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후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B조 본선 1라운드 한국과 일본의 경기. 한국팀이 13-4 완패를 당한 뒤 인사하고 있다.

10일 오후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B조 본선 1라운드 한국과 일본의 경기. 한국팀이 13-4 완패를 당한 뒤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 프로야구의 선수들과 지도자들이 이번 대회를 계기로 많은 것을 느꼈으면 좋겠다. 이번 대회 우리 대표팀이 보여준 모습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 이제 한국 프로야구의 자존심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타선도 타선이지만 투수진이 확실히 무너졌다. 야구는 투수놀음인데 첫 번째가 무너져 내리니깐 게임이 안 되는 거다. 실력차이를 보여줬다." (이순철 SBS 해설위원, 완패 이후 경기를 총평하며)
 
"마운드에서 투수들은 원하는 공을 던지면서 재밌어야 한다. 그런데 카운트가 불리해져서 억지로 스트라이크를 집어넣어야 하는 상황은 재미가 없다. 대표팀 투수들이 긍정적이고 편안한 루틴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승패에 너무 집착해 자신이 갖고 있는 좋은 직구를 제대로 못 던졌다." (박찬호 KBS 해설위원, 경기 내내 계속된 한국 투수들의 심각한 제구력 난조를 지적하며)
 
한일전을 지켜본 선배 레전드들의 신랄한 평가가 한국 야구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요약한다. 한국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 '이강철호'는 3월 10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WBC 조별리그 B조 2차전 일본과의 맞대결에서 4-13으로 완패했다. 9일 1차전에서 호주에 7-8로 패했던 한국은 2연패를 당하며 사실상 3년 연속 1라운드 탈락이 가까워졌다.
 
이번 WBC는 한국야구의 '민낯'을 어느 때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회라는 평가다. 한국은 2000년대 초중반 2008 베이징올림픽 우승, 2009 WBC 준우승 등으로 짧은 황금기를 구가했으나 2010년대 이후로는 국제경쟁력이 꾸준히 하향곡선을 그렸다. 2013-2017 WBC 1라운드 탈락, 2020 도쿄올림픽 노메달 등으로 부진을 면치못했다.
 
한국야구는 이번 WBC에서 명예회복을 다짐하며 4강진출을 목표로 내세웠다. 프로야구 KT위즈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끈 이강철 감독을 사령탑으로 선임했고, 메이저리거인 김하성과 토미 현수 에드먼, KBO리그 MVP 이정후와 베테랑 김광현-김현수-양의지-양현종 등을 총망라한 선수단을 꾸렸다. 메이저리거 최지만의 합류불발과 학폭 논란에 휘말린 안우진의 엔트리 제외 등의 잡음도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대표팀이 동원할 수 있는 최정예 전력을 모두 끌어모았다.
 
하지만 이강철호는 대회 플랜상 반드시 잡아야 할 대상이자 전력상 한 수 아래라 여겨지던 호주에게 예상밖의 덜미를 잡히며 시작부터 먹구름이 드리웠다. 이어 일본전에서는 '라이벌'이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콜드게임 위기까지 몰릴 정도로 두들겨 맞은 끝에 완패했다.
 
한국은 김인식 감독이 이끌던 2009년 WBC 1라운드에서 일본에 콜드게임패를 당한 적도 있다. 하지만 당시는 초반에 점수차가 벌어지자 다음 경기를 대비하여 전략적으로 경기를 내준 것이었고, 실제로 재대결에서 승리하며 설욕한 바 있다. 이날은 내일이 없이 반드시 이겨야 할 경기에서 총력전을 퍼붓고도 완패했다는 점에서 무게가 다르다.
 
10명의 투수 총동원하고도... 참담한 결과
 
 10일 오후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B조 본선 1라운드 한국과 일본의 경기가 한국의 4대13 패배로 끝났다. 경기를 마친 한국 투수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떠나고 있다.

10일 오후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B조 본선 1라운드 한국과 일본의 경기가 한국의 4대13 패배로 끝났다. 경기를 마친 한국 투수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떠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야구가 이전에도 '타이중 참사', '고척돔 참사' '도쿄 참사' 등 수많은 흑역사가 있었지만, 이번 한일전 참패는 그야말로 한국대표팀 역대 최악의 경기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치욕적인 패배라는 게 대다수의 반응이다.
 
대회 실패의 책임을 두고 선수단 구성, 감독의 경기운영, 투수교체, 정신력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거론할 수 있겠지만, 이 모든 것을 다 아우르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역시 명백한 '실력차'였다.
 
현재까지 한국은 2경기 17이닝 동안 21실점을 허용하며 팀 평균자책점이 11.12로 1라운드를 진행 중인 A, B조 10개 나라 중 압도적인 꼴찌다. 1차전에서 호주 타선에 홈런 3방을 헌납하며 역전패를 허용한 한국 마운드는 일본전에서는 무려 10명의 투수를 총동원하고도 장단 13안타와 사사구만 9개를 헌납하며 맥없이 무너졌다.
 
