학교폭력을 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동은을 멀리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방관하고 버렸다. 지옥 같던 서로의 열아홉으로부터 18년이 지나, 동은은 인생을 걸어 복수를 준비한 반면 다음 피해자였던 경란은 재준이 운영하는 편집숍 매니저가 된다.

경란은 가해자들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 권력과 폭력에 무력해진 경란이 선택한 최선이거나 적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생존하는 게 그의 방식일 수 있다. <더 글로리: 시즌 1>이 끝난 후 시청자들은 경란이 숨은 조력자의 역할을 하리라 예측했다. 한편, 경란은 피해자들의 연대가 절대적일 것이라는 기대를 깬다. 어쩌면 둘은 서로의 첫 번째 가해자이자 평생을 기다린 복수도 망칠 수도 있는 관계다. 이때 동은은 경란에게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부탁이 무색할 정도로 경란은 가장 중요한 일을 한다. 몇 번이고 죽이고 싶었을 명오의 숨통을 끊은 사람은 다름 아닌 경란이다. 살기 위한 몸부림 혹은 고통의 폭발에 가까운 가해였지만 이를 계기로 경란이 삶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려보게 된다.
 
 연진의 스타일리스트로 일하는 김경란. 유튜브 캡처

연진의 스타일리스트로 일하는 김경란. 유튜브 캡처 ⓒ 넷플릭스

  
 왼쪽부터 동은, 경란. 마주 선 두 생존자. 유튜브 캡처

왼쪽부터 동은, 경란. 마주 선 두 생존자. 유튜브 캡처 ⓒ 넷플릭스

 
보통의 사람들이 연대하려면

<더 글로리>는 가해자들 간의 권력과 부모-자식 간의 층위를 세심하게 다룬 만큼 세 명의 생존자가 살아가는 방식 또한 얼마나 다른지 보여준다. 납작한 피해자다움에 포섭되지 않는 인물들을 통해 고통과 피해가 생존자를 설명하는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일평생 복수를 준비하며 웃을 일 없었다는 동은은 여정의 능청스러운 농담에 웃음을 터뜨렸다. 현남은 선아와 함께 바다를 바라보며 전에 느끼지 못한 해방과 통쾌의 순간을 가졌다. 모욕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할지 모를 경란에게는 듣지 못한 얘기가 아직 많다. 하지만 그의 현실적인 여건에서 최선의 선택이었을 삶을 누가 과연 쉽게 단정지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더 많이, 깊게, 넓게 들려야 하는 생존자들의 얘기가 있다. <더 글로리>를 시청한 사람들이 어떠한 감각을 공유한다면, 그 감각을 뻗어 들리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마음으로 연결하면 어떨까. 회색지대에 의자를 펼쳐야 하나 고민될 때 밝은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사람들의 행렬에 끼어서 가보자. 보통의 우리에게 함께일 때 배가 되는 용기가 분명 있다. 동은과 현남, 경란과 소희 뒤에 든든히 서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상상하게 되는 이유다.
더글로리 넷플릭스 생존자의 서사 피해자다움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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