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다이 하드> 스틸이미지. ⓒ 20세기 폭스
세월에 장사가 없다지만 왕년의 영웅이 허물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못된다. 바로 며칠 전 그런 소식 하나가 태평양을 건너 전해져왔으니, 영화를 좋아하는 적잖은 이들은 씁쓸한 표정으로 하루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때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얼굴이었고 한국에서도 높은 인기를 구가했던 브루스 윌리스가 치매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이다. 작품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B급 영화들에 연달아 출연하더니 지난해 실어증을 호소하며 갑작스러운 은퇴를 선언했던 그다. 1980년대부터 십수 년 간 할리우드를 주름잡던 명배우의 은퇴에 아쉬움을 표한 이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그의 실어증은 치매의 증상 가운데 하나이며, 은퇴 역시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음이 공개되기에 이른 것이다. 가족들은 팬들에게 낸 입장문에서 "지난해 실어증 진단을 받은 이후에도 병세가 계속됐다"며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명확한 진단을 받게 돼 다행"이라고 전했다.
질병 때문이기도 하지만 브루스 윌리스는 동시대를 주름잡은 유명 배우들, 이를테면 톰 크루즈와 톰 행크스, 실베스터 스텔론과 아놀드 슈워제네거, 브래드 피드 등과는 조금 다른 입지를 가졌다. 위에 언급한 배우 가운데 여럿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이나 제작 부문에서의 성과 등으로 기억하는 반면, 브루스 윌리스에 대해선 지나간 시대의 퇴물배우 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영화 <다이 하드> 포스터. ⓒ 20세기 폭스
브루스 윌리스하면, '다이 하드'
이는 브루스 윌리스의 근작 수십 편이 깊은 연기를 배제한 참담한 수준에 머물러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적잖은 어린 영화 애호가들은 그를 아예 기억조차 하지 않거나 나이 든 퇴물 배우 쯤으로 여기고는 하는 것이다. 그런 이들과 마주하여 나는 그가 한때 세계를 감동시킨 명작들의 주연이었다고 이야기하고는 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느끼는 건 그들과 나 사이 명확하게 놓인 세대의 차이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저 그렇게 잊혀서는 안 되는 배우다. 적어도 이 시리즈를 본 이들에겐 말이다.
누가 뭐래도 브루스 윌리스 하면 <다이 하드> 시리즈다. 함께 묶이는 다른 액션영화들이 커다란 근육이나 첨단의 무기를 강조하는데 반해 러닝셔츠 하나 입고 환기구를 기어가며 겨우겨우 적들을 상대하는 낭만파들의 인기영화인 것이다.
시리즈의 주인공은 뉴욕 경찰국 형사 존 맥클레인(브루스 윌리스 분)이다. 그는 이 시리즈 이후 할리우드에서 전형이라 해도 좋을 만한 캐릭터로 남는데,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언제나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현장형 형사임에도 출세에는 별다른 연이 없다. 그럼에도 제 일에 몰두하느라 가정에도 소홀하다. 저 자신과 가족조차 챙기지 못하고 오로지 공익에만 매달리는 동안 업무에서 승승장구를 거듭하는 아내는 존을 이해하지 못한다.
▲ 영화 <다이 하드> 스틸이미지. ⓒ 20세기 폭스
이 영화가 테스토스테론을 들끓게 하는 방식
그런 상황에서 존이 아내를 찾아 그녀가 일하는 회사로 오게 되고,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테러단체가 건물을 장악한 가운데, 오로지 존 홀로 이들과 맞선다. 언제나 열세에서 싸움을 시작하는 이 불굴의 형사는 그럼에도 쉽게 죽지 않는다.
이 영화가 테스토스테론을 들끓게 하는 방식은 매우 특별하다. 맨 주먹으로 상대와 격돌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형사를 숨 가쁘게 뒤따르고, 그의 강함보다는 끈질김을 강조한다. 악당들은 그보다 훨씬 강하고 치밀하며 때로 멋지기까지 한데, 모두가 포기하는 동안 오로지 보잘 것 없는 단 한 명의 사내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한 판 승부를 벌이는 것이다. 그에겐 아놀드 슈워제네거처럼 한 팔에 중화기 하나씩 들고 무지막지하게 갈겨대거나, 톰 크루즈처럼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채 예쁜 미소를 날릴 여유가 없다.
그저 늘어진 러닝셔츠 하나 걸치고 피곤에 찌든 얼굴로 이리 뛰고 저리 뛰기에도 바쁜 것이다. 이곳저곳 헤집고 뛰어 다니며 온 몸은 상처투성이에 땀에 젖은 러닝을 걸치고 헉헉대는 존 맥클레인을 보고 있자면 멋지기보단 차라리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지리도 강한 운으로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21세기 현란한 액션과는 또 다른 숨막히는 아날로그적 충격을 <다이 하드> 시리즈는 번번이 달성해냈다. 브루스 윌리스는 그렇게 아날로그 시대 액션영화의 영웅으로 남았다. 영화팬이라면 브루스 윌리스를 그가 쏟아낸 수많은 형편없는 근작들이 아니라 <다이 하드>를 포함한 지난 시대 걸작들로 기억해야만 한다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
▲ 영화 <다이 하드> 스틸이미지. ⓒ 20세기 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