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레트로 열풍에 발맞춰 1990년대 대중가요가 다시금 조명받고 있습니다. 장르 및 시대를 아우르는 과거 명반을 현재 시각에서 재해석하며 오늘날 명반이 가지는 의의를 되짚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핑클(Fin.K.L) 1집 < Fine Killing Liberty : Blue Rain > 앨범 이미지

핑클(Fin.K.L) 1집 < Fine Killing Liberty : Blue Rain > 앨범 이미지 ⓒ 대성기(현 DSP미디어)

 
[기사수정 : 2월 27일 오후 1시 50분]

무대 위에서 반짝이는 청소년들의 문화 우상, '아이돌'. 10대를 위한, 10대에 의한 K팝의 핵심 체계가 대한민국 가요계에 자리 잡은 지도 벌써 30년이다. 힙합, 알앤비(R&B)를 적극 취입하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서태지와 아이들을 필두로 수많은 댄스 팀들이 탄생했고, 그들이 은퇴를 선언한 1996년 이후부터는 화면에 비치는 모습까지 강조한 비주얼 그룹들이 빈자리를 채우며 '보는 음악'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젖혔다.

그중에서도 SM 엔터테인먼트와 대성기획 사이의 라이벌 구도는 당대 최고 관심사였다. SM에서 데뷔한 5인조 보이그룹 H.O.T.가 히트에 성공하자 대성기획은 7개월 뒤에 6인조 젝스키스를 선보였다. 이미 H.O.T.가 거대한 팬덤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후발 주자인 젝스키스 또한 밀리지 않는 기세로 그들과 호각을 겨뤘고, 두 팀은 그렇게 세력을 양분하며 아이돌 신화의 주역이 됐다.

대략 반년이 지난 시점에 딱 1명 더 많은 멤버를 취했던 전략. 직전의 성공 공식을 의식한 탓일까. 대성기획은 SM의 S.E.S.를 보며 차기 걸그룹의 구성을 조정했다. 애초에 세 명만 데리고 데뷔 앨범 녹음과 재 촬영까지 마쳤던 상황이었음에도 굳이 한 명을 추가 영입하며 4인조로 재편한 것. 나름의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공개된 소녀들, 바로 세기말을 휘어잡은 핑클이다.
 
Fin.K.L, Fine Killing Liberty
 
 걸그룹 핑클

걸그룹 핑클 ⓒ 대성기획(현 DSP)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을 끝낸다.' '끝'이란 뜻의 이탈리아어 'Fine(피네)'와 영어 문구 'Killing Liberty'를 축약한 핑클(Fin.K.L)은 귀여운 어감과 달리, 어딘가 굉장히 날이 서있다. 대성기획에서 걸그룹을 준비 중이란 소식이 들린 뒤, PC통신에서 팬클럽을 자처한 이들이 그룹명으로 제안한 '핀클'을 발음하기 편하게 반영한 작명의 결과였다.

태생이 증명하듯 핑클에게 거는 기대는 클 수밖에 없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의 전화 노래자랑 코너 출연을 계기로 발탁된 옥주현이 먼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만큼 가창은 보장되어 있었다. 이후 옥주현과 한 다리 건너 친구로 오디션 기회를 얻어 합격한 은광여고 '얼짱' 이진, 사생대회 중 유독 눈에 띄었던 여고생 성유리가 합류했다. 마지막 퍼즐 조각이 된 국민대 새내기 이효리까지 함께 하면서 외적 매력까지 겸비하게 된 그룹은 데뷔 전부터 비공식 무대를 가질 정도로 알음알음 팬층을 끌어모았다.

S.E.S.에 필적할 이상적인 조합을 꾸렸으니 다음은 온전히 음악의 몫이었다. 인지도를 쌓아둔 이들은 데뷔곡으로 느린 템포의 알앤비 'Blue Rain'을 택했다. 동시대 국내 경쟁자들이 세계적 인기를 구가하던 미국의 TLC 혹은 영국의 스파이스 걸스를 모티브로 활기찬 느낌을 강조한 데 반해, 핑클은 앨범에 그 기조를 수용하되 첫 활동곡만큼은 절제된 감성이 돋보이도록 차별을 두었다.

