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썬 포스터

▲ 애프터썬 포스터 ⓒ 그린나래미디어(주)

 
튀르키예로 여행을 떠난 아버지와 딸, 이렇다 할 사건 없이 놀고 즐기는 여정이 펼쳐진다. 캠코더로 녹화된 여행의 기록들은 이십 여 년이 흐른 뒤 딸의 손에서 재생된다. 아버지는 곁에 없고 딸의 삶도 그리 즐겁기만 하지는 않은 모양, 영화는 오래 전 튀르키예에서 보낸 부녀의 여행기다.
 
이 영화를 두고 많은 해석이 오간다. 영화는 선명하지 않고 보는 시각에 따라 그렇고 그런 홈비디오 정도에 그치는 듯 지루하기 짝이 없다. 유명 평론가 몇은 감상적이며 잡히지 않는 문구로 이 영화를 극찬하곤 하는데, 해외에서 상을 받아오지 않았다면 그리 대단한 평가를 받지는 못하지 않았겠냐는 비판론도 적지만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면 줄마다 하나쯤은 무거운 눈꺼풀과 씨름을 벌이는 이를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적잖은 이들이 속 편한 여행기로부터 어딘지 찝찝한 인상을 받았다고 털어놓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대체 무엇이기에 격렬한 찬사와 시시하단 비판, 불편하단 감상이 엇갈리는 것일까.
  
애프터썬 스틸컷

▲ 애프터썬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아빠와 떠났던 20년 전 여행으로의 여정
 
영화는 캠코더를 매개로 오래된 여름의 추억을 꺼낸다. 영국인 부녀가 탄 버스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튀르키예 휴양도시로 향하는 버스에서 그들은 즐겁기만 하다. 엄마는 어디가고 아빠와 딸만 떠나왔는데 영화는 하나씩 그 사연을 짐작할 단서를 풀어놓는다.
 
서른 살 아빠 캘럼(폴 매스칼 분)은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사내다. 딸을 아끼는 듯도 하지만 사소한 일들로 마음 상하고 상처받기 일쑤인 그다. 가만 보면 그는 틈틈이 태극권을 수련하고 명상으로 스스로를 다스린다. 그 다스림 뒤엔 남보다 불안정한 심리가 자리하는 듯도 하다. 카페트를 사러 간 자리에서, 딸과 나누는 대화에서, 함께 하는 여행 순간순간에서 그는 휘몰아쳐오는 우울을 마주한다. 이혼을 하고 엄마와 잘 지내지 못하는 딸을 데리고 훌쩍 떠나온 여행은 기대만큼 즐겁기만 하지 않다.
 
열한 살 난 딸 소피(프랭키 코리오 분)는 더없이 착한 아이다. 아버지와 떠나온 여행 내내 그를 북돋는 말과 행동을 아끼지 않는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고, 아버지와 제가 겪는 여행의 순간순간을 마음 다해 즐긴다. 좀처럼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으려는 절제며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는 성숙함이 보기 드문 아이임을 알게 한다. 때로는 아버지보다 딸이 더 어른스럽게 느껴질 정도.
 
애프터썬 스틸컷

▲ 애프터썬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아빠는 왜 그리도 지쳐보였을까
 
튀르키예에서 보낸 며칠의 여행 동안 영화는 이들의 일상을 섬세하게 짚는다. 이십 년이 넘어서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순간들과 그 순간을 매개로 살아나는 기억들이 보는 이를 서른 살 아빠와 열하나 딸의 추억 속으로 이끈다.
 
흥미로운 건 영화가 꽤나 우울한 분위기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아버지와 딸의 치유와 휴식의 여행처럼 보이지만 영화 내내 감도는 기묘한 분위기는 우울의 정서를 띄고 있는 것이다. 카펫을 사러 간 자리에서 헤어진 아내의 이야기를 하는 캘럼과, 아무도 없는 상점 바닥에 드러누운 그의 모습, 제 열한 살 생일의 슬픈 기억을 털어놓는 과정이며, 딸을 찾으러 나왔다가 바닷가에 몸을 던지던 장면까지가 가벼운 우울을 넘어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영화 도중 짧게 교차편집 된 클럽 신이며 소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스무 살 된 청년들의 태도 역시 불편하고 이질적인 감상을 남긴다. 이 같은 장면은 러닝타임이 지속되며 조금씩 더 많은 단서를 흘리게 되는데, 캘럼의 앞에서 춤을 추는 건 여자가 아닌 남자이고 소피 역시 여행 도중 몰래 키스를 나누는 남자들을 마주보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소피가 어느 언니에게 듣는 대사는 무척이나 강한 인상을 남기는데, 그건 남자애들은 죄다 쓸모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로부터 이십 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소피는 다른 여자와 침대에서 함께 일어나니, 샬롯 웰스 감독의 이 같은 설정이 명확하진 않을 지라도 그저 우연한 일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애프터썬 스틸컷

▲ 애프터썬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겉보기엔 아름답고 들여다보면 힘겨운
 
겉으로 보면 아버지와 딸이 멀리 떠난 여행에서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고 돌아오는 평안한 여행기로 비친다. 그러나 곰곰이 들여다보자면 이 영화는 아버지의 우울과 결핍이 시간을 뛰어넘어 더없이 해맑았던 아이에게 전승되는 답답한 드라마로 보이기도 한다.
 
특히 '애프터썬'이란 제목은 영화 도중 잠시잠깐 지나가는 아버지의 화상이며 그가 수차례 딸에게 선크림을 발라주던 장면과 어우러져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말하자면 'after sun'은 화상을 뜻하는 말로 흔히 쓰이는데, 관계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인간이 보호막 없이 화상을 입는 경우처럼 우울이며 결핍에 함락되고 만다는 사실과 마주 닿는다.
 
결국 이십 년 뒤 소피의 방에 깔린 아버지의 카펫처럼, 아버지가 그랬듯 그녀 역시 동성애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듯하며(동성애가 결핍의 결과처럼 활용되는 게 타당한가의 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이를 통해 비추어볼 때 소피의 삶에도 아버지가 남긴 우울이며 결핍이 전승되어 있는 듯 보인다.

마음이 맞던 아버지는 더는 그녀의 삶 가운데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소피는 더는 예전처럼 활짝 웃지 못한다. 그럼에 이 영화는 겉보기처럼 그저 아름다운 과거를 추억하는 예쁘장한 영화로만 남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영화가 남긴 우울과 결핍의 단서가 너무나 답답하여 나는 차라리 이 모두가 <애프터썬>에 대한 나의 오독이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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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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