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인가 또다른 시작인가... 독립영화의 존재를 묻는다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컨버세이션>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 편의 독립영화가 세상에 첫 선을 보였었다. 그 영회 <에듀케이션>은 그해 영화제 남,여 올해의 배우상(김준형, 문혜인)을 동시에 석권하며 해당연도 부산국제영화제 최고 화제작 중 하나로 회자되었다. 영화는 사회복지와 장애 문제를 배경으로 깔고 있지만 기존의 독립영화들이 주로 취하던 접근법과는 한참 달랐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복지제도 수급자 가족과 한국을 떠날 궁리만 하면서 필요한 조건을 위해 건성건성 아르바이트 자리로만 접근하는 활동지원사(활동보조인) 간에 벌어지는 충돌이 물리적으로까지 확장되는 <에듀케이션>의 풍경은 평단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비록 이후 극장개봉 과정에선 큰 성과를 내지 못했을지언정, 인상을 깊이 남긴 데뷔장편 덕분에 김덕중 감독은 곧 두 번째 장편 작업에 돌입한다. 첫 작품에 주목했던 적지 않은 이들이 그의 신작을 기다려왔을 법하다.(본인 역시 그중 한 명에 속한다) 그렇게 기다려온 두 번째 장편은 전작과 연속성을 가지는 형태의 제목으로 2년 후 등장한다. <컨버세이션>은 한 단어로 간결한 영문제목을 취한 점에서 연작 성격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혹자는 이제 고전 반열에 오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1974년 동명 작품과 비교하며 어떤 연결고리가 있나 궁금해 했다.
 
하지만 2021년에 공개된 <컨버세이션>의 실체는 사람들이 예상했던 형태와는 상당히 달랐다. 일단 제목은 무척 정직하게 지어진 편이다. 한글과 영문 공히 동일한 의미로 '대화'라는 제목을 취한다. 제목이 곧 이 영화의 얼개와 구조를 규정하는 방식이다. 정말 120분의 러닝타임 동안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서로 대화를 나눈다. 그게 전부다.
 
끝나지 않는 대화 속에서 상호 단절된 개인들
 
<컨버세이션>은 얼핏 보면 일종의 옴니버스 영화처럼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져 대화를 이어간다. 종종 대화는 명확한 마침표 없이 툭툭 끊어지거나 점프하듯 넘어가버린다. 대화의 중심에는 크게 세 그룹이 있다. 이들의 관계성은 대충 짐작 가능하지만 또렷하게 인과관계를 영화 속에서 확정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관객은 각자의 상상 속에서 이 그룹들의 과거와 미래를 레고 조립하듯 분리합체하며 재설정할 수 있다.
 
처음 등장한 이들은 30대 후반 가량 되는 세 여성, 은영과 명숙, 다혜다. 이 셋은 20대에 함께 파리에서 유학생활을 보냈다. 한 명은 결혼해서 아이를 두고 있고 다른 이들은 여전히 사랑과 이별을 반복하는 듯하다. 오랜만에 재회한 이들은 자신들이 공유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억이라 할 프랑스 유학시절의 추억을 안주거리 삼아 와인 잔을 기울인다. 서로 모인 김에 이때다 하고 한국생활로 점점 가물가물해져가던 불어로 대화하며 까르륵 즐거운 한때도 보낸다. 하지만 어느새 각자의 삶은 꽤 거리감이 생겨났고, 서로 개별의 고민과 불안을 감추고 있음을 확인하고 만다.
 
두 번째 차례는 선후배 사이로 보이는 승진과 필재의 만남이다. 유모차에 자신의 갓난아이를 태운 승진과 그를 보기 위해 찾아온 후배 필재가 아파트단지 공원에서 오랜만에 재회한다. 따로 멀리 나갈 형편도 아닌 듯 둘은 빙글빙글 단지 내를 돌며 이야기를 나누지만 대화는 그들이 쳇바퀴 도는 단지 내 산책로 코스처럼 허공을 맴돈다. 둘 사이에 과거부터 쌓여온 푸념들은 현재 둘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는 중이다. 명확하게 어떤 일이 둘 사이에 있는 것인지 제대로 설명되진 않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각자 보이지 않는 벽을 쌓아둔 것 마냥 서로에게 닿지 않는다.
 
