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시상식은 봉준호 감독으로부터 "지역 시상식"이라는 일침을 듣기도 했지만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영화인들에게는 '꿈의 시상식'이다. 그만큼 수상이 쉽지 않은 무대인데 실제로 생전에 3번이나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고 로빈 윌리엄스도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은 끝내 받지 못했다(1998년 <굿 윌 헌팅>으로 조연상 수상). 할리우드의 대표 연기파 배우 에드워드 노튼 역시 아카데미 수상 경력은 없다.

특히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통해 201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아카데미 도전사는 눈물 겨운 수준이다. 2005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에비에이터>로 처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디카프리오는 2007년 <블러드 다이아몬드>, 2014년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번번이 수상에 실패했다가 2016년  <레버넌트>로 드디어 한(?)을 풀었다.

할리우드에서 연기 잘하는 배우를 언급할 때 결코 빠지지 않는 배우 덴젤 워싱턴 역시 3번의 도전 끝에 오스카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차지했다. 워싱턴은 1993년 < 말콤X >와 2000년 <허리케인 카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각각 알 파치노와 케빈 스페이시에게 밀려 수상이 좌절됐된 바 있다. 그런 워싱턴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긴 작품은 바로 2001년에 개봉한 안톤 후쿠아 감독의 <트레이닝 데이>였다.
  
 <트레이닝 데이>는 데이비드 에이어 감독의 각본에 안톤 후쿠아 감독이 자신의 색깔을 입혀 명작으로 탄생했다.

<트레이닝 데이>는 데이비드 에이어 감독의 각본에 안톤 후쿠아 감독이 자신의 색깔을 입혀 명작으로 탄생했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작가로 데뷔해 감독으로 변신한 재주꾼

사실 드라마에서는 <더 글로리>의 김은숙 작가나 <킹덤>의 김은희 작가, <사랑의 불시착>의 박지은 작가처럼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스타작가들이 많지만 영화 쪽에선 스타작가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그렇다고 영화에서 각본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실제 아카데미 영화제에서는 작품상, 남녀주연상, 감독상과 함께 각본상 및 각색상을 주요 시상에 포함시킬 정도로 시나리오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데이비드 에이어 감독은 미국의 영화 감독 겸 각본가로 LA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다가 미 해군에 입대해 군생활을 했고 전역 후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다. 2000년 조나단 모스토우 감독의 < U-571 >의 각본을 공동 집필하며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에이어 감독은 2001년 그의 작가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두 작품의 각본을 썼다. 전설의 카 체이서 액션영화 <분노의 질주>와 범죄 스릴러영화 <트레이닝 데이>였다.

<트레이닝 데이>의 각본을 단독집필하며 작가로서의 능력을 인정 받은 에이어 감독은 2003년 콜린 파렐에게 대중적인 인지도를 안겨준 영화 < S.W.A.T. 특수기동대 >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에이어 감독은 2005년 <하쉬 타임>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고 2008년에는 키아누 리브스와 크리스 에반스가 출연한 <스트리트 킹>을 연출해 2000만 달러의 제작비로 66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스트리트 킹> 이후 약 4년간 공백을 가졌던 에이어 감독은 2012년 제이크 질렌할 주연의 <엔드 오브 왓치>를 만들었고 2014년에는 아놀드 슈왈제네거 주연의 <사보타지>와 브래드 피트 주연의 <퓨리>를 차례로 선보였다. 에이어 감독은 2016년 세계적으로 7억 46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올린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연출하며 흥행감독으로 급부상했고 2020년에는 할리 퀸의 솔로무비 <버즈 오브 프레이> 기획에 참여했다.

같은 해 <트랜스포머> 시리즈로 유명한 샤이아 라보프 주연의 <택스 콜렉터>를 연출한 에이어 감독은 2017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됐던 윌 스미스 주연의 <브라이트> 속편과 제이슨 스타뎀 주연의 액션영화 <비키퍼>를 준비하고 있다. 에이어 감독은 할리우드에서 각본가로 시작해 감독으로 변신한 대표적인 인물로 자신이 연출한 상당수의 영화에서 각본작업까지 직접 참여하며 영화계에서 점점 입지를 넓히고 있다. 

긴장을 풀 틈조차 주지 않는 범죄 스릴러
 
 덴젤 워싱턴이 연기한 알론조는 대낮에 길 한복판에서 갱단과 총격전을 벌일 정도로 거친 성격을 가진 경찰이다.

덴젤 워싱턴이 연기한 알론조는 대낮에 길 한복판에서 갱단과 총격전을 벌일 정도로 거친 성격을 가진 경찰이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트레이닝 데이>의 후쿠아 감독은 뮤직비디오와 CF감독으로 활동하다가 1998년 주윤발 주연의 <리플레이스먼트 킬러>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다. <트레이닝 데이>는 후쿠아 감독의 3번째 장편 영화로 후쿠아 감독의 연출스타일이 관객들에게 인정 받기 시작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후쿠아 감독은 <트레이닝 데이>를 시작으로 <더 이퀄라이저> 시리즈, 이병헌이 출연했던 <매그니피센트 7>까지 덴젤 워싱턴과 4편을 함께 했다.

