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동토에서 막 도착한 차세대 거장의 견본
 
혹한의 겨울이 퇴장하고 경칩 절기를 갓 넘긴 때다. 1년 전부터 어느새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와 분리되어버린 것만 같은 북방의 동토 러시아, 그것도 하필 겨울을 배경으로 삼은 한편의 영화가 지금 막 도착했다. 단 2편의 장편만으로 칸영화제에서 각각 데뷔작품은 주목할 만한 시선 대상을, 차기작은 심사위원 대상을 거머쥔 핀란드의 떠오르는 거장, '유호 쿠호스마넨'의 두 번째 작업 < 6번 칸 >이다.
 
2016년에 선보인 감독의 장편데뷔작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은 실화를 각색해 어쩌면 핀란드 역사상 최초의 권투 세계 챔피언이 되었을 수 있었던 복서 '올리 마키'가 사랑과 성공 사이에서 순정을 택하는 이야기를 담아냈다. 흑백의 정갈한 화면을 배경으로 여타 상업영화의 전형성을 따르자면 실패에 가까운 결말인데도 훈훈한 감정을 전달했던 인상적인 작품으로 큰 성공을 거뒀던 감독은 차기작에서는 서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지만, 철도여행 중 우연히 같은 객실에 머물며 외로움이라는 원초적 감정을 서로 공유하기에 이른 남녀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다.
 
전작은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지만 이번 작업은 소설을 바탕으로 출발했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한명인 '로사 릭솜'의 원작을 읽었던 감독은 옴니버스 연작 성격의 이야기 중 한 에피소드를 택일하고 가다듬어 스토리의 일체감을 유지하면서도 통합된 배경으로 정돈해낸다. 그로 인해 아주 간단해 보이는 설정이지만 신기하게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이 절대 결말을 쉽게 재단하거나 인물들의 행동 패턴을 예측하기 힘든 매력적인 이야기가 탄생한다.
 
우리가 여행에서 어쩌면 마주칠지도 모를 이야기
 
"6번 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6번 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싸이더스

 
주인공 '라우라'는 핀란드에서 러시아 대학으로 유학을 와 있다. 그녀는 어느 날 모스크바에서 러시아는 물론 세계 전체에서 최북단에 위치한 도시인 무르만스크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북쪽으로의 여행은 원래 그녀가 하숙하는 중인 아파트 주인 '이리나'와 동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결국 단신으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무엇인가 깊은 사연을 간직했음직하다.
 
코로나19 역병의 창궐로 중단된 후, 재개가 되어야 할 시점에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통에 여전히 단절된 상태인 배낭여행자들의 로망,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풍경이 화면 가득히 펼쳐진다. 그 덕분에 배낭여행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실제로 가보진 못했어도 이것저것 찾아보느라 익숙해진 러시아의 철도 객차 내부를 간접적이나마 체험할 수 있다. 워낙 초장거리 노선인 터라 기차의 객실은 모두 침대칸이다. 라우라는 공간이 통째로 개방된 3등석 칸 대신에 중간급인 2등석 칸을 선택했다. 2층 침대가 2개 있는 4인실 '쿠페'다.
 
객실에는 또래의 러시아 청년 1명만이 동행으로 타 있었다. 그는 대낮부터 보드카를 들이키며 적당히 취한 상태에서 라우라에게 시시껄렁한 농을 던지다 결국 음담패설에까지 이른다. 일진이 사납다. 적당히 넘어가줄까 했지만 마침내 불쾌한 기분을 참지 못한 라우라는 객실을 바꾸려 시도해보지만 한국의 대중교통 종사자들 서비스와는 차원이 다른 러시아 철도 승무원들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이도 저도 안 되서 그냥 중간에 내려 모스크바로 돌아가 버릴까도 싶지만, 라우라는 근래 하숙집 주인장 이리나와 뭔가 문제가 생긴 듯하다. 결국 그녀는 도리 없이 다시 6번 칸으로 향한다.
 
