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한국 대중가요를 선곡해 들려주는 라디오 음악방송 작가로 일했습니다. 지금도 음악은 잠든 서정성을 깨워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날에 맞춤한 음악과 사연을 통해 하루치의 서정을 깨워드리고 싶습니다.[편집자말]
 크라잉넛 <서커스 매직 유랑단> 앨범 이미지

크라잉넛 <서커스 매직 유랑단> 앨범 이미지 ⓒ KM Culture

 
'경록절'이라는 명절을 들어본 적 있나. 누군가는 '그게 뭔데?'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겠지만 우리나라 대중가요를 조금이라도 아끼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단어일 것이다. 지난 주말 홍대 인근은 이 '경록절'의 열기로 오랜만에 떠들썩했을 것이고. '경록절'이라는 아주 신박한 가요계의 명절을 고안하고 이끄는 이는 그 이름에서 다들 짐작하셨겠지만 대한민국 밴드 크라잉넛의 멤버 한경록이다.

아니 '부처님'이나 '예수님'처럼 최소한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정도의 성인은 돼야 자신의 이름을 만방에 알리며 기념하는 것인데, 벌써 18여 년 너무나 떳떳하게 멤버의 생일을 기념해 한판 난장을 벌인다니 참 놀라운 밴드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물론 그들의 음악을 듣거나 음악을 뛰어넘는 퍼포먼스를 보게 되면 왜 이런 '자신감'이 생겨나게 됐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될 수밖에 없지만.

오랜만의 대면 공연이라 이번에는 생일 하루만이 아닌 닷새 동안, 그것도 '마포 르네상스'라는 거창한 종합예술축제로 이어졌다고 하는데, 이 소식을 접하면서 왠지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었다. 이는 대중가요와 홍대 인디 신의 '르네상스'를 꿈꾸는 그들의 꺾이지 않는 열정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노래 '서커스 매직 유랑단'에 얽힌 의외의 사건, 그러니까 실은 잠시 잊고 있었던 기상천외했던 사건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때는 2000년 초, 장소는 시내 중심가에 자리한 노래방으로 기억된다. 남편의 지인 부부들 몇과 함께 저녁을 먹고, 2차로 자리를 옮긴 참이었다. 당시만 해도 2차는 무조건 노래방이라는 공식이 있었기도 했고, 오랜만에 모인 자리라 일찍 파하기도 섭섭한 마음에 다들 흔쾌히 서로 부를 노래가 겹치지 않도록 순서를 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나는 마음이 좀 불편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남편이 노래 부르는 것을 썩 내켜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자타가 공인하는 '음치'에다 '박치'였기 때문에 사실 노래방 문화를 썩 즐기지 않는다. 오히려 피하는 편이 맞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어쩌다가 그것도 할 수 없이 자신이 불러야 할 차례가 오면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부르는데, 거기엔 그 어떠한 선택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남편이 그나마 노래가사를 화면으로 보지 않고 끝까지 부를 수 있던 노래는 딱 한 곡, 남진의 '님과 함께' 였으므로. 맞다, '저 푸른 초원 위에'로 시작하는 197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겐 마치 국민가요 격인 그 노래 말이다.

이날도 지인들이 한 사람씩 돌아가며 멋들어진 가창력과 함께 노래방을 장악할 동안 구석에 앉은 남편은 애꿎은 탬버린만 만지작만지작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여보, 이제 곧 당신 차롄데, 준비해야지. 오늘도 '님과 함께' 맞지?"
"아이다, 잠시만 기다리 봐라, 여기에 혹시 그 노래 있을라능가?"


너무나 뜻밖의 반응이었다. 남편이 노래방에서 부를 노래가 '님과 함께'가 아니라니!

"뭔데? 무슨 노래길래 그렇게 뜸을 들여?"
"거, 크라잉넛 노랜데. 내가 제목을 잘 모르겠다. '매직 서커스'인가, 뭔가 그렇다. 좀 찾아 도!"


'세상에나, 남편이 크라잉넛을 안다고? 그리고 이 어려운 노래를 부르겠다고?' 마음의 소리는 그를 어떻게든 말려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왠지 내 손은 그가 원하던 노래 '매직 서커스 뭐'가 아닌 '서커스 매직 유랑단'을 정확하게 찾아내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그 후 그야말로 크라잉 랩을 하듯 첫 소절을 부르던 남편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것은 전에 보지 못한 비장함이었다.
 
