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삼 감독은 홍콩 누아르 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감독이다. 물론 오우삼 감독이 홍콩 누아르 영화의 시작을 알린 감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오우삼 감독이 연출한 <영웅본색>을 시작으로 음울한 분위기의 홍콩 뒷골목을 배경으로 한 범죄영화들이 홍콩은 물론이고 아시아 전역에서 폭발적인 사랑을 받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우삼 감독은 1990년대 중반 할리우드에 진출해 영화의 본고장에서도 유의미한 성과를 남겼다.

흔히 감독들에게는 고유의 특징을 나타내는 '시그니처 아이템'이 영화 속에 등장하곤 하는데 관객들에게도 매우 유명한 오우삼 감독의 '시그니처'는 바로 쌍권총 액션이다. 쌍권총은 오우삼 감독 액션의 상징과도 같은 아이템으로 오우삼 감독의 '페르소나' 주윤발은 대부분의 영화에서 쌍권총 액션을 선보였다.심지어 <페이스 오프>나 <미션 임파서블 2>처럼 오우삼 감독이 연출한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여지없이 쌍권총 액션이 등장했다.

하지만 유독 이 영화에서만큼은 여느 누아르 영화 못지 않게 많은 총격 장면이 등장함에도 쌍권총 액션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이 작품은 진지하다 못해 음울한 영화들로 가득 찬 오우삼 감독의 필모그라피에서 몇 안 되는 경쾌한 장르의 영화이기도 하다. 바로 전성기 시절의 주윤발과 고 장국영, 그리고 미스홍콩 출신의 미녀배우 종초홍이 주연을 맡은 홍콩버전의 케이퍼 무비 <종횡사해>였다.
 
 <종횡사해>는 심각하지 않은 오우삼 감독의 영화도 관객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작품이다.

<종횡사해>는 심각하지 않은 오우삼 감독의 영화도 관객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작품이다. ⓒ 조이앤클래식

 
금품 훔치는 과정 보여주는 케이퍼 무비

주인공 무리가 돈이나 귀중품을 훔치는 과정을 자세하게 보여주는 범죄영화를 흔히 '케이퍼 무비'라고 부른다. 각 분야에서 전문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인물들이 고유의 임무를 맡아 범죄를 계획하고 은행이나 박물관처럼 보안이 철저한 곳이 범죄 목표로 설정된다. 하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대로 범죄가 성공하면 영화의 재미가 떨어지기 때문에 유능한 경찰이 등장하거나 무리 중 배신자가 나타나 계획에 차질을 빚곤 한다.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 로버트 쇼가 주연을 맡은 1973년작 <스팅>은 케이퍼 무비의 원조로 꼽히는 작품으로 훗날 많은 케이퍼 무비들이 이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 <내일을 향해 쏴라>의 고 조지 로이 힐 감독과 폴 뉴먼, 로버트 레드포드가 4년 만에 다시 뭉친 <스팅>은 세계적으로 1억 56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또한 1974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을 비롯해 무려 7개 부문을 휩쓸었다.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 맷 데이먼 등 호화 캐스팅을 자랑했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범죄 3부작 <오션스> 시리즈 역시 2000년대를 강타한 대표적인 케이퍼 무비다. 3편까지 주요인물이 그대로 출연했고 세 편 합쳐 11억 2300만 달러의 성적을 기록할 정도로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다. 하지만 지난 2008년 프랭크 캐턴 역의 고 버니 맥이 세상을 떠나면서 더 이상의 속편 제작은 무산되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최동훈 감독이 케이퍼 무비의 대가로 유명세를 떨친 바 있다. 지난 2004년 장편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을 통해 사기꾼들이 한국은행의 돈을 훔치는 이야기를 만들었던 최동훈 감독은 2012년 제목부터 노골적으로 케이퍼 무비라고 광고하는 듯한 <도둑들>을 연출했다. 각 분야의 전문도둑들이 뭉쳐 거대 다이아몬드를 훔치는 이야기인 <도둑들>은 전국 1290만 관객을 동원하며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전통적인 케이퍼 무비라고 구분하긴 힘들지만 경찰들의 은행강도 모의훈련을 소재로 만든 블랙코미디 <바르게 살자> 역시 케이퍼 무비의 형식을 채용했다. 강력계 형사였지만 도지사의 비리를 조사하다 교통과로 좌천된 정도만 순경(정재영 분)은 서장으로부터 강도 역에 '최선을 다하라'는 명령을 받으면서 실제 강도에 빙의해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한다. 참신한 소재의 <바르게 살자>는 전국 210만 관객으로 흥행에도 성공했다.