짓궂은 장난과 희롱은 여전하지만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러시아 청년 '료하'는 첫 만남에서처럼 아주 막 되어먹거나 상종하기 힘든 수준으로 불편한 상대는 아니었다. 여전히 서먹서먹하긴 하지만 둘은 서로를 관찰하며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여행이란 그런 것이란 증명처럼 말이다. 지식청년 외국인인 라우라와 광산에서 일하는 육체노동자 료하는 대화 코드 맞추는 것부터 난항을 겪지만 서로 행선지도 같고 상대방에 대해 차츰 정보가 쌓이면서 그럭저럭 동행이 된다. 라우라는 무르만스크에 1만 년 전 고대인들이 새겨놓은 암각화를 보러간다는 걸 료하에게 알려준다. 료하는 열차가 정비를 위해 하루 정차하는 동안 '술과 할머니와 난로와 고양이가 있다!'며 라우라를 데리고 자신의 노모가 있는 고향집으로 향한다. 그 이후로 둘은 점점 더 가까워진다. 둘이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밀고 당기는 '티키타카'는 여전하지만 말이다.
 
어느새 료하는 라우라에게 평범하지 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둘이 친밀해질 찰나에 곤경에 처한 핀란드 남성 여행객을 라우라가 데려온다. 불청객이 생긴 셈인 료하는 질투 가득 섞인 반응을 보이며 그야말로 끙끙 앓는다. 하지만 그 핀란드 여행객은 만리타향에서 동포를 만난 김에 친절을 베푼 라우라에게 거하게 뒤통수치며 사라져 버린다. 그 결과로 상심한 라우라를 위로하는 과정에서 료하와의 관계는 (모든 건 계획대로) 진전되는 기미를 보인다. 하지만 어느새 여행의 끝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잘 짜인 설정과 군더더기 없는 인물의 합이 돋보이는 영화
 
"6번 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6번 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싸이더스

 
유호 쿠오스마넨의 영화는 (다른 북유럽 예술영화들과 유사하게) 마치 간이 심심하기로 유명한 핀란드 요리 마냥 더할 나위 없이 담백하고 사실적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마치 지금 당장 화면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서 튀어나올 것처럼 설정 상의 캐릭터를 온전하게 형상화한다. 흔히 스타라 불리는 외모가 빼어난 연기자들이 적당히 흉내를 내 연기하는 캐릭터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그렇다고 스르륵 현실 재연에만 그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야기 전개에 딱 알맞게 녹아드는 정도로 일정한 톤을 유지한다. 그 밸런스 패치가 무척 절묘하다.
 
두 주인공, 라우라와 료하 역을 맡은 주연배우들은 이 작품으로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와 시상식들에서 남부럽지 않은 수상실적을 쌓았다. 하지만 영화만 놓고 보면 이들의 연기는 실력을 과시하기보단 정말 재연배우 수준으로 작품에 스며드는 스타일을 취한다. 가랑비에 옷 젖듯 영화를 보던 이들은 그들의 캐릭터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라우라 역할의 '세이다 하를라'는 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 이제야 불쑥 튀어나왔는지 궁금해질 만큼 영화 내내 한순간도 스크린을 떠나지 않고 종횡무진 화면을 장악하는 중이다. 정말 모스크바에서 (아마도 문학계열인 것으로 보이는) 학문의 길을 걸으며 마음대로 잘 풀리지 않는 연애에 괴로워하던 라우라 그 자체다. 연기자가 캐릭터에 거의 빙의하는 수준이다.
 
