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MC' 유재석은 자신은 배우들처럼 프로그램을 통해 '포상휴가'를 다녀온 적이 없다고 털어 놓았다. 배우들은 출연하는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로 종영하면 방송국이나 제작사에서 고생한 배우 및 스태프들에게 포상휴가를 보내주지만 예능프로그램의 종영은 곧 '시청률 하락'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최근엔 케이블이나 OTT를 중심으로 시즌제 예능프로그램이 많이 제작되고 있다).

따라서 예능의 세계에서는 종영 없이 꾸준히 장수 프로그램으로 남아있는 것이 출연진과 제작진들에게는 최고의 영광이라 할 수 있다. 지난 2007년부터 4번의 시즌에 걸쳐 방영되고 있는 <1박 2일>과 2022년 5월 방송 15주년을 맞은 <라디오 스타>, 아시아 전역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리얼 버라이어티 <런닝맨> 등이 대표적인 장수 예능 프로그램들이다. 하지만 이처럼 쟁쟁한 예능들도 이 프로그램에 비할 수는 없다.

국내 최장수 예능프로그램은 단연 지난 1980년부터 무려 43년째 방송되고 있는 KBS의 <전국노래자랑>이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매주 일요일 정오마다 방송되는 <전국노래자랑>은 자극적인 포맷 없이도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와 노래들로 매주 시청자들을 만나고 있다. 그리고 지난 2013년에는 '예능대부' 이경규가 이 프로그램을 모티브로 제작한 휴먼 코미디영화 <전국노래자랑>을 선보였다.
 
 '예능대부' 이경규가 제작한 휴먼코미디 <전국노래자랑>은 <아이언맨3>에게 밀려 전국 100만 관객 달성에 아쉽게 실패했다.

'예능대부' 이경규가 제작한 휴먼코미디 <전국노래자랑>은 <아이언맨3>에게 밀려 전국 100만 관객 달성에 아쉽게 실패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다양한 캐릭터 넘나드는 팔색조 배우

학창시절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을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음에도 일찌감치 배우의 꿈을 가지고 있던 김인권은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후 1999년 영화 <송어>로 데뷔했다. 이후 <아나키스트>와 <조폭마누라> <화성으로 간 사나이> 등에서 조연으로 출연한 김인권은 2004년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유급생 찍새 역을 맡았다. 코믹연기를 많이 소화했던 김인권의 캐릭터 중 흔치 않게 폭력수위가 높은 불량학생 역할이었다.

전투경찰로 군복무를 마친 김인권은 <마이 파더> <두 얼굴의 여친> <용의주도 미스신> 등에 출연하다가 2009년 1140만 관객을 모은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를 통해 관객들의 눈도장을 찍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해운대>에서 놀라운 생존력을 가진 오동춘을 연기한 김인권은 단숨에 천만 배우에 등극했고 이는 2010년 자신의 첫 단독 주연영화 <방가?방가!> 출연으로 이어졌다.

2011년 윤제균 감독이 수장으로 있는 JK필름에서 제작한 <퀵>에서 폭주족 출신의 교통경찰을 연기한 김인권은 같은 해 강제규 감독의 <마이웨이>에서 일본군에 징집 당하는 인력거꾼 이종대 역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김인권을 '쌍천만 배우'로 만든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는 외골수 호위무사 도부장을 연기하며 김인권의 평소 이미지와는 다른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김인권은 2013년 '예능대부' 이경규가 제작한 <전국노래자랑>에서 가수의 꿈을 간직한 채 대리운전과 미용실을 하는 아내(류현경 분)의 '셔터맨'으로 일하다가 전국노래자랑에 참가하는 봉남을 연기했다. <전국노래자랑>은 전국 97만 관객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지만 김인권은 2014년 <신의 한 수>와 <타짜-신의 손>, 2015년 <히말라야> 등 흥행작에 잇따라 출연하며 배우로서 전성기를 이어갔다.

김인권은 2018년 괴수 영화 <물괴>에서 물괴의 목소리 연기와 물괴와 맞서 싸우는 성한 역을 동시에 맡아 열연을 펼쳤지만 <물괴>는 72만 관객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김인권은 2020년 드라마 <철인왕후>에서 대령숙수 만복 역을 맡아 신혜선과 코믹연기를 선보이며 많은 사랑을 받았고 올해는 MBC 주말드라마 <꼭두의 계절>에서 꼭두(김정현 분)를 보필하는 '반신' 옥신을 연기하고 있다.

<아이언맨3>와 맞대결, 최악의 대진운
 
 봉남은 전국노래자랑 출전을 계기로 부활 김태원의 눈에 들어 정식가수로 데뷔한다.

봉남은 전국노래자랑 출전을 계기로 부활 김태원의 눈에 들어 정식가수로 데뷔한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극장가에서 12월 중순은 겨울방학과 크리스마스, 연말특수를 모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성수기다. 하지만 2022년 겨울방학 시즌이 시작되는 12월 14일에는 모든 영화들이 몸을 잔뜩 움츠리며 신작개봉을 미뤘다. 이날 개봉하는 극장가 최상위 포식자가 될 것이 분명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 물의 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영화는 작품의 완성도 만큼이나 개봉시기와 맞대결 상대(?)도 매우 중요하다.

