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대행사> 한 장면

JTBC 드라마 <대행사> 한 장면 ⓒ JTBC

 
JTBC 토일 드라마 <대행사>에서 광고기획사 카피라이터로 등장하는 은정(전혜진 분)은 유능한 워킹맘이다. 문제는 직종의 특성상 야근을 밥 먹듯이 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아들과 보낼 시간이 적다는 데 있다. 5살 아들은 바야흐로 '지랄 총량의 법칙'을 유년기에 다 쏟아부을 작정인 양, 엄마 은정에게 받아주기 힘든 요구를 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을 돌보라는 것. 어린 아들의 애원-강요-협박에 이른 사직 요구에 은정은 마침내 직장을 그만 둘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은정이 서 있는 딜레마(일을 따르자니 아이가 울고, 아이를 따르자니 커리어를 망치는)는 이 시대 육아하는 모든 워킹 맘들이 겪는 어려움이다. 은정의 수난을 보다가, 신망받던 뉴질랜드 전 총리 저신다 아던의 사퇴 소식이 생각났다. 그는 2019년 3월 뉴질랜드에서 발생한 이슬람 극우파의 테러 현장에 히잡을 두르고 나타나, 피해자에 대한 애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품위 있게 보여주었던 지도자다. 포용적이면서도 담대한 리더십이 단박에 화제가 되며 세계인들은 물론 내 마음도 사로잡았다. 참 멋진 여자구나 했다.
 
그런 그가 결국 총리직을 수행할 더 이상의 에너지가 없다며 전격 사퇴를 선언했을 때, 실망보다는 짠한 마음이 더 컸다. 힘들었구나. 사퇴의 변 마무리에 5살 된 딸에게 '학교 입학 때 함께 있을 수 있다'고 전했다. 이 메시지 만으로 그가 모성 수행만을 위해 전격 사퇴한다고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남성 정치인이 이런 고민을 동반하며 사퇴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유능한 정치인도 엄마 역할의 고됨에서 빗겨 나기 어려운 현실이다. 
 
나는 은정의 퇴사결심에 "은정씨 그만두면 안 돼"하며 안타까워했지만, 드라마를 같이 시청하던 남편은 '애 키우고 다시 나가면 되지' 하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같이 일하면서 나 혼자 발 동동 구르며 육아하다 결국 일을 접었던 역사를 읊어줄까 하다가 관뒀다. 내 입만 아프다.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 은정이 토로하는 진퇴양난에 '나도요 나도요' 하며 여기저기서 엄마들의 공감이 튀어나온 것은, 대부분의 워킹맘들이 은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임을 드러낸다. 고난을 이겨내며 은정이 파이팅 했으면 했다가도, 너무 힘들었던 그때 그 시절의 내가 생각나 은정이 안쓰러워졌다.
 
독종 여성 성공 서사에 가려진 진실
 
 JTBC 드라마 <대행사> 한 장면

JTBC 드라마 <대행사> 한 장면 ⓒ JTBC

 
드라마에는 은정이 엄마로서 겪는 곤경과 전혀 상관없는, 은정이 던지려던 사표의 내막도 전혀 궁금하지 않은, 냉정한 싱글 상사 고아인(이보영 분)이 등장한다. 유리천장을 뚫은 커리어 우먼을 그리는 클리셰대로, 그는 매사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냉정을 유지하며 독설과 냉소를 내뿜는다. 그의 독기는 그를 이 회사 최초 여자 임원을 만들게 한 일등공신이다.
 
이제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올랐으니 신경정신과 약에 의존하지 말아야지 결심하지만, 여자에게 세상은 유리천장을 뚫고 입성했어도 적이 도사리고 있는 전쟁터다. 회사 최초로 여자 상무가 되었지만, 알고 보니 회사 오너가의 짜인 각본대로 잠시 배역을 맡은 1년짜리 상무이지 않은가. 능력과 실적으로 치자면 상무 자리에 올라도 손색없는 인재지만, 지방대 출신임을 조롱해 "상무 될 스펙은 아니"지 않냐며, "욕심부리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막말 수모까지 당한다.
 