타선은 2경기 연속 홈런을 때린 양의지와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리는 이정후 정도만이 분전했지만, 응집력이 떨어졌다. 한국은 호주전에서는 경기 시작 후 5회까지 첫 13타자가 출루에 실패하며 고전했다.

일본전에선 3회 3점을 몰아치며 기선을 제압했으나 마운드가 무너지며 역전을 허용한 이후에는, 박건우의 솔로홈런을 끝으로 마지막 11타자가 연속 범타와 삼진으로 허무하게 물러나며 반격의 기회조차 만들지 못했다. 베테랑 김현수-박병호-최정 등이 줄줄이 침묵했고 톱타자로 배치된 토미 에드먼도 공격은 물론 믿었던 수비에서조차 흔들리며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비단 이번 대회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 선수들의 국제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다는 게 냉정한 현실이다. 특히 투수들의 기량은 참담한 수준이었다. 과거에는 박찬호, 김광현, 류현진, 윤석민, 오승환 등 국제전에서 통하는 투수들이 즐비했고, '일본킬러'로 꼽힌 구대성이나 봉중근처럼 강팀을 상대로 믿고 표적 등판이 가능한 히든 카드, 김병현-정대현같이 상대가 낯설게 느낄 만한 다양하고 독특한 유형의 투수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한국대표팀 투수진은 아예 기본적으로 컨디션이 좋은 선수 자체가 전무했다. 나름 국내 최고의 투수들만 모았다는 대표팀인데 국제전에서 스트라이크 하나도 제대로 꽃아넣지 못해 '볼질'을 남발하는 한심한 제구력은 충격 그 자체였다. 마운드의 중심을 잡아줘야 할 베테랑 양현종-김광현 역시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고, 그 뒤로는 대안이 전무했다.
 
반면 일본은 선발 다르빗슈가 부진했음에도 그뒤를 받쳐줄 투수력이 풍부했다. 대부분의 일본 투수들은 150㎞대의 강속구를 기본에, 제구력까지 장착하고 있었다.
 
경기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굳은 표정의 이강철 감독 10일 오후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B조 본선 1라운드 한국과 일본의 경기. 이강철 감독이 13-4로 패배한 뒤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 굳은 표정의 이강철 감독 10일 오후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B조 본선 1라운드 한국과 일본의 경기. 이강철 감독이 13-4로 패배한 뒤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 연합뉴스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의 집중력이나 벤치의 경기운영 역시 좋은 평가를 받기는 힘들다. 물론 기본적으로 실력차가 워낙 현저한 상황에서 정신력만 운운하는 것도 문제가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호주전도 일본전도 한국이 경기를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는 것이다. 호주전에서 강백호의 '세리머니사', 박해민의 주루판단 미스는 경기 흐름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일본전에서도 내야진의 연이은 실책성 플레이와 투수진의 볼 퍼레이드는, 기량을 떠나 '멘탈싸움'부터 이미 밀렸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강철 감독의 경기 운영 역시 최악이었다. 한국은 WBC에서 전력상 언더독이고 단기전에서는 컨디션 좋은 선수들 위주로 변칙적인 경기운영도 필요했다. 하지만 이강철 감독은 에드먼-김하성-박병호-최정 등 선수들의 이름값에만 의존하는 뻔한 경기운영을 펼친 게 패착이었다. KBO리그에서 통하던 작전야구와 스몰볼은, 장타력 한 방에 흐름이 뒤바뀌는 국제전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투수 운용과 교체 타이밍도 2경기 연속 악수의 연속이었다. 반드시 이겨야 했던 호주전에서는 KBO리그에서도 불펜 등판시 성적이 좋지 않은 양현종을 추격 흐름에 구원등판시켰다가 3점 홈런을 맞으며 승부가 기울어졌다. 오타니를 포함해 좌타자가 많았던 일본을 상대로 구창모, 이의리 등 좌완 투수들을 너무 늦게 투입했고 승부처에 중용한 김원중은 2경기 연속 난타를 당했다.
 
국제경쟁력의 하락은 곧 KBO리그의 수준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과 '거품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른바 베이징올림픽 황금세대(1980년대 초중반생) 이후 세대교체에 실패하고 매너리즘에 빠진 한국야구의 현 주소가 이번 WBC를 통하여 드러난 것이다.
 
이번 실패는 결코 WBC에 참가한 대표팀 일부 선수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KBO리그에서 높은 몸값과 인기를 누리는데 안주하며 더 큰 도전정신과 성장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린 프로야구계, 아마부터 프로까지 눈앞의 성적에만 집착하고 선수관리와 육성에 실패한 지도자들, 왜곡된 시장질서 속에서 변화와 개혁을 외면해온 KBO와 행정가들까지, 모두가 합작하여 초래한 비극이다.
 
한국야구는 이제부터라도 베이징 시대의 환상에서 깨어나 새롭게 다시 출발해야 한다. 이대로라면 한국야구는 팬심도 국제경쟁력도 모두 잃고 내수용 종목에 그치는 그들만의 리드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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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C 한일전 국제경쟁력 야구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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