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여왕' 김연아의 종목이었던 피겨 스케이팅을 비롯해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과 다이빙, 기계체조, 리듬체조 등은 기록이나 순위를 정하는 종목들 사이에서 '미'를 채점하는 올림픽 종목이다. 심사위원의 성향이나 수시로 변하는 채점 기준 등에 따라 점수가 자주 변하고 이 때문에 편파판정 시비도 자주 나오지만 관중들이 치열한 기록과 순위종목들 사이에서 마치 예술공연을 보는 듯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 의외로 이 종목들에 열광한다.

사실 관중들은 편안하게 선수들의 경기를 보고 즐기면 되지만 선수들은 올림픽 같은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길게는 10년 이상 뼈를 깎는 노력과 아픔을 감수해야 한다. 어떤 종목은 연기 도중 선수들의 표정도 채점에 포함되기 때문에 선수들은 언제나 미소를 유지하는데 사실 그 미소조차도 피나는 반복훈련을 통해 얻어진 결과물이다. 세계 정상권의 연기를 해내기 위해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 훈련과 노력을 했을지는 감히 상상하기 힘들다.

유럽의 전통 춤인 발레 역시 마찬가지. 관객석에서 바라보는 무대 위의 발레리나와 발레노들은 세상 누구보다 우아해 보이지만 그 멋진 공연을 실수 없이 완성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반복훈련이 필요하다. 지난 2010년에 개봉해 <레옹>의 마틸다로 유명한 나탈리 포트만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겼던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블랙스완>은 발레 공연의 메인이 된 주인공이 부담감 때문에 점점 광기에 휩싸이는 과정을 담은 심리 스릴러다.
 
 <블랙 스완>은 아카데미 5개 부문 후보에 올라 나탈리 포트만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블랙 스완>은 아카데미 5개 부문 후보에 올라 나탈리 포트만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 (주)영화사 그램

 
관객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감독

뉴욕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에서 문화 인류학을 전공한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화려한 국제영화제 수상경력에도 호불호가 나뉘는 대표적인 감독 중 하나다. 스타일리시한 편집과 뛰어난 심리묘사로 극찬을 받기도 하지만 영화의 분위기가 대체적으로 매우 어둡고 표현도 지나치게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평론가들과 관객들의 반응이 극단적으로 엇갈렸던 제니퍼 로렌스와 하비에르 바르뎀 주연의 2017년작 <마더!>가 대표적이다.

1998년 선덴스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파이>를 통해 데뷔한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2000년 엘렌 버스틴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시킨 <레퀴엠>을 만들었다. 2006년에는 < X맨 >의 울버린으로 유명한 휴 잭맨과 당시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동거인이었던 레이첼 바이스 주연의 <천년을 흐르는 사랑>을 연출했다. <천년을 흐르는 사랑>은 죽음과 영생, 종교적 상징이 가득한 영화로 일반 관객들이 기대하는 멜로와는 거리가 있다.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큰 주목을 받은 작품은 '80년대 스타' 미키 루크의 재기작이었던 <더 레슬러>였다.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더 레슬러>를 통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감독으로 인정 받았다.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더 레슬러>가 나온 지 2년이 지난 2010년 겨울 나탈리 포트만을 단독주연으로 내세운 발레를 소재로 한 심리스릴러 <블랙 스완>을 만들었다.

북미에서 2010년12월에 개봉한 <블랙 스완>은 단 13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 제작비의 25배가 넘는 3억29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올리며 크게 성공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또한 데뷔작 <레옹> 때부터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 받으면서도 대형시상식과는 인연이 많지 않았던 나탈리 포트만은 2011년 아카데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블랙스완>은 국내에서도 163만 관객을 모으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2014년 러셀 크로우와 제니퍼 코넬리, 엠마 왓슨 등이 출연한 <노아>와 2017년 <마더!>가 흥행성적과 별개로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크게 엇갈렸다. <마더!>이후 약 5년 동안 공백기를 가졌던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2022년 <미이라> 시리즈로 유명한 브랜든 프레이저를 270kg의 거구로 분장시킨 연극 원작의 신작 <더 웨일>을 통해 무려 11개의 국제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

우아한 발레? 사실은 고통스러 노동
 
 나탈리 포트만은 <블랙 스완>에서 백조와 흑조를 오가며 엄청난 열연을 선보였다.