세 번째 순서는 이미 앞 그룹들에서 얼굴을 내비쳤던 은영과 승진의 만남이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둘이 카페에서 마주치는 풍경이 첫 만남인지 구면인지 모호하게 그려낸다. 두 사람은 비 오는 날 카페 창가에서 시시껄렁한 밀고 당기기 대화를 나눈다. 아마 앞선 두 그룹에서 각각 등장하던 동명의 캐릭터와 둘이 동일인물인 것 같지만 감독은 굳이 확인시켜주지 않는다. 이들이 이름만 같은 별개 캐릭터일 수도, 대략 짐작한대로 동일인물의 다른 시간대일 수도 있지만 둘 다 명확하지 않다. 그 둘의 만남이 각자 처음 나왔던 시간대와 같거나 상이한 시간대일 수도 있겠다.
 
이 세 그룹이 영화 전체에서 일회성 아닌 형태로 거듭 등장하는 유력한 캐릭터이지만 그 외에도 개별 단락마다 제법 의미심장한 출연이 몇 명 더 있다. 중간 중간 그들 외의 등장인물이 특별한 설명이나 해설 없이 불쑥 끼어들었다 퇴장하곤 한다. 은영이 두 친구와 헤어져 귀갓길에 탄 택시의 운전기사, 은영에게 내방상담을 청하는 고객, 승진과 필재의 첫 만남을 주선한 선배 등이 그들이다. 어떤 대화는 귀에 쏙쏙 들어오지만 다른 대화는 맥락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거나 애초에 개연성을 구축하려는 의도가 별로 없어 보이기도 한다. 선형적인 기승전결 서사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꽤나 당혹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뒤얽힌 인물들 개개의 원심력이 교차해가며 이야기는 일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고 타원형의 궤적을 그리듯 늘어난다.
 
각자도생, 그럼에도 불안한 세대의 그림자
 
대략 30대 중-후반으로 묘사되는 서로 비슷한 연령대의 등장인물들은 그들 세대가 처한 세상 속에서 겪게 되는 고충과 불안을 지극히 개별적으로 풀어낸다. 그런 면에서 본 작품은 사회변화나 시사적인 의제에 천착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세대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이 영화의 제작진은 자신들의 앞 세대, 속칭 '86세대'라 불리는 선배들의 정치중심주의에서 극단적으로 탈주를 감행하는 방식으로 자기 세대의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태도를 보인다.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전 세대의 방법론에 대한 '막대 구부리기' 전략으로 그들은 오히려 철저히 거시 담론을 배격하려 하는데 극중 등장인물들의 대화 쟁점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순간순간 정치사회적으로 예민한 요소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순간은 너무나 무력하게 마무리된다. 등장인물들이 그저 지나가는 투로 진보정당에 대한 투표 여부를 갖고 설전을 벌이지만 용두사미로 별 의미 없이 끝나버린다. 대체 왜 저 이야기를 꺼냈을까 싶을 정도다. 동물권 관련해 고민을 토로하지만 막상 심각한 문제는 고작 친구들 사이 대화에서 자기 발언권과 지분 관련 자존심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등장인물 사이에 퀴어 코드가 튀어나오지만 굳이 넣지 않거나 다른 형태로 설정해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사회문제를 다루는 한국독립영화 경향과 비교하면 지극히 예외적인 스타일이다. 애초에 감독은 그런 요소들을 파편적으로 흩뿌려놓는 것 이상 의미를 부여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아예 넣지 않아도 될 법한데 애써 집어넣은 것은 분명 의미심장한 삽입이다. 대개 자신의 영화를 시사적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사회적 코드는 아예 배제하는 방식을 취하는 게 일반적이기에 은근히 더 신경 쓰이게 되는 지점이다.
 
그런 몇 순간의 예외를 제외하면 이 영화 속 주요 인물들은 끊이지 않고 대화를 시도하지만 정작 상대에게 자기 속내와 본심을 터놓고 꺼낼 엄두를 못 내거나 몇 번 시도하다 포기해버리는 난관에 봉착한다. 무미건조한 일상의 피신처로 연애와 결혼이 중요하게 언급되지만 정작 당사자들 또한 자신 넘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은 사랑도 결혼도 풋풋하거나 열정적으로 감히 부딪히지 못한다. 결혼은 해보니 후회되거나 일종의 도피처럼 간주될 뿐이다. 연애 또한 올곧게 부딪히기보다는 서로 눈치 속에 간보기를 하거나 간격을 띄워놓고 망설이곤 한다. 인물들은 직선으로 대면하는데 곤욕을 치른다.
 
