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길을 택해 꾸준히 나아가는 이들을 만나러 갑니다. 몇몇 대형 기획사 중심의 글로벌 성과와는 별개로 자꾸만 좁아지고 획일화되는 것 같은 국내 음악 시장에서 노래, 연주, 혹은 프로듀싱과 유통 등으로 저변을 넓혀가는 이들을 응원합니다. 지속하는 이 음악인들의 속마음을 전하려 합니다.[기자말]

 

하이미스터메모리(박기혁) 하이미스터메모리(박기혁)가 24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능곡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하이미스터메모리(박기혁) 하이미스터메모리(박기혁)가 24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능곡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2007년 1집 <안녕 기억씨>로 데뷔해 어느덧 음악인생 16년째를 맞는 하이미스터메모리(본명 박기혁)는 한껏 편안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기점으로 일부 아이돌과 유명 뮤지션을 제외하고 더욱 뮤지션들의 설 자리가 좁아진 것처럼 보이는 한국 음악 시장 환경이었는데도 말이다.
 
인디 음악 좀 들었다 하는 이들에게 하이미스터메모리 노래는 꽤 깊이 각인돼 있을 것이다. 밴드 음악의 호황기였던 2000년대 초중반 홍대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그는 포크록을 기반으로 한 두 개의 정규앨범을 낸 후 그때그때 창작한 노래와 편곡한 노래로 소통 중이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 용산 참사 등 크고 작은 사회 문제 현장에도 노래로 힘을 보태왔다. 서울을 떠나 경기도 고양 내 능곡에 정착한 지 10년이 넘었다. 그 뒤로는 각종 공연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의 음악 인생은 안녕할까. 한창 추위가 꺾이던 2월 말 능곡 작업실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팬데믹으로 바뀐 것들

그가 능곡으로 온 이유는 분명하다. 말대로 '젠트리피케이션'이다. 문화 예술인들 중심으로 상권이 발달한 뒤 임대료가 급등해 정작 그들이 떠나고 프렌차이즈 중심의 상권으로 재편하는 현상이 홍대는 물론이고 서울 곳곳에서 있어 왔다. 하이미스터메모리는 주변 음악인들을 설득해 능곡 지역에 이른바 음악인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김마스타, 레인보우99 등 잔뼈가 굵은 뮤지션들이 능곡으로 이주해 교류하고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직후로 비대면 공연도 여러 번 했지만 그 외 공연은 할 길이 없었잖나. 우리가 기회를 만들자는 생각에 팬데믹 동안 동네를 돌아다녔다. 보니까 능곡역 구 역사가 있더라. 주민들이 거길 없애지 말라고 해서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거기서 공연하면 어떨까 싶어서 뮤지션 친구들과 기획공연을 제안했지. 그래서 지난해 5회차 정도 공연할 수 있었다. 문제는 제시 금액을 잘못 알고 지원해서 거의 무료 봉사 수준으로 진행했다(웃음). 그래도 우리끼린 재밌었지."
 
구 역사를 리뉴얼한 능곡1904에서 진행한 '능곡에서 다시 능곡으로'가 바로 그 사례였다. 이와 함께 능곡 시장 상점가를 살롱문화에 접목한 능곡쌀롱, 줌을 활용한 온라인 공연을 진행하며 지역 주민과 소통했다. 본인 작업실을 공연장으로 꾸며 시장 상인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물론 비정기적으로 홍대 클럽에서도 공연했지만 최근 3, 4년은 능곡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 무대를 다지는 기간이었다고 한다.
 
"공연을 하더라도 코로나 기간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긴 했다. 방역 수칙은 다 지키면서 하고 싶었기에 취소한 공연도 많았다. 동시에 여러 실험을 하면서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저도 홍대 클럽신에서 10년 넘게 활동했지만, 언젠가부터 뭔가 남의 자릴 뺏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클럽 공연을 고집하면 할 수도 있겠지만 젊은 관객들에게 계속 어필하려고 내가 추구하는 음악과 다른 음악을 하는 것도 이상하다 싶었다. 그때 함께 음악을 즐기던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며 기획 공연을 준비한 셈이다.
 
능곡1904에서 '능곡으로 다시 오라'는 주제로 공연을 진행하는데 말도 안 되게 (기타리스트) 김광석 아저씨도 오셨고, 70대 넘으신 어느 주민은 생전에 이런 공연을 본 적 없다며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아, 값어치 있는 일이구나' 싶었지. 그분이 가장 고령이었고, 가장 어린 친구는 대여섯 살 아이였는데 '꽃순이'(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를 만난 뒤 만든 곡이다- 기자 주)라는 노래를 듣고 절 꽃순이 삼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꽃순이 삼촌과 결혼하고 싶다고 하는 걸 보며 '오, 생각보다 내 음악이 좀 오래 가겠구나' 싶었지(웃음)
 
부딪히지 않았으면 몰랐을 감흥이었다. 사실 능곡은 홍대 쪽으로 출근하기 위한 거점 정도로 생각했는데 저도 놀랐다. 시장 상인들을 제 작업실로 초대해서 상점 이름 하나하나 소개하면서 공연하기도 했다. 노래도 그분들이 좋아하실 만한 걸로 준비했고. 이런 에피소드들이 정말 많다."

    

 하이미스터메모리 노래를 듣고 '결혼하고 싶다'며 손팻말을 만들어 온 꼬마팬.