교육, 훈련이라는 뜻을 가진 '트레이닝'이라는 제목만 보고 일부 관객들은 <트레이닝 데이>가 스포츠 영화일 거라 오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트레이닝 데이>는 의욕 넘치는 신참형사 제이크 호이트(에단 호크 분)가 마약반의 전설적인 형사로 꼽히는 알론조 해리스(덴젤 워싱턴 분)를 사수로 만나면서 겪게 되는 고초를 다룬 작품이다. 실제로 제이크는 알론조와 함께 다닌 하루 동안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위기를 여러 차례 겪게 된다.

<트레이닝 데이>를 통해 200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러셀 크로우와 숀 펜, 윌 스미스 등을 제치고 2전 3기 끝에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덴젤 워싱턴은 그야말로 엄청난 열연을 보여줬다. 실제로 "감옥에 가고 싶어, 아니면 집에 가고 싶어?", "양들을 보호하려면 늑대를 잡아야지. 그리고 늑대를 잡기 위해선 다른 늑대가 필요한 법이야", "킹콩도 나한테 개기지 못해!" 같은 영화 속 명대사들은 대부분 알론조를 연기한 워싱턴에 의해 나왔다.

후쿠아 감독이 <트레이닝 데이>를 연출했을 당시의 나이는 30대 중반에 불과했다. 젊고 능력 있는 흑인감독의 등장은 흑인들을 열광시키기 충분했다. 하지만 <트레이닝 데이>는 덴젤 워싱턴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을 제외하면 작품상이나 감독상 같은 다른 주요부문에서는 후보조차 오르지 못했다. 이에 당시 흑인사회에서는 보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아카데미의 결정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에단 호크는 제이크 역에 낙점됐다가 스케줄 문제로 출연이 힘들어졌고 후쿠아 감독은 에단 호크의 대타로 래퍼 에미넴에게 제이크 역을 제안했다. 하지만 에미넴은 영화 < 8마일 > 촬영 때문에 이를 고사했고 차선으로 토비 맥과이어가 제이크 역에 낙점됐지만 에단 호크의 스케줄 문제가 해결되면서 제이크는 다시 원래 주인(?)을 찾아갔다. 그렇게 '낙동강 오리알'이 되는 듯했던 맥과이어는 2002년 <스파이더맨>을 통해 라이징 스타로 떠올랐다. 

힙합씬의 전설들이 출연한 <트레이닝 데이>
 
 전설적인 힙합 뮤지션 스눕 독(오른쪽)은 <트레이닝 데이>에서 휠체어를 탄 마약중개상을 연기했다.

전설적인 힙합 뮤지션 스눕 독(오른쪽)은 <트레이닝 데이>에서 휠체어를 탄 마약중개상을 연기했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지난 1991년 론 하워드 감독의 <분노의 역류>에서 스티븐(커트 러셀 분)과 브라이언(윌리엄 볼드윈 분) 형제를 친자식처럼 키운 존 앳콕스를 연기했던 스콧 글렌은 <트레이닝 데이>에서 거물 마약거래상 로저 역을 맡았다. 처음 대면했을 땐 알론조와 술잔을 기울이며 오랜 친구처럼 친분을 과시하지만 결국 알론조는 동료경찰 4명과 함께 로저의 집을 찾아가 로저를 살해하고 로저의 집에 있는 금품을 훔친다.

2022년 연말에 개봉했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물의 길>에서 멧카이나 부족의 족장 토노와리를 연기했던 뉴질랜드 출신 배우 클리프 커티스는 <트레이닝 데이>에서 LA갱단의 두목 스마일리 역을 맡았다. 스마일리는 알론조의 청부를 받아 제이크를 죽이려 하지만 같은 날 제이크가 마약중독자들로부터 구했던 소녀가 바로 스마일리의 사촌동생이었고 스마일리는 제이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그의 목숨을 살려준다.

흑인 감독과 흑인 주연배우가 출연하고 흑인 갱단의 소굴이 자주 등장하는 <트레이닝 데이>에는 전설적인 흑인 힙합 뮤지션들이 많이 출연했다. 미국의 정상급 힙합 뮤지션이자 배우활동을 겸하고 있는 스눕 독은 휠체어를 탄 마약 중개상으로 출연했다. 무명의 백인래퍼 에미넴을 발굴해 슈퍼스타로 성장시킨 힙합 프로듀서 닥터 드레는 로저를 살해하러 갈 때 알론조와 합류하는 경찰 무리 중 한 명으로 등장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트레이닝 데이 안톤 후쿠아 감독 덴젤 워싱턴 에단 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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