<컨버세이션>은 2010년대 이후 일군의 한국(독립)영화들 중에서 (명확하게 정리된 공식은 아니지만) 특정한 어떤 경향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른바 '홍상수' 적이라 명명되는 부류 영화들 중 가히 첨단, 혹은 최전선에 서 있다고 하겠다. 과거 '독립군영화'란 소리를 들을 만큼 사회운동과 연계되어 있던 독립영화운동의 흐름이 쇠미해진 현재, 일종의 '역사의 종말'을 맞이한 것처럼 더 이상 의미 있는 사회변화나 집단적 실천의 기대가 소멸한 시대에 부합되는 영화적 경향이라 하겠다. 이미 앞전세대들이 다 완성해버린 세상 속에서 각개 고립된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정서가 생생하게 압축된 것 같은 영화다. 그 세대의 시각을 마치 임상보고서 혹은 기록용 타임캡슐 형태로 갈무리해놓은 모양새다.
 
그만큼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무심한 듯 미끄러지는 대화와 그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목격되는 불안감은 통상적인 스토리텔링 서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현재 독립영화를 창작하는 이들과 그들이 속한 세대의 초상을 화면 가득 펼쳐내 관객에게 전달한다. 거시담론이 더 이상 자신들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어진 상황에서 이들 각자는 무작정 어디론가 멀리 떠나길 고대하거나, 꿈같은 것과는 무관하게 하루하루 꼭 필수적인 생계를 해결하는 데에만 심드렁하게 복무하거나, 그저 무미건조한 일상을 찰나적으로 소일하는 것만이 허용될 뿐이다. 그렇게 살아내는 게 '일상의 투쟁'이 되어간다. 무엇을 더 바라느냐는 듯이.
 
대화 속 피어나는 숱한 질문들
 
문득 궁금한 지점이 생겼다. 이 영화가 선보이는 독특한 발상과 유려한 연출의 묘는 2시간을 꽉 채우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능히 감당하게 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어떤 세대의 경향에 관한 관찰 리포트, 또는 감독의 포트폴리오로 보면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한 작업이다. 다만 질문이 허용된다면, 과연 감독은 자신의 이번 작업이 관객에게 어떻게 보이길 기대하는 걸까? 혹은 이 영화가 어떻게 평가되길 바랄까? 하는 질의를 던지고 싶어진다. 혹시 전하고픈 메시지나 주제가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는데 필자가 불민하여 놓친 걸까. (그렇다면 반성하고 정진할 수밖에) 아니면 정말 그저 관객이 각자 해몽하는 방향으로 맡겨버린 것일까.
 
물론 이런 뜬금없는 질문은 <컨버세이션> 개별 작품에 대한 이야기에선 과도하거나 핵심 요소는 아닐 수 있다. 영화는 저예산과 코로나19 시기라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깔끔하고 세련되게 잘 뽑아져 나왔다. 일인다역을 훌륭히 소화해낸 조은지, 박종환 등 독립과 상업 신을 넘나들며 종횡 무진하는 이들에 곽민규, 김소이, 송은지, 곽진무 등 견고한 배우들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아교풀처럼 대화와 대화 사이를 중개한다. 연출력과 캐스팅, 그리고 형식을 파괴하는 도전적인 시도가 적절히 조화를 이룬다.
 
하지만 근래 한국독립영화들의 정체성이 무엇일까? 혹은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일까에 대한 산만한 생각들 가운데 해당 영화가 파문을 던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게 고민이다. 혹시나 필자가 품은 의문이 실제라면 21세기에 '독립영화'를 만드는 행위는 어떤 의미와 의의를 갖게 될까? 독립영화의 정의는 대체 무엇으로 결론 낼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컨버세이션>은 꽤나 문제작임에 틀림없다.
  
<작품정보>
 
컨버세이션 Conversation
2021|한국|드라마
2023. 2. 23. 개봉|120분|12세 관람가
감독/각본 김덕중
주연 조은지(은영 역), 박종환(승진 역), 곽민규(필재 역), 김소이(명숙 역),
송은지(다혜 역), 곽진무(대명 역)
출연 박세재(혜진 역), 정재윤(택시기사 역), 로빈 데이아나(뱅상 역)
제작 풀잎필름
배급 필름다빈
 
2021 26회 부산국제영화제
2021 47회 서울독립영화제
2021 23회 부산독립영화제
2022 10회 무주산골영화제
컨버세이션 김덕중 감독 조은지 박종환 곽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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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