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부터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연상호 감독은 2010년대 들어 <돼지의 왕>과 <창>,<사이비> 등을 연출하며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특히 2013년에 개봉한 <사이비>는 2019년 엄태구와 천호진, 이솜, 김영민 주연의 드라마(<구해줘2>)로 만들어 지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연상호 감독은 국내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만 이름이 알려졌을 뿐 일반 대중들에겐 무명에 가까웠다.

그런 연상호 감독이 100억 원이 넘는 제작비가 투입되는 작품을 통해 실사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고 했을 때 관객들은 기대보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크게 냈다. 하지만 2016년에 개봉한 연상호 감독의 실사영화 데뷔작 <부산행>은 전국 1150만 관객을 동원하며 'K-좀비' 전성시대의 시작을 알렸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이처럼 어떤 인물이 한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알아주는 계기를 만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가위손>과 <배트맨>,<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웬즈데이> 등을 만든 '할리우드의 괴짜' 팀 버튼 감독도 1988년 세상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진가를 알린 작품을 만났다. 마이클 키튼과 알렉 볼드윈, 지나 데이비스, 위노나 라이더 등 훗날 스타가 되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던 기괴한 분위기의 판타지 코믹 호러 영화 <비틀쥬스>였다.
 
 <비틀쥬스>는 북미에서 제작비의 5배 가까운 흥행을 했음에도 국내에선 개봉조차 되지 못했다.

<비틀쥬스>는 북미에서 제작비의 5배 가까운 흥행을 했음에도 국내에선 개봉조차 되지 못했다. ⓒ 워더 브라더스

 
마이클 키튼은 원래 코미디 배우였다

대학 중퇴 후 스탠드업 코미디언과 TV시리즈 단역으로 활동하던 마이클 키튼은 1980년대 중반까지 주로 코미디 영화에 출연했지만 좀처럼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그러던 1988년 키튼은 신예 감독 팀 버튼의 <비틀쥬스>에서 유괘하면서도 기괴한 미치광이 악령 비틀쥬스를 연기하면서 연기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1980년대 미남배우였던 키튼은 비틀쥬스를 연기하기 위해 기꺼이 우스꽝스런 분장도 감수했다).

결과적으로 키튼의 변신은 대성공이었다. 왁자지껄한 성격의 비틀쥬스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한 키튼은 1989년 전미 비평가 협회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 키튼이 열연을 펼친 <비틀쥬스>는 15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져 북미에서만 74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다만 당시 팀 버튼 감독을 비롯한 배우들의 해외 인지도가 낮아 해외에서의 수익은 거의 올리지 못했다.

<비틀쥬스>에서 키튼에게 우스꽝스런 유령역할을 맡긴 게 미안했던 걸까. 팀 버튼 감독은 1989년 신작 <배트맨>에서 키튼에게 고담시를 지키는 어둠의 기사이자 고담시 최대부자 브루스 웨인 역을 맡겼다. 물론 캐스팅 당시엔 <비틀쥬스>의 유령 이미지 때문에 배트맨 역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키튼은 강렬한 연기와 카리스마를 통해 키튼만의 배트맨을 잘 표현하며 속편까지 출연했다.

<배트맨> 시리즈 이후 전성기가 일찍 저무는 듯 했던 키튼은 2014년 <버드맨>을 통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화려하게 재기했다. 2015년에 출연한 <스포트라이트> 역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본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물론 2000년대부터 꾸준히 출연해 목소리 연기를 했던 애니메이션 <카>와 <토이스토리3>,<미니언즈> 등도 키튼의 필모그래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이다.

키튼은 2017년 <스파이더맨: 홈커밍>에서 빌런 벌처를 연기하며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2019년에는 팀 버튼 감독, '펭귄맨' 대니 드비토와 27년 만에 재회한 <덤보>에서 덤보를 이용하려는 사업가 반데비어 역을 맡았다. <비틀쥬스>에서 팔팔한 30대 중반이었던 키튼도 어느덧 70대의 노장배우가 됐지만 키튼은 오는 6월 개봉 예정인 <플래시>에서 31년 만에 배트맨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팀 버튼 장점 잘 드러난 판타지 코믹호러
 
 마이클 키튼은 <비틀쥬스>에서 미치광이 유령으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마이클 키튼은 <비틀쥬스>에서 미치광이 유령으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 워너 브라더스

 
1982년 6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빈센트>로 데뷔한 팀 버튼 감독은 1985년 <피위의 대모험>으로 첫 흥행의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팀 버튼 감독의 색깔이 강하게 드러난 첫 번째 영화는 <비틀쥬스>라고 평가하는 관객들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팀 버튼 감독은 <비틀쥬스>를 통해 자신의 독특하고 기괴한 스타일이 관객들에게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고 훗날 자신만의 독창적인 영화들을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을 얻었다.