 노래방마이크 이미지

노래방마이크 이미지 ⓒ 픽사베이

 
"안녕하세요. 오늘은 김 선생이랑 같이 나왔어요.
아이고 김 씨 아저씨도 나오셨네요.
아랫마을에 장이 서서 서커스가 왔대요.
아 그럼 우리 한번 가 볼까요. 아이고 장에 나오니 사람 참 겁나게 많네요.
글쎄 서커스단 이름이 뭐래요. 서커스매직 유랑단이래요.
오오! 요기조기 모여보세요. 요것조것 골라보세요.
우리들은 서커스 매직 유랑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우린 매직 서커스 유랑단 임 찾아 꿈을 찾아 떠나간다우
동네집 계집아이 함께 간다면 천 리 만 길 발자욱에 꽃이 피리라.
우리는 크라잉넛 떠돌이신사 한 많은 팔도강산 유랑해 보세.
마음대로 춤을 추며 떠들어 보세요. 어차피 우리에겐 내일은 없다.
오늘도 아슬아슬 재주 넘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내가 곰이네.
난장이 광대의 외줄 타기는 아름답다 슬프도다 나비로구나.
우리는 크라잉넛 떠돌이 신사 한 많은 팔도강산 유랑해 보세.
마음대로 춤을 추며 떠들어 보세요. 어차피 우리에겐 내일은 없다.
커다란 무대 위에 막이 내리면 따뜻한 별 빛이 나를 감싸네.
자줏빛 저 하늘은 무얼 말할까. 고요한 달그림자 나를 부르네.
떠돌이 인생 역정 같이 가보세. 외로운 당신의 친구 되겠소.
흥청망청 비틀비틀 요지경 세상, 발걸음도 가벼웁다 서커스 유랑단.
오늘도 아슬아슬 재주넘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내가 곰이네.
난장이 광대의 외줄 타기는 아름답다 슬프도다 나비로구나.
우리는 크라잉넛 떠돌이신사 한 많은 팔도강산 유랑해 보세
마음대로 춤을 추며 떠들어 보세요. 어차피 우리에겐 내일은 없다. 
떠돌이 인생역정 같이 가보세. 외로운 당신의 친구 되겠소.
흥청망청 비틀비틀 요지경세상 발걸음도 가벼웁다 서커스 유랑단 헤이."
- 크라잉넛 '서커스 매직 유랑단' 가사


워낙 길기도 길지만 좀처럼 따라 부를 수 없이 어려운 변환이 잦은 멜로디에다 심오함이 깃든 가사까지. 이 노래야말로 크라잉넛의 오리지널로만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늘~ 생각해 왔었는데 음치에다 박치인 남편은 이 노래를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것도 어깨춤을 곁들인 과한 발동작과 함께. 노래가 점점 더 절정으로 치닫자 남편의 이런 모습을 처음 봐 당황했던 지인들의 눈은 더 똥그랗게 확대되는 게 아닌가.

"이 노래 뭐고? 뭔데 이래 재밌노?"
"아따! 이런 노래도 다 알고, 청춘이다잉. 멋있네."


듣는 이들의 반응이 기대를 뛰어넘자 음정과 박자를 놓친지도 몰랐던 남편의 얼굴이 황홀경으로 붉게 달아오르는 게 보였다. 그가 노래에 이처럼 진심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를 끝내겠다는 의지도 언뜻언뜻 내비치면서.

그날의 데뷔 무대 이후 남편의 노래방 최애곡이 남진의 '님과 함께'에서 크라잉 넛의 '서커스 매직 유랑단'으로 바뀌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때로는 듣기 지겹다고 말려도 그는 노래방을 들어서는 즉시 예약곡으로 이 노래의 번호를 누르고 신나게 한 판 잘 놀아볼 결심을 하는 것이다.

음악방송을 오래 맡아온 아내 덕분에 듣는 귀는 그나마 있었다고 하지만, 전혀 그의 취향이 아닐 것 같았던 노래를 그것도 일반인이 완성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노래를 부를 생각을 했다는 게 워낙 신기해서 언젠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니 당신 어떻게 이리 어려운 노래를 불러 볼 생각을 했어?"
"아~ 일단은 노래가사가 마음에 좀 와닿던데? 그라고 뭐라카노, 이 노래를 가만히 들어 보니까 나처럼 음정박자 잘 못 맞추는 사람도 신나게만 부르면 될 것 같더라고. 당신도 봤잖아. 이 노래 불러가 100점 받은 거."


'서커스 매직 유랑단'의 무엇이 노래방이라면 손사래를 치던 남편마저 노래 부르게 만들었을까, 요즘도 이 노래를 부를라치면 이제 그 옛날에 비해 많이도 삐그덕거리는 몸을 최대한 움직여가며 걸지게 한 판 놀아보는 남편이다. 자신의 흥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노래를 부르는 동안 희열에 가득 찬 얼굴로 즐거움에 젖기도 한다. 그만의 '비상구'가 이 노래 한 곡으로 열리는 것이다.

노래는 이런 것이다. 한 사람의 감정을 일시에 흔들고, 그이의 감정이 만드는 또 다른 세계를 눈앞에 펼쳐주어야 한다. 남편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던 '서커스 매직 유랑단'을 처음 듣고 노래의 '신세계'를 만났다 고백한 것처럼 어느 노래는 몰랐던 세상, 한 사람만의 우주를 각각의 누군가에게 만들어 전해 줘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흥과 끼를 발산할 수 있는 에너지를 생성시켜 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고.

올해 '경록절'이 몇 년 만에 성대하게 마무리되었다니 덕분에 때 아닌 감염병 쇼크로 많은 것들이 지지부진하던  젊음의 거리마다 크라잉넛이 꿈꾸는 음악, 더 나아가 문화의 '르네상스'가 폭발적으로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러면 한동안 잠자고 있던 남편의 유일무이한 레퍼토리 '서커스 매직 유랑단'이 어느 공간에선가 다시 꿈틀거리는 시간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혜원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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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음악방송작가로 오랜시간 글을 썼습니다.방송글을 모아 독립출간 했고, 아포리즘과 시, 음악, 영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에 눈과 귀를 활짝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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