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사극 <청춘월담>의 세자 이환(박형식 분)은 기득권층과 거리를 두고 있다. 특권층을 대표하는 일부 대신들로부터 심한 견제도 받고 있다.
 
그런 모습이 13일 방영된 제11회에서 인상적으로 묘사됐다. 그는 대궐 밖으로 잠행 나갔다가 형조판서 조원오(조재룡 분)가 대로에서 가난한 아이를 심하게 다루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 상황에 대한 대응을 통해 그는 자신이 누구 편인지를 잘 보여줬다.
 
그 아이는 주막에서 도둑질을 하고 큰길로 달아나던 중에 형조판서 조원오의 행렬과 부딪혔다. 이 때문에 조원오의 고급 도자기가 깨지게 됐다. 화가 치밀어오른 조원오는 군중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아이에게 심한 분풀이를 해댔다.
 
사람들 틈에 끼여 이 장면을 지켜보던 세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앞으로 불쑥 나간다. 세자는 조원오 옆에 바짝 다가가 '조정 대신의 신분으로 사치품을 구입한 일을 문제 삼지 않겠으니 아이를 돌려보내라'고 은근히 압박한다. 결국 조원오는 아이를 두고 물러서게 된다.
 
 tvN <청춘월담> 한 장면.

tvN <청춘월담> 한 장면. ⓒ tvN

 
정의로운 군주에 대한 대중의 갈망

<청춘월담>을 비롯한 많은 사극들이 이와 유사한 장면을 종종 보여주는 것은 정의로운 군주나 후계자에 대한 대중의 오랜 갈망을 반영한다. 현실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국가를 잘못 이끌고 있건 간에 일반 대중은 좋은 세상과 좋은 지도자를 항상 갈망하고 있기에 드라마 제작진이 이런 장면을 만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을 안타깝게 하는 것은 <청춘월담>의 세자처럼 정의로운 본성을 드러낸 후계자들이 군주 생활을 안정적으로 해나간 사례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개혁 성향을 일찍부터 노출한 세자들의 운명은 비교적 불운한 편이었다.
 
아버지인 영조가 즉위한 지 11주년인 1735년에 태어난 사도세자는 만 1세 때 세자에 책봉됐다. 그가 기득권세력인 노론당(서인당 분파)과 왕실 외척들을 비판한 것은 9세 무렵인 1744년경부터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따르면, 이 세자는 두 살 때 글자를 배워 60개 정도의 글자를 썼다고 한다. 그런 영재 기질이 정치 분야에도 투영돼 그 어린 나이에 보수세력을 비판했던 것이다. 그는 27세 때인 1762년 뒤주에 갇혀 눈을 감게 됐다.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도 증조부인 사도세자를 닮은 데가 있었다. 효명세자는 세도가문인 안동 김씨에 맞서는 방법으로 개혁성을 표출했다.
 
효명세자가 출생한 1809년은 안동 김씨가 왕실 비슷한 권세를 행사하던 때였다. 그는 이 가문의 독점체제에 도전했다. 세자 신분으로 아버지를 대신해 대리청정할 당시 그가 역점을 둔 것 중 하나도 안동 김씨들을 요직에서 내보내는 것이었다.
 
18세 나이로 대리청정을 개시한 그는 사흘 뒤인 음력으로 순조 27년 2월 21일(양력 1827년 3월 18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특단의 조치를 내놓았다. 이날 그는 대리청정을 개시한 기념으로 종묘 등을 둘러볼 때 의례상의 착오를 범했다는 이유로 이조판서 김이교에게 감봉 조치를 내렸다.
 
1764년 생인 김이교는 이때 63세였다. 안동 김씨의 핵심부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정치적 거물을 상대로 의례상의 실수를 이유로 징계를 가했다. 왕실을 억눌러온 세도가문에 대한 경고의 신호였던 것이다. 3년 뒤인 1830년, 효명세자는 21세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고려가 멸망하기 10년 전인 1382년에 출생한 이방석의 운명도 사도세자나 효명세자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1392년 조선 건국 직후에 이복형들을 제치고 세자가 된 이방석은 개혁가이자 정권 실세인 정도전을 후견인으로 뒀다. 그래서 본인보다 후견인 때문에 개혁 이미지와 오버랩되는 인물이 됐다.
 
