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엄청난 흥행작을 만들거나 국제영화제에서 주요상을 수상한 작품을 만든 감독은 차기작에 대한 부담이 상당히 커질 수밖에 없다. '인생작'을 통해 뛰어난 명성을 얻게 된 만큼 관객들이 그 감독의 차기작에 거는 기대치가 커지기 때문이다. 물론 <왕의 남자> 이후 차기작 <라디오 스타>의 개봉까지 단 9개월이 걸린 이준익 감독 같은 사례도 있지만 이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이는 할리우드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엄청난 흥행성적과 함께 관객들의 극찬을 받은 작품을 만든 감독은 차기작을 선보이는데 부담을 느끼고 철저한 준비를 하게 된다. 실제로 1997년 <타이타닉>을 통해 전 세계 흥행기록을 썼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차기작 <아바타>를 선보일 때까지 12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길어야 2~4년 정도가 걸릴 거라던 <아바타> 속편도 이런 저런 이유로 제작이 미뤄지며 결국 13년 만에 관객들을 만났다.

지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동명의 판타지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반지의 제왕>은 3편에 걸쳐 개봉해 세계적으로 29억1700만 달러라는 엄청난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그리고 <반지의 제왕>을 통해 단숨에 세계적인 거장이 된 피터 잭슨 감독은 <반지의 제왕>을 끝낸 지 2년 만에 곧바로 속편을 선보였다. 피터 잭슨 감독의 오랜 숙원이었던 리메이크 영화 <킹콩>이었다.
 
 피터 잭슨 감독은 <반지의 제왕>을 만들기 전부터 <킹콩> 리메이크를 추진했다.

피터 잭슨 감독은 <반지의 제왕>을 만들기 전부터 <킹콩> 리메이크를 추진했다. ⓒ UIP 코리아

 
2개의 메가히트 트릴로지 만든 감독

1961년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태어난 피터 잭슨 감독은 젊은 시절부터 16mm 카메라를 통해 짧은 공상과학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7년 잭슨 감독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오늘날 뉴질랜드 컬트 영화의 고전이 된 데뷔작 <고무 인간의 최후>를 만들었다. 그 후 <피블스를 만나요>로 재능을 인정 받은 잭슨 감독은 1992년 <데드 얼라이브>를 통해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데뷔 초기만 해도 잭슨 감독은 과장될 정도로 피와 살이 튀는 공포영화를 전문으로 만드는 감독으로 유명했다. 그러던 1994년 잭슨 감독은 훗날 <타이타닉>에 출연하는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천상의 피조물>을 만들며 본격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1999년 <반지의 제왕> 실사영화 시리즈의 감독을 맡아 2001년부터 1년에 한 편씩 선보이며 엄청난 흥행성적과 함께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시상식의 감독상을 휩쓸었다.

<천상의 피조물>로 명성을 얻은 1990년대 중반부터 <킹콩>의 리메이크를 준비했던 잭슨 감독은 2005년 드디어 <킹콩>의 리메이크판을 선보였다. 2억70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킹콩>은 세계적으로 5억5600만 달러의 성적을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고 국내에서도 <반지의 제왕> 감독의 차기작이라는 것이 화제가 되면서 전국 420만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반지의 제왕>과 <킹콩>을 통해 '대작 전문 감독'으로 이미지가 굳어지던 피터 잭슨 감독은 2009년 판타지 스릴러 <러블리 본즈>를 연출했지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피터 잭슨 감독은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반지의 제왕> 이전 이야기를 다룬 <호빗> 3부작을 통해 명예회복에 성공했다. <호빗> 3부작은 도합 29억38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반지의 제왕> 못지 않은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호빗> 3부작을 끝낸 피터 잭슨 감독은 2018년 <모털 엔진>의 각본과 제작을 맡았지만 흥행실패로 인해 속편 계획이 사실상 무산됐고 본인은 같은 해 전쟁 다큐멘터리 <데이 쉘 낫 그로우 올드>를 연출했다. 잭슨 감독은 작년에도 비틀즈의 마지막 라이브 공연인 런던의 옥상 콘서트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비틀즈 겟 백 : 루프탑 콘서트>를 연출했다. 하지만 관객들은 잭슨 감독의 장인정신이 담긴 대작영화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인간을 사랑한 유인원의 비극적인 이야기
 
 흉폭한 괴수 킹콩은 사랑하는 앤 앞에서는 얌전하고 자상한 남자로 변신한다.

흉폭한 괴수 킹콩은 사랑하는 앤 앞에서는 얌전하고 자상한 남자로 변신한다. ⓒ UIP 코리아

 
1933년에 처음 선보인 <킹콩>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특수촬영으로 극찬을 받았던 작품이다. 물론 중년 이상의 세대에게는 1976년 제프 브리지스와 제시카 랭이 주연을 맡았던 첫 번째 리메이크 버전이 익숙하다. 피터 잭슨 감독은 어린 시절 1933년에 만들어진 오리지널 <킹콩>을 본 후 본격적으로 영화감독의 꿈을 키웠고 <반지의 제왕>으로 세계적인 감독이 되기 전부터 <킹콩>의 리메이크를 꾸준히 구상했다.