결과는 역시 성공이었다. 나이에 비해 성숙미가 흘렀고 키도 훤칠했던 덕분에 눈물을 빗줄기에 빗댄 어른스러운 콘셉트를 원만히 소화했음은 물론이고, 열아홉이라 믿기 힘든 옥주현의 깊은 소울과 이를 보조하는 멤버들의 여린 음성이 잘 어우러져 높은 음악적 완성도까지 자랑했다. 특히 비를 맞으며 '우산 속에 내리는 비는 멈추지 않을 거야'를 읊조리는 뮤직비디오의 마지막은 아직도 많은 팬들의 마음을 적실만큼 꼭 기억해야 할 핑클의 명장면으로 남아있다.
 
가요계 흐름을 읽어냈던 후속곡 선구안
 
 걸그룹 핑클

걸그룹 핑클 ⓒ 대성기획(현 DSP)

 
음악방송 1위 후보에도 오르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잔잔하고 아련한 발라드 스타일이 어린 팬들까지 끌어안기엔 분명 거리가 있었고, 이를 인지한 듯 이호연 사장은 준비해 둔 후속곡 활동 계획을 전면 수정하는 초강수를 던졌다.

"이것 봐 나를 한번 쳐다봐 / 나 지금 이쁘다고 말해봐.
솔직히 너를 반하게 할 생각에 / 난생처음 치마도 입었어."


녹음했는지조차 잊었을 정도로 후보로 염두에 두지 않았던 댄스곡 '내 남자 친구에게'가 그 주인공이다. 평소와 달라 보이기 위해 치마도 입었다는 고백에 은근한 도발과 앳된 진심이 섞여 듣는 내내 귀여운 인상이 남는다. 여기에 쐐기를 박는 한마디 '난 니 거야'로 남성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발랄함을 극대화하는 포인트도 명확했다. 펭귄처럼 뒤뚱거리다 스키 타듯이 팔을 앞뒤로 흔드는 동작처럼 따라 하기 쉬운 안무가 많은 이들을 들썩이게 했고, 뮤직비디오에서 착용한 체크무늬 옷과 끈을 늘어뜨린 가방까지 패션 아이템으로 유행시키며 하나의 현상을 만들어냈다. 

한국 걸그룹의 새로운 패러다임 제시
 
 KBS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출연한 핑클이 '루비'를 부르는 모습

KBS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출연한 핑클이 '루비'를 부르는 모습 ⓒ KBS

 
남녀노소 모두를 품에 안은 트렌드 세터들은 세 번째 활동곡 '루비(淚悲):슬픈 눈물'로 결정타를 날렸다. 쿨 '슬퍼지려 하기 전에', 룰라 '날개 잃은 천사'의 작곡가 최준영은 흥겨운 리듬 사이에 애절함을 배가하는 특유의 작법을 어김없이 발휘해 핑클에게 또 다른 소녀의 이미지를 투영했다. 하모니카와 기타 리프가 어우러진 노래는 쓸쓸하면서도 따사로운 가을 분위기에 녹아들었고 오랜 기간 사랑받는 대표곡으로 자리하며 다음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작품의 다채로운 색감은 타이틀곡에만 한정된 얘기가 아니었다. 제목처럼 그늘에 가려 존재를 드러내지 못했던 'Shadow'는 사실 앞서 언급했던 후속곡 후보였다. 젝스키스 은지원이 코러스와 랩에 참여해 관심을 끌었고, 신시사이저가 이끄는 마이너 진행 아래 음울하게 풀어낸 멜로디 덕분에 앨범 내에서 네 명의 음색이 가장 도드라지는 구간이기도 하다.

그 외에 목을 긁다가도 시원시원하게 뻗어가는 옥주현의 알앤비 보컬에 빠져드는 박근태 작곡의 '가'부터 새침한 무드의 디스코 '유혹', 힙합 비트 사이에 옥주현의 노랫말을 채워 넣은 트로트 풍의 '낙서'까지, 베테랑 제작자가 다져둔 기틀에 대거 기용된 신인 작곡가들이 각기 다른 개성을 쌓아 올리며 여러 장르의 흑인 음악을 한국적인 느낌으로, 나아가 핑클만의 색으로 해석했다.

데뷔 앨범 한 장으로 반년 넘게 방송국을 돌며 약 29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했고, 8번 공중파 무대 정상을 밟았으며, 무엇보다 하나 얻기도 힘든 히트곡을 3개나 쟁취했다. 첫 작품의 대기록은 곧 대중 그리고 시대가 남긴 전언이다. 좋은 음악을 동료 삼은 친근함이 엄청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시사하며 한국형 걸그룹만의 패러다임을 제시한 핑클. 자유로운 날개짓이 일으킨 돌풍은 K팝을 오늘날까지 이끈 동력이 되었다.
핑클 내남자친구에게 명반다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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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웹진 IZM 필자 정다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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