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0일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에서 열린 해리 스타일스의 첫 내한 공연

지난 3월 20일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에서 열린 해리 스타일스의 첫 내한 공연 ⓒ Lloyd Wakefield

   
해리 스타일스를 빼 놓고 나의 작년 플레이리스트를 말할 수 있을까?

'스포티파이'가 결산한 기록에 따르면, 내가 지난해 가장 많이 들은 100곡 중 10곡이 해리 스타일스의 노래였다(4월에 발매된 'As It Was'는 무려 118회나 들었다). 물론 그는 나의 플레이리스트에서만 주인공이 아니었다. 'As It Was'는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15주 동안 1위에 올랐다.

지난달 열린 제65회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세번째 정규 앨범 < Harry's House >로 올해의 앨범상을 받았다. 세 장의 앨범에 걸쳐 성숙을 거듭한 그는, 음악적으로 평가절하당하기 일쑤인 보이 그룹의 유리 천장을 깼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원 디렉션'의 막내라 부르지 않는다. '롤링 스톤'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전세계가 가장 원하는 남자'이자, 현시대 팝의 정점에 서 있는 완성형 뮤지션이다.

지난 3월 20일, 해리 스타일스가 서울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구 체조경기장)에서 첫 내한 공연 'LOVE ON TOUR'를 열었다. 평일 공연(월요일)이지만 티켓은 판매와 동시에 매진되었고, 암표도 속출했다. 한국 공연 시장에서 케이스포돔은 성공한 가수의 상징이다. 만 오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연장이지만, '세계가 원하는 남자'에게는 이곳이 너무 작게 느껴졌다.

공연을 앞두고 케이스포돔에 가보니 관객들의 패션이 다양했다. 젠더 플루이드(Gender fluid) 패션을 추구하는 아티스트의 공연답게, 관객의 색깔도 다양했다. 해리 스타일스가 즐겨 입는 핑크색 바지, 핑크색 퍼 같은 아이템이 이곳에선 낯설지 않았다. 그의 공연 자체가 곧 페스티벌이었다.

이 시대 팝의 현재, 해리 스타일스
 
 지난 3월 20일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에서 열린 해리 스타일스의 첫 내한 공연

지난 3월 20일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에서 열린 해리 스타일스의 첫 내한 공연 ⓒ Lloyd Wakefield

 

저녁 8시, < Harry's House >앨범의 첫 트랙인 'Music For A Sushi Restaurant'의 통통 튀는 신시사이저 사운드와 함께 해리 스타일스가 등장했다. 알록달록한 세트 위에 밴드 멤버들이 자리했고, 해리 스타일스는 반짝거리는, 목이 깊게 파인 점프 슈트를 입고 있었다. 이렇다 할 특수 효과나 화려한 LED 쇼는 없었다.

대신 기본에 충실한 공연이었다. 프론트맨 해리 스타일스와 밴드가 빚어내는 탄탄한 라이브, 그리고 해리 스타일스 개인이 뿜어내는 슈퍼스타의 아우라. 이것이 모든 기교를 대체했다. 그는 무대를 넓게 활용하면서 팬들을 만났다. 첫 곡부터 무대의 양쪽 끝을 오갔으며 돌출형 무대를 런웨이처럼 활보했다. 드럼과 일렉 기타에 맞춰 보여주는 몸짓은 익살스럽기도 했고, 격렬하기도 했다. 자연스러운 몸짓은 음악의 멋을 더욱 배가했다.

내가 해리 스타일스의 노래를 그렇게 많이 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음악은 세련된 편집숍이나 라운지 바에도 어울리고, 방 청소를 하면서 듣기에도 좋다. 그는 플리트우드 맥, 조니 미첼, 스틸리 댄, 프린스 등 20세기 전설들을 부지런히 연구했고, 데이비드 보위의 중성적인 멋도 소환했다. 그의 음악은 언제나 록에 빚을 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듣기 좋은 '이지 리스닝' 팝으로 귀결되었다.

기타를 치면서 부른 두 번째 곡 'Golden'. 'Watermelon Sugar', 'Late Night Talking', 웅장한 록 발라드 'Sign of the Times' 등 히트곡 행진이 관객을 흥분하게 했다. 해리 스타일스의 공연은 13년의 음악 인생을 열심히 요약한, 밴드의 공연이었다. 록 음악의 직선적인 힘과 소울 음악의 그루브가 공존했다. 'Adore You'의 후반부에서는 밴드의 펑키한 합주가 1분 넘게 이어졌다.

원 디렉션의 대표곡 'What Makes You Beautiful'을 원숙한 목소리로 부르고, 밴드 멤버와 발을 맞추며 격렬한 동작을 보여준 것도 인상적이었다. 밴드 공연을 좌석에서 보는 것은 제법 고된 일이다. 하지만 공연 후반부 'Treat People With Kindness' 때부터는 스탠딩과 지정석의 경계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앵콜곡인 'As It Was'와 'Kiwi'가 울려 퍼질 때쯤에는 거의 모든 관객이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고 열광했다. 팬이든, 아니든 현세대 최고의 슈퍼스타를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동시대인이 열광하는 문화를 정확히 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티스트가 이렇게 훌륭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면, 그 의미는 더욱 커진다.

13년 팬 앞에서 증명한 '해리의 시대'
 
 해리 스타일스

해리 스타일스 ⓒ 소니뮤직

 

능동적인 팬이 많을수록 공연의 분위기는 더 재미있어지기 마련이다. 아티스트와 팬 간의 상호 작용 역시 공연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원디렉션 시절부터 해리 스타일스를 응원해왔던 팬덤이 공연장을 가득 채웠고, 그만큼 떼창의 규모도 컸다. 'Matilda'를 부를 때는 휴대 불빛으로 별의 홍수를 만들었고, 'Love Of My Life'를 부를 때는 "Harry, You Are The Love Of My Life"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흔들었다.

과연 수천만의 팬덤을 보유한 아이돌 출신답게, 해리 스타일스는 이 호응에 정성껏 화답했다. 태극기를 펼치고, 한국식의 90도 인사를 선보였다. "한국 와서 행복해요" 같은 한국어 구사는 기본이었다. 그는 '(데뷔 후) 13년 동안 당신을 기다렸다'고 적힌 팬의 플래카드를 직접 받아 목에 걸었고, 팬의 이름을 물었다. 팬이 선물한 갓을 머리에 쓰고 'Late Night Talking'을 불렀다. 생일을 맞은 팬을 위해 만 오천의 관객과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누군가는 이런 모습을 '오글거린다'며 낯간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슈퍼스타도 팬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해리 스타일스는 잊지 않았다. 아이돌의 흔적을 간직한 전천후 록스타라고 해 두자.

지금 해리 스타일스에게는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누군가는 그를 차세대 팝의 왕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데이비드 보위를 소환하며 극찬을 보내기도 한다. 왕관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짓누를 수도 있다. 하지만 해리 스타일스는 자신이 이 수식어에 걸맞은 아티스트라는 사실을 부지런히 증명하고 있다. 이번 공연 역시 좋은 증명서였다. 'Golden'의 노래 가사 "You're so golden"처럼, 그는 음원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지금은 해리 스타일스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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