<킹콩>은 해골섬에 등장하는 다양한 종류의 공룡들과 콩과 공룡의 대결,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액션 등 볼거리가 가득한 작품이다. 실제로 <킹콩>은 화려한 볼거리로 아카데미 시각효과상을 수상했다. 물론 3시간이 넘는 긴 런닝타임은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9시간이 넘는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를 무사히 감상한 관객이라면 기승전결이 명확한 <킹콩>의 런닝타임도 그리 길게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킹콩>의 장르를 어떤 걸로 규정할 지는 감상하는 관객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킹콩>의 여러 장르 중에는 크고 무섭게 생긴 거대 유인원 콩(앤디 서키스 분)이 아리따운 인간여성 앤(나오미 왓츠 분)을 사랑하면서 벌어지는 슬픈 러브스토리를 빼놓을 수 없다. 만약 콩이 앤을 다른 인간이나 동물들처럼 대했다면 아무 불행도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콩은 사랑하는 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아까운 목숨을 잃는다.

데뷔 초에는 니콜 키드먼의 고교 동창으로 알려지기도 했던 나오미 왓츠는 일찌감치 스타가 된 친구에 비해 연기인생이 잘 풀리지 않다가 2001년 데이빗 린치 감독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통해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2003년 <21그램>을 통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왓츠는 2005년 <킹콩>에서 앤 역을 맡으며 열연을 펼쳤고 2012년에는 재난영화 <더 임파서블>을 통해 다시 한 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됐다.

제프 브리지스와 제시카 랭 주연의 1976년작 <킹콩>은 10년이 지난 1986년 괴작에 가까운 속편이 제작됐지만 피터 잭슨 감독의 <킹콩>은 속편 없이 한 편으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킹콩은 영화에서 쓰이기 무척 좋은 캐릭터이기 때문에 2017년 <콩: 스컬 아일랜드>와 2021년 <고질라 vs. 콩> 등 킹콩이 등장하는 영화는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 실제로 킹콩 영화는 할리우드와 일본에서 9번에 걸쳐 실사영화로 제작된 바 있다.

코미디 전문배우의 과감한 연기변신
 
 코미디 전문배우였던 잭 블랙은 <킹콩>에서 욕망에 가득 찬 영화감독으로 변신했다.

코미디 전문배우였던 잭 블랙은 <킹콩>에서 욕망에 가득 찬 영화감독으로 변신했다. ⓒ UIP 코리아

 
2001년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를 통해 코미디 배우로 주목 받기 시작한 잭 블랙은 2003년 <스쿨 오브 락>에서 초등학생들에게 록을 가르치는 괴짜 음악선생님을 연기하며 친근한 코미디 배우의 이미지를 굳혔다. 하지만 피터 잭슨 감독은 유쾌한 코미디 배우 잭 블랙에게 성공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찬 3류 영화 감독 칼 던헴 역을 맡겼고 잭 블랙은 이를 멋지게 소화하며 연기변신에 성공했다.

해골섬의 지도를 구한 칼은 누구도 찍지 못한 화면을 담겠다는 열정으로 무시무시한 괴수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도 "xx의 죽음은 영화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습니다. 나는 영화의 수익금을 그의 부인과 자녀들에게 기부할 것입니다"라는 공수표를 남발한다. 그리고 칼은 앤을 쫓아온 콩을 유독성 마취제를 이용해 포획하는데 성공하고 뉴욕의 공연장에서 대중들에게 사지가 묶인 콩을 공개한다.

<반지의 제왕>의 골룸과 <킹콩>의 콩, <혹성탈출>의 시저 등을 연기한 앤디 서키스는 할리우드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모션캡처(인체의 움직임을 디지털 형식으로 기록하는 작업) 연기의 달인이다. 앤디 서키스는 <킹콩>에서도 콩의 모셥캡처 연기와 캅판 요리사 럼피 역까지 1인2역을 소화했다. 서키스는 좀처럼 겹치기 캐스팅을 하지 않는 라이벌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DC코믹스의 세계관을 넘나드는 몇 안 되는 배우이기도 하다.

<킹콩>에서 콩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던 앤을 데려가는 극작가 잭은 목숨을 걸고 앤을 구하기 위해 콩의 소굴로 들어가는 용기 있는 인간이다. 하지만 콩 입장에서 잭은 사랑하는 앤을 데려가는 빌런에 가까운 인물이다. <킹콩>에서 잭을 연기한 에이드리언 브로디는 2003년 만29세의 나이에 <피아니스트>로 아카데미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2011년에는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화가 역으로 좋은 연기를 선보였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킹콩 피터 잭슨 감독 나오미 왓츠 잭 블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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