하이미스터메모리 노래를 듣고 '결혼하고 싶다'며 손팻말을 만들어 온 꼬마팬. ⓒ 박기혁


 
다양한 음악신, 자생하는 음악신을 바라며
 
동네 기반 공연과 별개로 하이미스터메모리는 전국을 돌며 찾아가는 공연을 꽤 오래 전부터 진행해오고 있다. 춘천, 제주, 문경, 속초, 최근엔 순천까지. 말 그대로 팔도를 유랑하며 노래했던 셈. 이같은 방향성을 잡기 직전까지 그가 겪었던 성장통이 꽤 컸다고 한다. 2010년 이후 정규 앨범을 내지 않고 있는 것과도 통하는 아픔이었다.
 
"2집 이후 5, 6년 간 공연을 안 하고 지켜보기만 하던 시기가 있었다. 창작도 어려웠고, 어디서 뭘 할지 고민도 컸다. 좁디좁은 인디신에서 다른 뮤지션들과 나눠먹는 게 맞나 싶었다. 나름 앨범 작업도 해봤는데 파일이 다 없어진다거나 밴드 멤버가 자꾸 교체된다거나 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관점이나 시선이 생기기 전까진 곡을 만들지 않겠다며 스스로 마법을 걸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세대, 우리 음악 문화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혼자 경험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엇다. 어느덧 미발매 곡들도 많이 쌓였고, 소개하고픈 노래들도 생겼다. 싱글이든, EP앨범(정규 앨범보다 소규모인 앨범 - 기자주)이든 올해부터 염두에 두고 활동할 것 같다. 사실 뮤지션이 앨범을 안 내고 활동하는 게 많이 힘들긴 하다. 언론에서 조명해주지도 않고, 사람들도 몰라주니까. 근데 스스로 확신이 필요했다. 좋은 음악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방법이 뭐일지 그게 큰 숙제였다. 아주 대중적인 음악을 한 적도 있고, 아예 예술적으로 가 보기도 했다. 지금은 둘 다 즐기고 있다. 장터에서 예술의 전당까지 포섭하는 음악인이 나름의 캐치프레이즈였는데 실제로 그렇게 섭외가 오더라(웃음)."

 
소속사 없이 수년간 여러 실험으로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얻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 과정에서 좋은 동료를 만났고, 그 가치관을 지지해주는 배우자를 만났다. 그는 "음악을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닌 이상 어려움이 와도 즐겁게 감당하자는 생각이다. 더이상 인내할 수 없으면 차라리 그만두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며 소신을 드러냈다.
  

하이미스터메모리(박기혁) 하이미스터메모리(박기혁)가 24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능곡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하이미스터메모리(박기혁) 하이미스터메모리(박기혁)가 24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능곡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지나치게 홍대 클럽신에서 내 음악이 보호받고 있던 건 아닌가 싶었다. 지금 당장 지방이든 문화 소외 지역에 가서 사람들을 음악으로 설득할 자신 있나 되묻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국 버스킹을 떠났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뮤지션이라면 분명 사람들이 어느 순간 내 음악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다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그 진통은 필연적이다. 그럴수록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음악에 집중해야 한다고 본다.
 
에릭 클랩튼이 평생 블루스를 했다. 사람들이 블루스에 호응하지 않을 때 그가 다른 음악을 했었나? 자기 음악을 했다. 20대 때부터 만나고 알고 지낸 동료들끼리 한 말인데 '이미 우린 요절할 나이가 지났으니 이젠 호상으로 갑시다!' 이러고 깔깔 웃은 기억이 있다. 40대만 넘어도 은퇴하니 뭐니 했는데 지금 같이 공연하고 그런다. 이게 참 발칙하지 않나. 일반 기획자와 음악가들이 하는 기획은 분명 다르다. 작년의 노력이 빛을 발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공연 기획 의뢰도 들어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예전엔 이익집단에서 떨어져 혼자 해결하려 하는 성향이 강했는데 이젠 함께 힘을 모아 문제를 개선하는 일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며 뮤지션 유니온(협동조합)에 가입한 사실을 알렸다. 상업화된 TV 프로그램 아니면 신인 음악가의 존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팍팍해진 인디신을 두고 할 말이 많았다.

최근 논란이 된 카운팅 정산 문제(공연장에서 뮤지션들에게 일정 규모 이상 모객에 성공하면 그 비중만큼 수익을 나눠주는 방식)에도 나름의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한국 인디신, 음악 산업을 생각하면 답답해지기 십상이지만 하이미스터메모리는 "그럼에도 다양한 공연, 다양한 장르가 활성화돼야 한다"며 "굳이 최고, 정상을 가리는 게 아니라 각 장르별로 각자의 신에서 깊어지고, 그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흐름이 생기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전히 재밌는 기획을 준비 중이었다. 그는 "유튜브로 공연을 내보내기도 했는데 우리 작업실을 기점으로 혼술 프로젝트를 하거나, 오래전부터 부르고 싶었던 음악인들을 불러 공연과 그 영상을 남기고 싶다"고 나름의 포부를 밝혔다.
 
"지금까진 지역 주민과 소통하는 공연을 했다면, 이젠 더 깊이 들어가서 우리가 알아야 할, 제가 소개하고 싶은 음악인들을 소개하려 한다. 슬슬 기지개를 펼 시기가 온 것 같다."    
 

▲ 능곡의 자랑, 하이미스터메모리 지역 커뮤니티, 그리고 전국을 돌며 자신의 음악으로 사람들과 만나온 하이미스터메모리의 지난 1년을 갈무리한 영상이다. ⓒ 박기혁

하이미스터메모리 박기혁 능곡 밴드 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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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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