오우삼 감독이 어깨에 힘 빼고 만든 영화
 
 세 명의 도둑콤비가 주인공인 <종횡사해>에서는 오우삼 감독의 시그니처인 쌍권총 액션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세 명의 도둑콤비가 주인공인 <종횡사해>에서는 오우삼 감독의 시그니처인 쌍권총 액션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 조이앤클래식

 
<종횡사해>는 오우삼 감독이 1990년 <첩혈가두>를 만든 후 1992년 <주윤발의 첩혈속집>(원제는 <날수신탐>)을 만들기 전,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연출한 경쾌한 느낌의 범죄액션영화다. <영웅본색>의 콤비 주윤발과 장국영이 <영웅본색 2>이후 4년 만에 다시 호흡을 맞췄고 <가을날의 동화> <타이거맨> <팔성보희> 등 주윤발과 여러 작품에 함께 출연했던 종초홍이 매력적인 여주인공 홍두를 연기했다.

<종횡사해>는 <영웅본색>이나 <첩혈쌍웅>에 비해 영화의 색깔이 많이 가벼워지면서 누아르 영화처럼 비장한 장면들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두 주인공 아해(주윤발 분)와 제임스(장국영 분)는 총알이 빗발치는 장면에서도 서로 장난스럽게 사인을 주고 받으며 다음 작전을 짠다. 물론 <영웅본색>이나 <첩혈쌍웅> 같은 비장함이 없을 뿐, 오우삼 감독이 연출한 영화인 만큼 <종횡사해>에서도 상당히 많은 분량의 액션이 등장한다.

<종횡사해>는 국내에서도 오우삼 감독과 주윤발, 장국영의 높은 인지도 덕분에 서울에서만 28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특히 영화 중반 등장하는 보안 레이저를 춤을 추듯 피해가는 장면은 훗날 할리우드 영화 <오션스 트웰브>와 <엔드랩먼트>에서 오마주했을 정도로 <종횡사해>를 대표하는 명장면이다. 주윤발이 휠체어를 타고 종초홍과 춤을 추는 장면 역시 <종횡사해>의 백미.

영화 중반 위기에 빠진 제임스를 구하기 위해 차를 질주해 보트로 뛰어들다 보트 폭발로 하반신이 마비된 아해는 몸이 불편해진 자신을 무시하는 사부(증강 분)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참고 견딘다. 아해는 영화 후반 그림을 회수하러 온 사부의 총에 맞고 생을 다하는 듯했지만 사실 가짜 깁스와 방탄조끼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아해는 결정적인 순간 휠체어를 박차고 나와 멋진 드롭킥으로 사부를 공격하면서 그의 악행을 막아냈다.

<천녀유혼>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국내에서 음료 CF까지 찍었던 왕조현에 비해 종초홍은 상대적으로 국내에서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주윤발과 여러 작품을 함께 했지만 국내에서 큰 사랑을 받은 작품에는 출연하지 않았다). <종횡사해>에서 빼어난 미모와 매력적인 연기를 선보인 종초홍은 <종횡사해>를 통해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크게 올랐지만 같은 해 결혼을 하면서 30대 초반의 나이에 일찍 영화계를 떠났다. 

세 주인공에게 기술과 인성 가르친 두 어른
 
 고 증강 배우는 <종횡사해>에서 세 주인공을 도둑으로 키우는 못된 어른으로 출연했다.

고 증강 배우는 <종횡사해>에서 세 주인공을 도둑으로 키우는 못된 어른으로 출연했다. ⓒ 조이앤클래식

 
부모님 없이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아해와 제임스, 홍두는 양아버지인 사부에게 어린 시절부터 도둑질을 배웠고 사부는 이들을 전문 도둑으로 만들면서 부를 축적했다. 도둑으로 살아가는 것에 회의를 느낀 홍두가 아해와 제임스에게 도둑일을 그만두자고 제안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배운 게 도둑질' 밖에 없었던 아해와 제임스는 자신들이 할 줄 아는 유일한 재주를 포기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아해와 제임스에게 고가의 그림을 훔치게 한 후 그들을 위험에 빠트린 사부는 끝까지 세 주인공을 이용하다가 휠체어에서 떨어지면서 다리를 크게 다치고 경찰에게 체포된다. <종횡사해>의 빌런 사부를 연기한 고 증강은 1950년대부터 60년 넘게 현역으로 활동한 홍콩의 원로배우로 <영웅본색>과 <첩혈쌍웅> <폴리스 스토리 3> <러시아워 2> < 007 어나더 데이 > 등 여러 영화에 출연하다가 2022년 4월 향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증강이 연기한 사부가 악역을 맡았다면 주강이 연기한 경찰간부는 어린 시절 아해와 제임스, 홍두가 빵을 훔치는 것을 보고 이들을 붙잡아 따뜻한 식사를 사주면서 좋은 인연으로 만났다. 마지막에 다리를 다친 사부에게 수갑을 채운 인물도 주강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던 주강은 <첩혈쌍웅>에 출연해 홍콩금장상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당시 수상자는 훗날 대배우가 되는 양조위였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종횡사해 오우삼 감독 주윤발 종초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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