<전국노래자랑>은 근로자의 날과 어린이날 연휴(2013년은 어린이날이 일요일이었다)의 특수를 누릴 수 있는 2013년 5월 1일에 개봉했다. 제작자인 이경규는 배우들과 함께 예능프로그램 <런닝맨>에 출연할 정도로 홍보에 열의를 보였다. 하지만 <전국노래자랑>이 개봉하기 일주일 전 무려 마블의 기대작 <아이언맨3>가 개봉했고 <전국노래자랑>은 전국 900만 관객을 동원한 <아이언맨3>의 직격타를 맞으며 100만 관객의 문턱에서 좌절했다.

<전국노래자랑>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신혼부부와 재선을 노리는 시장과 시청직원들, 외국으로 떠나기 전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남기고 싶은 손녀, 제품을 홍보하고 싶은 중소기업 대표와 홍보팀 직원들 등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구성된 영화다. 실제 <전국노래자랑>에서 우리 이웃들의 소박한 사연들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영화에서도 자극적인 이야기 대신 공감을 불러오는 소소한 에피소드들로 채워졌다.

2022년에 이미 고인이 됐지만 <전국노래자랑>을 영화화하면서 고 송해 선생이 출연하지 않는다면 <전국노래자랑>의 영화화는 큰 의미가 없다. 이는 마치 <무한도전>이나 <런닝맨>을 영화화하면서 유재석이 등장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에 제작자인 이경규는 송해 선생이 종종 찾는다는 공원에서 잠복(?)을 해 어렵게 송해 선생을 만났고 송해 선생은 이경규의 열정에 감복해 그 자리에서 출연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경규가 제작한 <복면달호>를 공동 연출했던 김상찬 감독과 김현수 감독은 안타깝게도 훗날 감독으로서 의미 있는 커리어를 이어가지 못했다. <전국노래자랑>의 이종필 감독 역시 <전국노래자랑>이 상업영화 데뷔작이었다. 하지만 이종필 감독은 <전국노래자랑> 이후에도 2015년 <도리화가>를 연출했고 2020년에는 고아성과 이솜 주연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연출해 코로나19 시국에도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선전했다.

'뭣이 중헌지' 모르던 시절의 꼬마소녀
 
 3년 후 <곡성>으로 스타가 되는 김환희는 <전국노래자랑>에서도 뛰어난 연기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3년 후 <곡성>으로 스타가 되는 김환희는 <전국노래자랑>에서도 뛰어난 연기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전국노래자랑>에는 <건축학개론>과 <늑대소년>에서 인상적인 악역연기를 선보였던 유연석이 회사에서 개발한 건강기능음료 '여심'을 판매해야 하는 홍보팀 대리 동수를 연기했다. 이경규는 촬영장에서 훤칠한 기럭지에 서글서글한 인상, 안정된 연기를 갖춘 유연석을 보면서 훗날 대성할 거라 예언했다. 그리고 유연석은 같은 해 <응답하라 1994>에서 칠봉이 역으로 스타가 됐고 이경규는 자신의 정확한 안목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내성적인 동수는 전국노래자랑에는 여성이 출전하는 게 더 효과적일 거라며 현자를 적극 추천한다. 졸지에 전국노래자랑에 출전하게 된 현자는 동수를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본선무대에서 동수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며 박혜경의 <고백>을 열창했다. 현자를 연기한 배우 이초희는 지난 2020년 KBS 주말드라마 <한 번 다녀왔습니다>에서 이상이와 커플연기를 선보이며 KBS <연기대상>에서 신인상과 베스트커플상을 수상했다.

영화 <전국노래자랑>에는 한복집을 하는 동수의 이모 역으로 배우 이정은이 출연했다. 사장님(김용건 분)의 지시에 따라 한복을 수선하면서 조카인 동수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동수는 '현자가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로 현자에게 상처를 준다. <전국노래자랑>에서 조·단역으로 짧게 출연했던 이정은은 6년 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통해 청룡영화상과 대종상을 비롯한 4개 영화제의 여우조연상을 휩쓸었다.

유연석-이초희 커플이 풋풋한 멜로감성을 책임졌다면 영화의 '눈물벨'을 책임진 배우는 아직 '뭣이 중헌지' 모르던 시절의 김환희였다. 캐나다로 간 엄마(신은경 분) 대신 할아버지(남자배우 오현경 분)와 단둘이 사는 보리는 할아버지만 혼자 두고 엄마와 캐나다로 떠나게 됐다. 이에 보리는 전국노래자랑 대기실에 몰래 잠입(?)해 '송해 오빠'(실제로 영화에서 보리가 송해 선생을 이렇게 부른다)에게 부탁해 할아버지에게 마지막 노래선물을 전한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전국노래자랑 이종필 감독 김인권 김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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