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40대 중반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범죄도시>를 통해 장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강윤성 감독은 유머와 액션이 적절히 뒤섞인 데뷔작을 통해 전국 687만 관객을 동원하며 큰 성공을 거뒀다. 물론 <범죄도시>의 흥행은 한창 물이 오른 주연배우 마동석과 악랄한 악역으로 변신에 성공한 윤계상의 매력적인 연기가 큰 몫을 차지했지만 <범죄도시>의 각본을 쓰며 마석도 형사와 장첸 캐릭터를 만든 이도 다름 아닌 강윤성 감독이었다.

다른 감들들에 비해 데뷔가 늦었던 강윤성 감독은 2019년 곧바로 두 번째 영화를 만들어 관객들에게 공개했다. 폭력조직의 두목이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한다는 내용을 담은 김래원 주연의 액션 드라마 <롱 리브 더 킹: 목포영웅>이었다. 하지만 <범죄도시>를 통해 흥행감독으로 떠올랐던 강윤성 감독은 <롱 리브 더 킹>으로 100만 관객을 간신히 돌파하는 데 그치며 <범죄도시>의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이처럼 데뷔작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가 두 번째 영화에서 주춤하는 감독이 있는가 하면 봉준호 감독처럼 두 번째 영화(<살인의 추억>)를 통해 데뷔작(<플란다스의 개>)의 아쉬움을 털어 버리는 감독도 있다. 시나리오 작가로 이름을 알린 후 <마녀1, 2> <낙원의 밤> 등을 연출한 박훈정 감독도 후자에 해당하는 감독이다. 그리고 관객들이 기억하는 박훈정 감독의 대표작은 단연 지난 2013년에 개봉했던 한국형 누아르의 걸작 <신세계>다.
 
 신세계는 잔인한 장면이 적지 않게 나오는 청불영화임에도 500만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신세계는 잔인한 장면이 적지 않게 나오는 청불영화임에도 500만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 (주)NEW

 
한마디, 한마디가 명대사가 된 배우

지금은 주로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많이 하는 박성웅은 1997년 영화 <넘버3>의 단역으로 데뷔해 10년 가까이 조·단역을 전전하며 비교적 오랜 시간 동안 무명시절을 견뎠다. 박성웅이 무명시절에 출연했던 작품 중에는 '안 본 남자는 있어도 한 번만 본 남자는 없다'는 남성관객 한정 불후의 명작(?) <해바라기>의 찌질한 경찰 역할도 있었다. 그리고 힘든 시기에도 배우의 길을 포기하지 않은 박성웅에게 2007년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박성웅은 2007년 고 김종학 연출, 송지나 극본의 대작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 말갈 시우부족 용병부대의 대장 주무치 역을 맡아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선보이며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태왕사신기> 이후 인지도가 부쩍 오른 박성웅은 <에덴의 동쪽>과 <제빵왕 김탁구> <각시탈> 등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고 2013년 드디어 그의 인생작이라 할 수 있는 <신세계>를 만났다.

박성웅이 기업형 폭력조직 골드문의 상무이사 이중구를 연기한 <신세계>는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등급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전국 468만 관객을 동원하며 크게 성공했다. 특히 박성웅은 최민식과 황정민, 이정재로 이어지는 대배우들 사이에서 전혀 주눅들지 않고 이중구의 카리스마를 뽐내며 <신세계>의 또 다른 주역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실제로 이중구가 영화 속에서 했던 대사들 중 상당수는 온라인에서 크게 유행했다.

<신세계> 이후 영화계에서 주가가 크게 오른 박성웅은 2013년과 2014년에 걸쳐 무려 8편의 영화에 출연했고(우정출연 및 특별출연 포함) 그중에는 <찌라시: 위험한 소문>과 <황제를 위하여> 같은 주연작도 포함돼 있다. 드라마 중에서는 날라리 변호사 박동호 역을 맡아 시청자들에게 사이다 같은 시원함을 선사했던 2015년작 <리멤버-아들의 전쟁>이 박성웅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박성웅은 2017년 400만 관객을 동원했던 <꾼>과 고구려를 침략한 당나라 황제를 연기한 <안시성>에 출연했고 2019년에는 판타지 코미디 <내 안의 그 놈>을 통해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다. 박성웅은 <신세계> 이후 이를 뛰어넘을 새로운 대표작을 만나지 못했다는 비판 속에서도 꾸준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고 오는 22일에는 개그맨 출신 박성광 감독이 연출한 신작 <웅남이>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수많은 명장면·명대사가 들어있는 영화
 
 황정민(왼쪽)과 이정재는 <신세계>에서 불꽃 튀는 연기대결로 관객들을 긴장시켰다.