한편, 첫인상은 최악에 가깝지만 점점 이미지 개선에 성공해나가는 마성의 남자, 료하 역을 맡은 '유리 보리소프'의 얼굴은 제법 낯이 익다. 근현대 러시아의 세계적 아이콘 중 하나인 미하일 칼라시니코프의 청년기와 그의 저 유명한 발명품, AK-47 돌격소총 탄생과정을 담은 전기영화 < AK47 >의 주연을 맡았었다. 그리고 아직 국내 개봉은 않았지만 근래 국내외 영화제들에서 가장 주목받던 작품 중 하나인 <볼코고노프 대위 탈출하다>에서도 주인공 롤을 맡아 세계적인 지명도를 얻은 배우다. 그야말로 현재 러시아 영화계의 얼굴 중 하나라 해도 과장이 아닌 연기자다. 이 영화에선 러시아인이지만 정작 러시아어로 고급 어휘를 구사하는 데에는 외국인인 라우라보다 서툰 료하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낸다. 지적이지만 정서적으로 방황중인 라우라와 상극을 이루다 점차 이해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긍정적 '러시아 남자'의 정석이라 할 료하 캐릭터에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는 캐스팅이다.
 
주연배우들을 포함해 전반적으로 < 6번 칸 > 영화 속에서 과장된 연기력 배틀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도 출연한 거의 모든 배우들이 전혀 빈틈이 없다보니 너나할 것 없이 어색하거나 연기 구멍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소련 붕괴 후에도 여전히 자본주의적 서비스 정신과는 거리가 꽤 있는, 하지만 무뚝뚝하고 투박해보여도 잔정은 만만찮은 '러시안'들이 영화 속에 가득하다. 특히 퉁명스럽지만 제 할일은 다 완수하는 열차 차장이나, 노인의 지혜와 유머를 겸비한 '바부시카(할머니)'의 소소한 활약은 특히 돋보이는 순간들이다.
 
인접국 핀란드인의 시선으로 관찰한 디테일 러시아의 한때
 
"6번 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6번 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싸이더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90년대 후반이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타이타닉>으로 전 세계 영화흥행 기록을 뒤바뀐 직후라는 상황이 구체적으로 명시된다. 어쩌면 무너진 구소련을 포함해 동구 사회주의 진영이 대립하던 서방세계와 통합이 가능했던 절호의 시기이기도 하다. '철의 장막'이 무너진 뒤 동서가 연결되고 왕래가 자유로웠지만 제국이 붕괴한 뒤의 해방감보다는 정체와 좌절이 더 컸던 당대 러시아 풍경이 과하지 않게 영화 전체에 녹아들어 있다. 전반적으로 우중충한 겨울인 데다 형편 좋지 않던 시절의 낙후한 러시아 사회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영화 도입부에서 이리나의 아파트에 지식인들이 모여 홈 파티를 연다. 서구의 모던한 록 음악을 배경으로 파티를 즐기다가도 그들은 문화예술대국 러시아 지성들답게 지적 허영을 섞어 여러 작가들을 인용한다. 그 목록들 중 포스트 소비에트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빅토르 펠레빈의 이름과 문장이 비중 있게 등장한다(그는 대표작 < P세대 >를 통해 소련 붕괴 후 급격한 자본주의 격랑에 휘말린 당대 러시아 세대를 세계에 알린 바 있다). 부유한 외국인에 대한 경계나 견제도 엿보인다. 대국 러시아의 자존심을 들먹이며 핀란드인 라우라에게 기죽지 않으려는 료하의 만남 초반 위악적인 허세도 인상적이다. 게다가 '유리 가가린'의 이름도 한몫을 담당한다. 그야말로 현대 러시아에 대한 문화적 이해가 따라준다면 한층 더 흥미롭게 즐길 수 있는 영화다.
 
흔들리는 기차와 털털거리는 자동차를 표현하기 위해 35mm 필름의 질감과 의도된 거친 떨림으로 구현되는 영화 속 세계의 풍광도 이채롭다. 음악도 공들여 활용되는 데다 익숙한 기차의 경적과 운행소음도 리드미컬하게 활용된다. 아이폰도, 노트북도, DSLR 카메라도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의 '노스텔지아'가 총체적으로 스크린 전체에 풍긴다.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비포 선라이즈>의 풍경처럼 이제 배낭여행의 전성기가 도래했지만 아직은 구글 맵이 없기에 일일이 수소문해가며 길을 찾아내야 하고, SNS가 부재하기에 유선전화나 공중전화, 메모지로 정보를 전할 수밖에 없었던 전간기의 자취를 확인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느새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진 카세트테이프 워크맨이나 구형 캠코더의 등장은 이야기 전개와 맞물려 놓치지 말아야할 요소들이다. 아날로그 시절에 소리와 이미지의 보관이 이뤄지던 방식에 대한 훌륭한 회고다. 
 
