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이후로 조선 상권을 잠식한 일본은 동학혁명(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한 1894년에 자국민 보호와 동학군 진압을 구실로 군대를 불법 파견하면서 정치·군사적으로도 조선을 잠식하게 됐다. 1894년에 조선을 무대로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청나라를 꺾은 뒤 동학군까지 진압함으로써 경제적 잠식에 이어 정치·군사적 잠식까지 이루게 됐다.
 
한반도 유사시를 명분으로 조선을 수중에 넣은 일본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커져갔고, 이런 흐름 속에서 역사 무대에 두각을 보이게 된 인물이 있다. 고종 임금의 내시인 강석호가 바로 그다. 당시의 굴욕적인 대일관계 속에서 내시 신분을 갖고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인물이 그였다.

고종의 비밀병기
 
  tvN <청춘월담> 한 장면.

tvN <청춘월담> 한 장면. ⓒ tvN

 
구한말 역사를 다룬 황현의 <매천야록>은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이후의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내시 강석호가 달아났다. 왜인들이 수색했으나 잡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바로 이 강석호가 일제 침략이 날로 강화되던 구한말에 반일 임무를 수행한 고종의 비밀 병기였다.
 
그의 활약은 지금 방영 중인 tvN 사극 <청춘월담>의 가짜 내시 민재이(전소니 분)를 훨씬 능가했다. 실제로는 여성인 민재이는 세자 이환(박형식 분)의 신변을 보호하거나 정치적인 미스터리 사건을 푸는 일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에 비해, 강석호는 고종의 정치적 구상을 구현시키는 일은 물론이고 제국주의 물결을 타고 밀려드는 일본과 맞서 싸우는 일에도 가담했다. 세계 정치의 신조류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역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내시였던 것이다.
 
왕실과 귀족세력이 대립하던 왕조시대에 군주가 가장 믿을 만한 대상은 궁녀나 내시 같은 사람들이었다. 양반 귀족 출신이 상당수인 조정 관료들과 달리, 궁녀나 내시들은 서민층 출신인 데다 군주에게 예속돼 있어서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
 
그래서 양반 사대부들은 물론이고 구한말의 일본도 이들의 숫자를 감축하려고 애썼다. <매천야록>은 을사늑약 무렵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왜인들이 내시를 줄일 것을 요청했다"라고 말한다.
 
이때 내시 감축을 적극 지지한 인물 중 하나가 을사오적 이근택이었다. 내시들이 볼 때도 을사오적은 도저히 상종 못할 부류들이었던 것이다. 내시 김한종이 이근택에게 "당신들은 내시가 나라를 그르쳤다고 말하지만, 결국 나라를 팔아넘긴 것은 당신들이 아닙니까?"라고 항변했다고 <매천야록>은 말한다.
 
양반 사대부들은 임금을 직접 비판하기 곤란할 때는 임금의 최측근 내시들을 비판할 때가 많았다. '내시들이 나라를 어지럽한다'며 임금을 에둘러 견제할 때가 많았다. 고종 임금을 약화시켜 일본의 영향력을 부식시키고자 했던 친일파들도 그런 식으로 고종과 내시들을 비판했다. 이근택에 대한 내시 김한종의 비판은 친일파들의 그 같은 의도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일본과 친일파들이 볼 때 강석호는 나라를 크게 어지럽히는 내시였다. 고종의 왕권을 강화하고 일본을 견제하는 데 앞장섰으므로,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밖에 없었다.
 
1894년 이래로 고종은 일본의 간섭 하에 놓였다. 그는 경복궁에서 일본군의 감시를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벌인 비밀 작전이 1896년 2월 11일의 아관파천이다. 고종이 경복궁을 몰래 빠져나가 아라사로도 불리는 러시아의 공관으로 피신한 이 사건은 일본의 영향력을 일시적으로 떨어트리고 조선에서 러시아-일본 세력균형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와 동학군 진압으로 조선을 장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자국의 지배체제를 부식하는 단계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종의 신병을 확보하고 조선 왕명을 조종하는 방식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본의 허를 찌른 것이 아관파천이었다.
 
이 상황에서 강석호가 정국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경복궁을 빠져나와 덕수궁 서쪽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고종을 옆에서 보좌한 내시가 그였다. 일본의 허를 찌르는 일에 내시 강석호도 가담했던 것이다.
 