나탈리 포트만은 <블랙 스완>에서 백조와 흑조를 오가며 엄청난 열연을 선보였다. ⓒ (주)영화사 그램

 
영국에서는 2000년, 국내에서는 2001년에 개봉한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발레리노를 꿈꾸는 소년의 성장스토리를 감동적으로 표현하며 제작비의 20배가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같은 '발레'를 소재로 하고 있다고 해서 <블랙 스완>을 <빌리 엘리어트> 같은 영화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블랙 스완>은 '백조의 호수' 공연에서 메인댄서를 맡은 니나 세이어스(나탈리 포트만 분)가 내면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다룬 심리스릴러이기 때문이다.

'백조의 호수' 공연에서 주인공으로 발탁된 니나는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잘해내야 한다는 강박과 발레단 단장 토마스(뱅상 카셀 분)의 압박, 딸의 성공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어머니(바버라 허시 분) 등에게 심한 부담을 느낀다. 니나는 공연이 다가올수록 거울 속에서 헛것이 보일 정도로 심한 광기에 사로 잡히고 순수했던 백조의 모습을 완전히 잃은 채 흑조로 변해가며 자기자신을 파멸로 몰아간다.

주인공 나탈리 포트만은 정상급 발레리나 니나를 연기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발레에 대한 이해도가 없는 배우가 발레리나 연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실제 발레단 주인공을 소화할 수 있는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서는 10년 이상의 훈련을 통해 발레리나에 어울리는 근육과 몸을 만들어야 한다. 이에 포트만은 <블랙 스완> 캐스팅 후 매일 발레 레슨을 받았고 9kg을 감량하며 발레리나에 가까운 몸을 만들었다.

물론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했다 해도 나탈리 포트만이 짧은 시간 안에 실제 발레리나의 움직임을 표현할 순 없었고 실제 영화 장면에서는 대역을 많이 사용했다. 물론 영화의 주제는 소심한 발레리나가 정상에 오르는 감동스토리가 아닌 주인공이 된 발레리나가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흑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화를 감상하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다. 발레장면을 제외하면 포트만의 연기는 니나의 마지막 대사처럼 '완벽'했기 때문이다.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블랙 스완>에서 발레라는 우아한 예술을 상당히 고통스러운 육체 노동으로 묘사했다. 실제로 발레는 긴 공연시간을 소화해낼 수 있는 체력과 함께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예술로 관객들이 객석에서 보는 것처럼 마냥 우아하진 않다. <블랙 스완>에서는 니나를 비롯한 발레리나들의 혹독하고 반복된 연습과정을 통해 발레라는 예술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작업 끝에 완성되는지 관객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줬다.

니나가 마음 속에서 살해까지 했던 라이벌
 
 밀라 쿠니스는 <블랙 스완>으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신인상에 해당하는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상을 수상했다.

밀라 쿠니스는 <블랙 스완>으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신인상에 해당하는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상을 수상했다. ⓒ (주)영화사 그램

 
기존 발레단의 에이스였던 베로니카(세니아 솔로 분)를 제치고 '백조의 호수' 주인공에 낙점된 니나는 신입단원 릴리를 의식한다. 니나에게 없는 자유분방함을 가진 릴리는 니나의 약점인 흑조를 잘 표현하기 때문이다. 결국 릴리는 공연을 앞두고 니나의 대역에 낙점되는데 불안함이 커진 니나는 깨진 유리조각으로 릴리를 살해한다. 하지만 릴리는 처음부터 분장실에 없었고 니나는 상상 속에서 릴리와 싸우다 자신의 배를 찌른 것이다.

본의 아니게 니나가 파멸의 길로 가는 원인을 제공한 릴리를 연기한 밀라 쿠니스는 본격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전 맥컬리 컬킨과 사귀면서 유명세를 탔던 인물이다. <블랙 스완>으로 베니스영화제 신인상을 수상한 쿠니스는 2012년 < 19곰 테드 >로 유명세를 탔고 2015년 워쇼스키 자매의 <주피터 어센딩>, 2018년에는 케이트 맥키넌과 함께 <나를 차버린 스파이>에 출연했다.

<블랙 스완>에는 90년대 초·중반을 풍미했던 할리우드 최고의 하이틴 스타 위노나 라이더도 조연으로 출연했다. 위노나 라이더가 연기한 베스는 과거 발레단의 에이스 무용수였지만 니나의 등장과 함께 단장에게 버려지고 결국 원치 않는 은퇴를 하게 되는 비운의 인물이다. 위노나 라이더가 연기한 베스는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로 명성을 날리다가 2001년 절도사건 이후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그녀의 실제 모습과 묘하게 닮아 더욱 화제가 됐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블랙 스완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나탈리 포트만 밀라 쿠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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