고아인은 살아남기 위해 다시 투지를 불태워야 한다. 연료는 그의 가방에 들어 있은 수 개의 향정신성 약들이다. 그가 의지할 가족 없이, 탈 날 걱정 없는 험담을 토로할 친구 하나 없이 유리천장을 뚫을 수 있었던 건, 그의 가방에 들어있는 약들 덕이었던 셈이다.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 알고 보니 인간으로서의 삶은 불행하다는 서사를 예고하는 방식이다.
 
드라마가 성공하는 여자를 그리는 방식은 대체로 이렇다. 우선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다. 다음은 모난 성격으로 공감 능력 전무하고 잔인할 정도로 냉철하다. 그리고 알고 보면 그에겐 성공하지 못하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다고 믿어온 사랑받지 못한 내면의 아이가 있다. 대체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수난을 겪거나 학대받으며 자랐지만, 불굴의 의지로 난관을 극복했다는 자기 계발 서사에 딱 들어맞는 방식 말이다.
 
 JTBC 드라마 <대행사> 한 장면

JTBC 드라마 <대행사> 한 장면 ⓒ JTBC

  
드라마 속 고아인은 어릴 적 엄마에게 버림받아 고모 손에 눈칫밥 먹으며 자랐고 지방대 출신이다. 그런 그가 유리천장을 뚫은 것이다.
 
개천에서 용 되는 서사가 40대 초반 고아인 세대에도 통용된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무엇보다 성공한 여성을 그리는 방식이 너무 상투적이다. 독하기로 작정하고 일에 매진하지만 실은 약에 의지해 성공했다는 설정 또한 과연 얼마큼의 개연성이 있을까. 저 정도로 먹는 게 거의 없고 잠도 못 자며 향정신성 약을 장복하고, 사람에게 온기를 느끼지 못하면서 고독을 연료 삼아 살아간다면 성공은커녕 온전히 살아남기도 힘들 것이다.
 
성공하기 위해 처절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 앞선 여성들의 수난사를 모르지 않는다. 그런 여성들이 조금이라도 성공 사례를 만들었기에 유리천장을 힘겹게나마 뚫고 올라섰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성공한 극소수의 여성이 보통 여성들의 삶의 질을 동반 향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들이 저 계급 여성들의 더 나은 삶을 견인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연대의 노력은 드물다. 즉 극소수 특별한 여성의 성공 미담은 여성에게도 살만한 세상이 되었다는 착시를 안길 뿐, 저임금에 시달리는 대부분의 비정규직 여성들의 삶과는 무관하다.
 
 JTBC 드라마 <대행사> 한 장면

JTBC 드라마 <대행사> 한 장면 ⓒ JTBC

 
어릴 때 받은 상처로 성공하지 못하면 사람들에게 버림받을까 봐 약물중독자가 될지언정 성공에 집착한다는 드라마의 전제는 이 시대 수많은 여성들의 무엇을 대변할 수 있을까.

어릴 때 부모에게 버림받았다고 해서 모두가 내면의 불행한 아이를 붙든 채 정신질환을 겪는 것은 아니다. 힘든 나름대로 존엄을 지키며 자신의 길을 가는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또한 타인의 잣대로 판결되는 사회적 성공 대신 '워라밸'이나 '욜로'를 추구하며 나름의 만족을 좇아 살아가는 여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이런 현상이 무조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무조건 참혹한 성공을 좇는 사례 또한 이 시대의 여성 성공 서사로 긍정되기 어렵다.
 
최선을 다했다면 물러남도 삶의 방식으로 족하다. 은정도 아인도, 피눈물 철철 흘려가며 성공만을 좇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윤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대행사> 여성 성공 서사 워킹 맘 내면의 아이 저신다 아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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