그런 그가 어떤 운명에 처했는지는 이복형 이방원이 1398년에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이 잘 보여준다. 개혁성을 표출한 후계자들이 얼마나 험난한 길을 걷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에 포함된다.
 
사도세자의 아버지인 영조는 단독 집권당의 출현을 막는 탕평정치를 통해 기득권 세력을 어느 정도 억눌렀다. 하지만, 아버지 숙종 곁에서 왕자 생활을 할 때나 이복형인 경종 곁에서 왕세제 생활을 할 때는 그런 개혁 성향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왕이 되기 전에 그는 보수세력인 서인당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서인당이 경종 임금을 견제하고자 내세운 대항마였다. 장희빈(희빈 장씨)의 아들인 경종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남인당의 지지를 받았다. 그래서 서인당이 영조를 앞세워 경종을 견제했던 것이다. 영조가 아들 세자처럼 일찍이 개혁 성향을 표출했다면, 서민 출신 후궁의 아들인 그가 보수세력의 지지를 받기가 수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방석·사도세자·효명세자의 사례와 영조의 사례만 놓고 비교하면, 군주가 되기 전에는 개혁적 본성을 숨기는 편이 유리했겠구나 하는 판단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개혁성을 감추게 되면 개혁세력보다 보수세력이 주변에 더 많이 몰리기 때문에 군주가 된 뒤에 소신을 밀고 나가기가 힘들었다.

비교적 개혁을 잘 수행한 정조
 
  tvN <청춘월담> 한 장면.

tvN <청춘월담> 한 장면. ⓒ tvN

 
본심을 감추고 즉위하는 것은 군주 자리를 지키는 데는 유리할 수 있어도 세상을 바꾸는 데는 하나도 유리할 게 없었다. 영조 같은 사례는 비교적 드문 경우에 속한다. 그런 면에서 영조는 '연구 대상'이다.
 
'연구 대상'이 될 만한 인물이 또 있다. 영조의 손자인 정조도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즉위 전부터 개혁 이미지와 오버랩돼 있었다. 그래서 24세 나이로 즉위하기 전인 세손 시절부터 항상 신변의 위협을 안고 살았다. 세손 시절에 그는 자신을 암살하려는 보수세력을 의식하며 하루하루를 조심스럽게 지냈다.
 
정조 즉위년 6월 23일자(1776년 8월 6일자)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는 피살 위험 때문에 몇 달 동안 관복을 입은 채 잠자리에 든 적도 있다. 20대 초반의 청년이 항상 불안감 속에서 긴박하게 살아갔던 것이다.
 
그에 대한 암살 시도는 왕이 된 뒤에도 있었다. 즉위한 이듬해인 1777년에는 광화문광장 서쪽인 경희궁 존현각에서 암살미수 사건이 있었다. 이때 실패하고 달아난 킬러 전흥문은 13일 뒤 또다시 암살을 시도했다. 전흥문은 경복궁 동쪽인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정조를 죽이려고 침투하다가 이번에는 궁궐 담장에서 붙들렸다. <청춘월담>은 지금 잘 방영되고 있지만, 1777년의 자객월담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정조는 이 같은 공세적인 암살 위협 속에서도 개혁을 비교적 잘 수행했다. 할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탕평책을 계속 시행해 보수세력의 단독 집권을 막아냈다. 또 특권 상인들의 기득권인 금난전권을 크게 축소시키고 국가가 영세 상인을 보호해주는 신해통공도 관철시켰다.
 
조선왕조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어도 기득권 세력의 집중 견제 속에서 커다란 성과를 낸 것은 경이적인 일이었다. 기득권층의 파상적인 압박이 오히려 정조를 강인하게 만들고 그 의지를 더 단단히 해준 측면도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세자나 세손 같은 후계자가 일찍부터 개혁성을 드러내는 것은 스스로를 위험하게 하는 일이 될 수 있었지만, 정조의 사례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는 판단에 도달하게 된다. <청춘월담>의 세자가 특권층 대신들과 용감히 부딪히는 모습을 젊은 세자의 객기로만 볼 필요가 없는 이유다.
청춘월담 사도세자 효명세자 이방석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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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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