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마르소의 머리 위로 헤드폰이 내려앉은 순간, 사랑은 시작됐습니다. 소녀의 눈앞에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지요. 아등바등 사느라 자주 놓치게 되는 당신의 낭만을 위하여, 잠시 헤드폰을 써보면 어떨까요. 어쩌면 현실보단 노래 속의 꿈들이 진실일지도 모르니까요. Dreams are my reality.[기자말]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를 부른 하이키.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를 부른 하이키. ⓒ GLG


스테이씨(STAYC)를 뒤잇는 중소기획사의 기적. 4인조 걸그룹 하이키(H1-KEY)를 두고 나오는 말 중 하나다.
 
지난 1월 5일에 발표한 하이키의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Rose Blossom)'가 역주행을 하고 있다. 발표한 지 얼마 안 된 곡이기에 엄밀히 말하면 역주행은 아니고 '느린 정주행' 정도가 되겠지만 아무튼, 인기가 뜨겁다. 지난 10일 벅스 실시간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고, 멜론에서도 현재 상위권에 안착해 있다.
 
이들의 인기가 '역주행'이란 타이틀과 함께 주목받는 이 현상은 중소기획사 아이돌이 주목받기는 사실상 어렵다는 걸 인정하는 방증인 셈이다. 하이키는 2022년 1월 5일에 데뷔했다. 2022년 그 해에 뉴진스, 르세라핌, 엔믹스, 케플러, 그리고 그해는 아니지만 2021년 12월에 아이브가 데뷔했으니, 한마디로 대형기획사 걸그룹이 대거 등장한 해에 하이키가 데뷔한 것이다.
 
안타깝지만 (당연히) 하이키는 그들의 그늘에 가려졌다. 하이키의 소속사는 그랜드라인그룹이라는 신생 회사다. K팝 무대에서 소형기획사 아이돌의 입지는 전보다 더 좁아지고 있다는 게 모두가 인지하는 사실이다. 하이키의 데뷔 앨범인 싱글 1집 〈 ATHLETIC GIRL >의 초동판매량은 겨우 264장이었다. 이들은 데뷔 1년 만인 2023년 1월에 컴백했지만 뉴진스의 컴백과 겹치며 이번에도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참 재밌게도, 하이키의 이러한 열세한 상황이 오히려 역주행의 동력이 된 듯하다.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의 가사를 보면 무슨 말인지 아시리라.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 제발 살아남아 줬으면/ 꺾이지 마 잘 자라줘/ 온몸을 덮고 있는 가시/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견뎌 내줘서 고마워"
 
이렇게 시작하는 이 곡은 열악한 상황에서 끝까지 버티는 일에 관해 이야기한다. 회사에서, 학교에서, 무대에서, 각자가 처한 곳에서 우리는 사실상 버티고 있는 게 아닐까. 이 노래는 하루하루 버텨내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그래서 울컥하게 만들었다. 특히나 데뷔 전 견뎌야 했던 긴 연습생 생활, 데뷔한 이후에도 감내하고 극복해야했던 소형기획사라는 약점을 품은 하이키의 상황과 가사의 내용이 겹치면서 노래에 진정성이 더해졌다.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를 부른 하이키.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를 부른 하이키. ⓒ GLG


하이키 네 멤버 서이, 리이나, 휘서, 옐은 데뷔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멤버들 모두 현재 소속사가 첫 회사가 아니다.

서이는 YG에서 데뷔를 준비했고, 연습생 기간이 6년인 리이나는 WM엔터테인먼트 소속이었지만 회사 사정으로 데뷔하지 못했다. <프로듀스48>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당시 주목받지도 못했다. 휘서는 무려 9년 반 동안 연습생 생활을 했다. 그는 더블랙레이블, 쏘스뮤직, FNC, YG 등 대형기획사에서 연습생 생활을 했지만 데뷔가 무산되는 등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 막내 옐은 현대무용을 전공했고 JYP 공채 오디션 15기에서 최종 1위를 한 실력자지만, 역시 JYP에서 데뷔하지 못했다.
 
어렵게 세상에 나왔지만 데뷔 후에도 시련은 있었다. 멤버 시탈라가 개인 사정으로 탈퇴하면서 3인조로 재편되었다가 휘서가 합류하면서 다시 4인조로 조정하는 시기를 겪은 것. 그야말로 악착같이 버텨 데뷔와 지금의 역주행을 이뤄냈다고 볼 수 있겠다.
 
"내가 원해서 여기서 나왔냐고/ 원망해 봐도 안 달라져 하나도/ 지나고 돌아보면/ 앞만 보던 내가 보여/ 그때그때 잘 견뎌냈다고/ 생각 안 해 그냥 날 믿었다고"
 
'내가 원해서 여기서 나왔냐고'라는 구절이 인상적이다. 모든 장미가 정원이라는 화려한 무대에서 피어나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심지어 사람들이 짓밟고 지나가버리는 건물 사이의 작은 틈에서 피어나는 장미가 더 많다. 꼭 인간의 삶과 비슷하다. 대형 기획사에서 데뷔해서 나오자마자 대중의 큰 사랑을 받고 싶고,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하지 않게 살고 싶고, 이런 바람들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원한다고' 거기서 피어날 수는 없기에 더욱 가사가 공감되고 짠하다. '그때그때' 잘 견뎌냈다는 표현도 우리네 이야기 같아서 마음을 울린다.
 
왜 하필이면 난 건물 사이에서 피어났을까 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대신 이 곡의 화자는 이렇게 외친다. "나는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 삭막한 이 도시가/ 아름답게 물들 때까지/ 고갤 들고 버틸게 끝까지/ 모두가 내 향길 맡고 취해/ 웃을 때까지"라고. 굳건하고 긍정적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한다.
 
"쓰러지지 않아 난/ 어렵게 나왔잖아/ 악착같이 살잖아"
 
건물 사이에서 피어나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렵게 나왔잖아' 뒤에 이어지는 '악착같이 살잖아'라는 구절이 그래서 더 와 닿는다. 이렇게 가사의 힘으로, 노래의 힘으로 역주행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인기는 특별하다. EXID의 '위아래'가 하니의 직캠으로, 브레이걸스의 '롤린'이 위문공연댓글 영상이 주목 받으며 역주행한 걸 떠올려보면, 하이키는 그런 경우와 조금 다르다. 물론 조력자는 있었다. 하이키와 접점이 없는 러블리즈 미주가 노래가 너무 좋다며 공개적으로 여러 번 추천했고, 이 힘을 크게 받은 것.

숨은 명곡이라고 입소문을 탄 이 곡을 들은 음악팬들은 "가사가 너무 눈물 나요", "'고갤 들고 버틸게 끝까지' 이 한 마디가 되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진짜 긍정적인 힘이 되어주는 노래다" 등의 댓글로 호응을 보내고 있다. "더 떴으면 좋겠다"라는 응원글도 많았다. 이처럼 음악팬들은 힘들고 삭막한 세상 속에서도 악착같이 아름답게 피어나려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이 노래에서 많은 위로를 받은 듯하다. 감동적인 가사와 하이키의 실제 서사가 맞물렸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를 부른 하이키.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를 부른 하이키. ⓒ GLG

하이키 건물사이에피어난장미 리이나 서이 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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