이처럼 <비틀쥬스>는 흥행으로나 의미로나 팀 버튼 감독의 커리어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이다. 하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극장 개봉조차 되지 못하고 <유령신부>라는 제목으로 변경돼 비디오 시장으로 직행했다(<유령신부>는 팀 버튼 감독이 2005년 같은 제목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 그나마도 수량이 매우 적어 팀 버튼이 유명해진 후 <비틀쥬스>를 구하기 위해 일부 영화팬들이 비디오 디여점을 뒤지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비틀쥬스>는 한적한 시골동네로 이사온 아담(알렉 볼드윈 분)과 바바라(지나 데이비스 분) 부부가 사고로 사망해 유령이 되고 새로 이사온 찰스(제프리 존스 분_)와 딜리아(캐서린 오하라 분) 부부의 가족을 쫓아내려고 노력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인간은 유령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아담과 바바라 부부의 노력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가고 이들은 결국 인간을 쫓아주는 전문유령 비틀쥬스(마이클 키튼 분)를 소환한다.

하지만 사악한 미치광이 유령 비틀쥬스는 찰스와 딜리아 부부를 쫓아낸 후 그들의 딸 리디아(위노나 라이더 분)와 결혼하겠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비틀쥬스의 음모와 유령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인간의 욕심 때문에 아담과 바바라 부부는 위기에 처하지만 비틀쥬스와 리디아의 결혼식 당일, 토성에서 온 모래벌레에 의해 비틀쥬스는 지하로 사라진다. 그리고 비틀쥬스를 퇴치한 아담과 바바라 부부는 저택에서 리디아 가족과 함께 살게 된다.

<비틀쥬스>에는 팀 버튼 감독 특유의 특수분장들이 많이 등장한다. 물론 2023년의 기준으로 보면 조악하게 느껴지는 장면들이 대부분이지만 <비틀쥬스>가 1980년대 영화라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잘 만들어진 장면이었다. <비틀쥬스>가 기대 이상의 흥행을 하면서 당연히 속편제작이 기획됐는데 '아이디어 뱅크'였던 팀 버튼 감독이 <배트맨>,<가위손> 같은 후속작들을 내놓으면서 <비틀쥬스> 속편 제작은 자연스럽게 묻혔다.

위노나 라이더에게 병 주고 약 준 팀 버튼?
 
 <비틀쥬스>에서 우울증 걸린 소녀를 연기했던 위노나 라이더는 2년 후 <가위손>을 통해 최고의 청춘스타로 도약했다.

<비틀쥬스>에서 우울증 걸린 소녀를 연기했던 위노나 라이더는 2년 후 <가위손>을 통해 최고의 청춘스타로 도약했다. ⓒ 워너 브라더스

 
우울증에 걸린 10대 소녀 리디아는 창백한 인상에 검은색 옷을 고집하며 눈에 보이는 것은 즉석카메라로 마구 찍어대는 독특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 리디아는 유령을 보거나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이를 계기로 아담-바바라 부부와 친구가 된다. 영화에서는 외톨이로 나오지만 사실 음침한 분위기를 제외하면 리디아는 상당히 아름다운 소녀이기 때문에 비틀쥬스 역시 리디아를 자신의 신부로 삼으려 한다.

위노나 라이더는 1986년 청춘 로맨스 <루카스>가 영화 데뷔작이었지만 라이더를 할리우드의 신성으로 키워준 작품은 역시 <비틀쥬스>였다. <비틀쥬스>에서 라이더에게 검은 옷을 고집하고 우울증에 걸려 있는 리디아를 연기하게 했던 팀 버튼 감독은 2년 후 <가위손>에서 라이더에게 여주인공 킴 역을 맡겼다. 그리고 라이더는 <가위손>을 통해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도약했다.

1982년 시드니 폴락 감독의 <투씨>를 통해 데뷔한 지나 데이비스도 1986년 <플라이>로 이름을 알린 후 <비틀쥬스>를 통해 본격적으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후 사후 125년 동안 집 안에 갇혀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된 초보유령 바바라는 아직 유령생활에 익숙하지 않음에도 오히려 산 사람 리디아를 걱정한다. 결국 서로를 걱정하던 바바라와 리디아는 비틀쥬스 퇴치 후 저택에서 함께 살아간다.

초보유령의 상담을 맡고 있는 저승의 공무원 쥬노는 깐깐해 보이는 인상에 시니컬한 성격으로 절박함에 자신을 찾아온 아담-바바라 부부에게도 차갑게 대한다. 하지만 비틀쥬스를 절대 고용하지 말라는 중요한 충고를 하기도 하는데 이는 쥬노가 과거 비틀쥬스를 조수로 고용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쥬노를 연기한 고 실비아 시드니는 1996년 팀 버튼 감독의 <화성침공>을 유작으로 남기고 1999년 인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비틀쥬스 팀 버튼 감독 마이클 키튼 위노나 라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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