라우라는 정작 러시아인들도 연구자들 외엔 크게 관심이 없는 선사시대 암각화를 찾아가는 머나먼 동토의 땅 무르만스크 행 여정을 감수한다. 하지만 한겨울이라 눈보라 휘날리는 해안가로 갈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다. 그래서 현지 숙소와 택시기사들은 자신들은 별 관심도 없는 암각화 대신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적지 투어를 제안한다. 하지만 라우라의 원래 목적과는 동떨어져 있다. 1만 년 전 고대인의 지혜를 찾으려는 라우라의 비전과 20세기에 비로소 탄생해 (영화 속 배경으로는 불과 80년밖에 안 된) 계획도시인 무르만스크 관광은 전혀 어울릴 리 없다.
 
아주 특별한 여행 끝에 라우라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6번 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6번 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싸이더스

 
우리는 흔히 계획했던 목표가 무너지거나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지 못할 때 서로 양극단 격인 두 가지 형태를 취하곤 한다. 하나는 내부로 침잠하는 도피의 방식이다.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현실과 대면하길 부정하는 태도다. 다른 하나는 직면한 현실과 맞부딪히기보다는 어디론가 멀리 떠나 쟁점을 회피하고픈 입장이다. 이 또한 적극적인 도피에 가깝다. 막연히 기존의 잔뜩 문제가 산적한 시공간을 떠나면 굳이 문제를 풀지 않고도 새 출발이 가능하리라는 기대감의 발로다. 일부의 여행 예찬론은 분명히 그런 청산적 경향과 닿아 있다.
 
라우라 또한 실연을 포함해 자신 앞에 가득 놓인 고민들에서 벗어나고픈 심정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저 세상의 끝 무르만스크에서 고대인들이 남긴 것을 목격하면, 지금 현재 자신이 겪는 위기를 돌파할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나선 여행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계획은 기본적으로 달성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비록 지극히 '러시아'적인 해결방식을 얻은 덕분에 어떻게 풀리긴 했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원래 소망과는 꽤나 다른 형태이긴 해도, 라우라의 목표는 결국 달성된 셈으로 볼 수 있다. 그녀가 여러 차례 설명했던 고대인의 지혜를 발견하는 대신, 시공간을 뛰어넘는 인류 보편의 공통적 감성에 의해서 말이다. 여기에서 마법의 주문이 하나 등장한다. "하이스타 비투"라는 핀란드 말이다. 이 짧은 어휘는 그 어떤 사랑의 묘약 못지않은 탁월한 효능을 자랑한다. 어떻게 활용되는지는 영화에서 직접 확인하시라. 흔한 로드무비와는 궤를 달리하는 독창적인 세계가 광활한 북반구의 설원처럼 펼쳐져 있으니.
 
<작품정보>
 
6번 칸 Compartment Number 6, Hytti nro 6
2021|핀란드, 에스토니아, 러시아, 독일|드라마
2023.03.08. 개봉|107분|15세 관람가
감독 유호 쿠오스마넨
주연 세이디 하를라(라우라 역), 유리 보리소프(요하 역)
출연 율리야 아우크, 디나라 드루카로바, 폴리나 아우그, 갈리나 페트로바
수입 및 배급 싸이더스
 
2021 74회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2021 45회 상파울루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남배우상(유리 보리소프)
2021 66회 바야돌리드국제영화제 최고배우상(유리 보리소프)
2022 45회 예테보리국제영화제 연기 드래곤상(세이디 하를라), 국제비평가
협회상
6번 칸 유호 쿠오스마넨 세이디 하를라 유리 보리소프 로드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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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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