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버세이션> 포스터

영화 <컨버세이션> 포스터 ⓒ 필름다빈

 
서사를 파괴하는 영화를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흔히 기승전결로 설명되는 결말을 위한 전진을 우리는 얼마나 당연하게 여겨왔던가. 세계와 캐릭터를 소개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위기와 맞닥뜨리고 분위기를 고조시켜 마침내 결말의 감동에 이르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우리는 충분히 만나온 건지도 모르겠다.
 
여기 기존의 영화문법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는 영화가 있다. 김덕중 감독의 <컨버세이션>은 제목이 말하는바 그대로 대화에 집중한 작품이다.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다 돌아온 세 여자의 대화로 다짜고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이후 등장인물을 바꾸고 시공간을 넘나들며 기묘한 대화의 연속을 내보인다.
 
등장인물을 바꿔가긴 하지만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여섯이다. 남자 셋과 여자 셋으로, 첫 장면에 등장하는 은영(조은지 분), 명숙(김소이 분), 다혜(송은지 분)와 승진(박종환 분), 필재(곽민규 분), 대명(곽진무 분)이다. 여기에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잠깐 등장하는 택시기사(정재윤 분)까지가 대사를 가진 배우들이라 하겠다.
 
 <컨버세이션> 스틸컷

<컨버세이션> 스틸컷 ⓒ 필름다빈

 
대화, 대화, 그리고 대화
 
첫 장면은 딸을 낳은 은영의 집에 명숙과 다혜가 놀러오며 시작된다. 이들은 이런저런 대화 속에서 과거 파리 유학시절을 떠올린다. 평안해 보이는 대화 속에서도 기묘한 긴장이 이어지는 건 이들이 가깝지만 충분히 가깝지 않은 관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 사람이 함께 대화를 나누다 담배를 피러 두 사람이 자리를 옮기고 그 자리에선 전혀 다른 주제와 분위기의 대화가 이어진다.
 
그리고 넘어간 장면은 이로부터 몇 년 쯤 전인 어느 택시 안인 것이다. 그곳에서 은영은 유학을 위해 파리로 출국을 앞둔 학생으로, 택시기사와 의미심장한 대화들을 나누게 된다. 영화는 이내 또 다른 장소, 다른 시간으로 건너간다. 그렇게 거듭 자리를 옮겨가며 차츰 인물들의 성격과 그들이 처한 상황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명확한 어느 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건 아니다. 처음엔 여성들끼리, 다음엔 남성들끼리, 그러다 조금씩 어느 여성과 남성의 대화로 그 농도며 긴장을 짙게 할 뿐, 온전히 기승전결의 서사를 따른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다.
 
 <컨버세이션> 스틸컷

<컨버세이션> 스틸컷 ⓒ 필름다빈

 
보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무엇
 
그렇다면 이 영화가 의도한 건 무엇인가. 때로는 진실로, 또 때로는 가식적으로 상대를 대하는 수많은 순간들과, 그로부터 빚어지는 대화의 맛을 전면에 드러내는 것은 아니었을까. 겉으론 편안하게 보이던 대화에도 수면 아래선 치열한 발버둥이 있는 것이며, 또 누군가는 마음을 상하고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순간들이 비쳐지기도 한다.
 
정작 가까운 이에게는 짜증스런 반응을 보이면서 먼 이에게 웃으며 예의를 차리는 순간은 우리 곁에 얼마나 많은가. 또 속내를 감추면서 겉으론 하하호호 웃고 떠드는 순간들도 심심찮게 마주하는 것이다. <컨버세이션>은 대화의 표면과 그 이면을 수시로 오가면서 각 인물들의 진실과 진심이 어떠한지를 은근히 들춰보고, 다시 그 대화의 맛과 멋을 즐기도록 하는 재미가 있는 영화라고 하겠다.
 
2시간에 이르는 이 영화에 대하여 별 대단치 않은 내용으로 가득 채워놓았다고 불평하는 이도 있을 수는 있겠다. 그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우리네 인생은 별일이 없는 데도 별일이 있고, 또 그 안에서 희구하고 좌절하며 슬퍼하고 기뻐하는 순간들을 갖기도 하는 것이다. 그 곁엔 대부분 사람이 있고, 우리를 힘들게도 일어서게도 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람임을 이 영화가 은근히 일깨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본다.
 
말하자면 <컨버세이션>의 제일가는 미덕은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는 보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대화의 다채로운 순간들을 스크린 위 남의 대화를 통해서 인식하고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 있겠다. 나와 남의 대화는 한 우주와 다른 우주의 만남이자 교감으로, 그저 대화의 내용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다채로운 순간이라 보아야 한다. 그 대화를 낯설게 보는 것, 이 영화가 아니면 따로 만나기 어려운 일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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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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