황정민(왼쪽)과 이정재는 <신세계>에서 불꽃 튀는 연기대결로 관객들을 긴장시켰다. ⓒ (주)NEW

 
<신세계>는 '폭력조직에 잠입한 경찰이야기'라는 점에서 홍콩 누아르의 부활을 알린 영화 <무간도>와 유사점이 적지 않다. 실제로 <신세계>는 개봉 초기 일부 관객들로부터 <무간도>를 표절했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신세계>는 미국 영화평론 사이트 '로튼 로마토' 관객점수 86%, 국내 N 포털사이트 관람객평점 9.50점을 받았을 정도로 <무간도>와의 유사성과 별개로 영화 자체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 박훈정 감독이 직접 쓴 각본도 훌륭했지만 <신세계>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한 영화에서 뭉치는 게 가능할까' 싶었던 최민식과 황정민, 이정재의 연기를 보는 것이다. 경찰청 수사기획과장 강형철을 연기한 최민식은 전면에 나서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역할보다는 한 발 뒤에서 황정민과 이정재, 박성웅 등 후배 배우들이 빛날 수 있도록 '지원사격'을 해줬다.

골드문 전무이사이자 조직 서열 3위 정청을 연기한 황정민은 <신세계>에서 공격수 역할을 맡아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펼쳤다. 초반 많은 애드리브가 담긴 개그장면으로 관객들을 즐겁게 한 황정민은 중반부 이후 소름 끼치는 카리스마 연기로 이자성(이정재 분)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후반에는 관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엘리베이터 액션 장면을 만들었다. 황정민은 <신세계>를 통해 <너는 내 운명> 이후 8년 만에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모든 배우들이 열연을 펼쳤지만 <신세계>의 최대 수혜자는 단연 이자성 역의 이정재였다. 2012년 <도둑들>로 천만 배우가 됐음에도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평가는 좀처럼 듣지 못했던 이정재는 <신세계>에서의 열연을 통해 배우로서의 가치가 대폭 상승했다. 이정재는 <신세계> 이후 <관상>으로 900만, <암살>로 1270만, <인천상륙작전>으로 7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서도 '5연타석 홈런'을 날리는 데 성공했다.

<신세계>는 두 주인공 정청과 이자성이 골드문의 중역으로 성장하기 전, 여수의 한 횟집에 모여 있는 적대조직의 무리들을 쓰러뜨리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이 마지막 장면이 워낙 인상적이라 관객들은 정청과 이자성의 젊은 시절을 다룬 <신세계> 프리퀄 제작을 기다리기도 했다. 하지만 <신세계> 개봉 10주년이 된 2023년까지 소문만 무성할 뿐, 아직 <신세계> 속편제작에 관한 구체적인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남성영화에 등장하는 중요한 여성캐릭터
 
 송지효가 연기한 이신우는 남자들만 잔뜩 등장하는 <신세계>에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중요한 여성 캐릭터다.

송지효가 연기한 이신우는 남자들만 잔뜩 등장하는 <신세계>에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중요한 여성 캐릭터다. ⓒ (주)NEW

 
최민식과 황정민, 이정재, 박성웅 등 주요 배우들이 모두 남성이고 영화의 내용과 주제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신세계>는 여성보다는 남성들을 위한 영화에 가깝다. 하지만 <신세계>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여성캐릭터가 등장한다. 이자성의 바둑선생으로 위장했지만 실제로는 이자성을 비롯한 정보원들과 강형철을 이어주고 폭력조직에 잠입한 이자성을 감시하기도 하는 중간 관리책 이신우(송지효 분)가 그 주인공이다.

경찰학교에 있을 당시 강형철과 사제지간이었던 이신우는 중국해커들에 의해 정체가 발각되고 정청이 보낸 연변거지들에게 붙잡혀 심한 고문과 구타를 당한 채 드럼통에 담겨 이자성에게 공개된다. 이에 이자성은 그녀에게 총을 겨누면서 괴로운 표정을 짓다가 결국 그녀에게 총을 쏜다. 이 장면에서 어서 자신의 고통을 끝내달라는 의미로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는 송지효의 디테일한 연기가 상당히 돋보였다.

<범죄의 재구성>부터 <도둑들>까지 최동훈 감독이 연출한 영화에 4편 연속 출연했던 주진모 배우는 <신세계>에서 강형철과 함께 신세계 작전을 기획하는 부국장을 연기했다. 과장인 강형철보다 계급이 높지만 사적으로는 친구 사이라 강형철은 부국장에게 반말을 사용한다. 특히 영화에서 주진모 배우가 중저음의 목소리로 "신세계, 신세계 프로젝틉니다"라고 작전명을 말하는 대사는 이상이와 조병규가 예능프로그램에서 따라 하기도 했다.

당시 많은 영화에 얼굴을 비추던 이경영은 골드문의 석동출 회장 역으로 특별 출연했다. 사실 등장하자마자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작은 역할이지만 '신세계 작전'이 경찰에서 석동출 회장을 잇는 차기 회장 선거에 개입하는 작전이었기 때문에 영화 내내 수시로 언급된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과거에 딱 한 번 조직으로 잠입한 경찰이 돌아섰던 사례가 있었다는 강형철의 대사가 나오는데 많은 관객들은 그 인물이 바로 석동출일 거라 예상하기도 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신세계 박훈정 감독 박성웅 이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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