을사늑약 2개월 보름 뒤인 1906년 2월 1일부터 업무를 개시한 한국통감부의 문서들을 수록한 <통감부 문서>에도 그의 프로필이 정리돼 있다. <통감부 문서>는 "유명한 내관으로 황상이 이전에 노국(露國)공사관으로 파천할 때 배종했다"라며 "상당한 총애가 있었다"라고 그를 평가한다.
 
아관파천은 러시아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동시에 일본의 내정간섭을 와해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니,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이끄는 한국통감부가 강석호를 예의주시하게 됐던 것이다.
 
강석호는 좀더 대담한 방법으로도 반일 활동을 수행했다. 고종의 뜻에 따라 친일파들을 제거하는 작전에까지 참여했다. 2008년에 <사학 연구> 제89호에 수록된 장희흥 대구대 교수의 논문 '대한제국기 내시 강석호의 활동'은 "고종을 대신하여 강석호가 박영효 암살을 계획한 것"과 유길준 암살을 준비한 것 등을 소개한다.
 
박영효·유길준 암살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런 일을 맡았을 정도로 강석호는 반일운동의 비밀병기였다. 위 논문은 그가 '친일 요녀' 배정자를 암살하는 활동도 준비했다고 말한다.
 
"1905년 2월 일본 밀정으로 유명한 여(女) 군사밀정 배정자는 친러파를 밀고·숙청하고,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이등박문을 만나 중요 비밀문서를 받아 가지고 귀국하여 고종에게 바쳤다. 이때 이봉래·강석호 등은 배정자의 암살 계획을 준비하였으나, 일본군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관계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본명이 배분남인 배정자는 고종과 러시아를 갈라놓으라는 밀명을 받고 한국 황실에 접근했다. 고종의 후궁인 엄귀인의 친척을 통해 엄귀인과 고종을 연달아 소개받은 그는 고종의 환심을 사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의지를 실현시켜 나갔다. 그런 배정자를 암살하는 일을 강석호가 준비했지만 실패했던 것이다.
 
일본은 강석호를 주시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내시 강석호가 달아났다. 왜인들이 수색했으나 잡지 못했다"라는 <매천야록> 기록에서도 나타나듯이, 일본은 그에게 타격을 주고자 애썼다.

내시제도의 폐지
 
 대한제국 고종 황제

대한제국 고종 황제 ⓒ 위키미디어 공용

 
일본이 내시부 해체를 추진한 것도 강석호 같은 인물들을 쫓아내기 위해서였다. 결국 고종이 황제 직에서 밀려나고 4개월 뒤인 1907년 11월 27일 내시제도는 폐지된다. 위 논문은 1904년 러일전쟁 이후로 강석호가 처한 상황을 서술하면서 내시제도 해체를 언급한다.
 
"러일전쟁 이후 조선을 완전 장악하고 고종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면서 강석호 역시 자신이 추천한 인물이 해직되면서 면직되고, 의병 관련 일로 일본의 추적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 궁중 내 관료들의 대거 폐관 내지 퇴거, 출궁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일본의 고종에 대한 적극적인 압박책이 완료되는 시점이다. 또한 이 시기 내시부가 해체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후 자수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사라진다."
 
고종의 퇴위와 내시제도의 폐지를 계기로 강석호는 역사 무대에서 퇴장했다. 대한제국 멸망 직전이나 일제강점기 때 학회나 학교에 거액을 기부한 일들로 인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지만, 정치무대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나타나지 못했다고 해야 정확하다. <청춘월담>의 가짜 내시가 세자의 기분에 따라 동궁전에서 내쳐지기도 하고 다시 불려지기도 하는 것처럼, 내시들은 군주나 세자에게 거의 전적으로 종속돼 있었다.
 
강석호의 활동 역시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고종의 퇴위와 내시제의 폐지로 인해 강석호는 더는 역사무대에 나타나지 못하게 됐다. 경기도 용인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인생을 마쳤다고 한다. 고종의 최측근으로 굴욕적 한일관계에 맞섰지만 그런 한일관계를 타파하지 못한 그는 대한제국 멸망과 일제 지배를 감내하며 여생을 보내야 했다.
청춘월담 강제징용 최종안 한일관계 내시제도 국권침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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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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