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프터썬> 포스터.

영화 <애프터썬> 포스터. ⓒ 그린나래미디어㈜

 
필설로 '형언하기 힘든' 영화의 탄생
 
무엇인가 목격했는데 타인에게 내가 보고 들은 걸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 답답해진다. 감상에 대해 온전하게 소화하지 못했거나 그 대상이 텍스트로 전달하기 어려운 경우다. 영화라는 영상예술은 그 공감각적 형태 덕분에 유독 그런 경우가 적잖은데, 그런 대상을 만날 때마다 곤혹스러워지곤 한다. 이 영화 <애프터썬>과의 접촉이 딱 그랬다.
 
줄거리를 설명하자면 정말 몇 줄 되지 않는다. 주인공 소피는 20여 년 전 아빠와 함께했던 여름날의 터키 여행을 기록했던 캠코더를 꺼내 저장된 영상을 확인한다. 소피가 응시하던 LCD 액정은 스크린 밖 관객들이 지켜보고 있을 화면으로 전환된다. 그 안에 소피의 기억이 넘실대며 전달되기 시작한다.
 
<애프터썬>은 '형언하기 어려운' 영화다. 분명히 나는 이 영화를 보기는 했는데도 그렇다. 이야기는 이제 조숙한 사춘기 초입에 접어들락 말락 하던 시절의 주인공 소피가 아빠 캘럼과 오랜만에 단둘이 함께한 여름 터키여행 중 며칠 동안의 기억이 거의 전부다. 둘은 여름철 성수기 관광지에 들른 가족들이 겪게 되는 전형적인 상황에 처하고 다른 이들과 비슷한 경험을 치른다. 캠코더는 가족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21세기 이후 광범위한 전성기를 누렸던 기계다. 딱히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설정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는 주목할 지점이 없는 걸까? 물론 아니다. 그랬다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을 테다. 그렇지만 서두에 언급하던 것처럼 <애프터썬>은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의 선이 새벽이슬 응결되어 이파리에 맺히듯 정체를 슬쩍 드러냈다 금방 사라져버리는 그런 영화에 속한다. 음식에 비유하자면 초심자가 오리지널 평양냉면 국물 처음 들이켜고 당황스러워하는 체험 격이다.
 
영화는 큰 줄기를 이루는 소피와 캘럼 부녀의 단출한 가족여행 파트에 성인이 된 소피의 짧은 회상 파트, 그리고 별다른 맥락 없이 순간 툭 튀어나오는 아빠 캘럼이 홀로 어둑한 클럽에서 무아지경에 몸을 맡긴 찰나 파트의 조합이다. 메인 파트인 가족 여행이 줄거리 뼈대를 이루고 나머지 두 파트는 중간 중간 단막 처리를 해주기 위한 엑스트라 씬 형태에 가까운 느낌이다.
 
젊은 아빠와 조숙한 딸의 '튀르키예' 여행이 남긴 기록
 
 영화 <애프터썬> 스틸 이미지.

영화 <애프터썬>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10대 초반에 들어선 딸 소피는 오랜만에 아빠와 여행 중이다. 아빠 캘럼은 모르는 이들이 보기엔 나이 터울이 좀 많이 나는 남매 사이로 보일 정도로 젊은 아빠다. 엄마는 이 여행에 함께 동행을 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설명되진 않지만 소피 부모는 이혼했거나 별거 중인 것으로 묘사된다. 이들 부녀는 평소에 거의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기에 이번 여행에 제법 기대가 커 보인다. 하지만 둘의 여행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모 OTT 드라마의 명대사에서 회자되는 항공기 내 계급구도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도 '이코노미' 좌석으로 말이다.
 
부녀는 관광버스에 타고 패키지여행 티가 팍팍 나는 투어코스에 따라 판에 박힌 유원지와 명승지를 이동하는 여정을 치른다. 숙소에 도착하니 트윈베드로 예약해둔 침실은 행정착오로 더블베드 방이고 해결은 요원한 식의 상황이 연거푸 펼쳐진다. 일등급 숙소에 비즈니스 고객이라면 일어나기 힘든 경우일 테다. 그런 사연이 내내 속출하다 보니 아빠는 쫓기듯 내내 불안초조하다. 정작 딸 소피는 아쉽기는 해도 크게 개의치 않는데 말이다.
 
사이가 나쁘진 않아 보여도 일상생활 소통이 부족해 보이는 부녀관계 때문에 어렵게 기획한 가족여행이 망쳐질까 염려가 가득해뵈는 캘럼은 그리 넉넉하지 못한 여행자라는 자격지심 탓 더 안절부절 모양새다. 여행지 선정도, 그들에게 제공되는 서비스 수준도, 응당 평소보다 호기롭게 지불하게 되는 경비 지출도 젊은 아빠는 고심을 해가며 딸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으려 한다. 그들이 여행지에서 처한 빡빡한 상황은 딸 소피가 함께 어울리던 청소년 무리 중 소녀의 호의로 건네받은 자유이용권 서비스를 이용하며 환희에 찬 즐거운 표정으로 극대화된다.
 
너무 일찍 아빠가 된 존재가 겪는 불안
 
물론 이들 부녀는 관계가 원만한 편이다. 딸은 아빠와 격의 없이 대거리도 하고 현실남매 같은 순간들도 종종 마주한다. 그러나 소피의 눈(그리고 그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관객의 눈)에 내내 비춰지는 아빠 캘럼은 불안하고 자신감 없는 젊은이의 전형이다. 작품 속에서 줄곧 엿보이는 음울한 표정과 점점 빈번하게 표현되는 충동적인 방황들은 딸에게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긴 해도 스스로 만족하고 자신감을 얻지 못하는 그가 지금껏 살아온 인생의 궤적을 엿보게 만든다.
 
그는 고향 스코틀랜드에 정착하지 못했고, 소피를 탄생시킨 어린 나이에 출발했던 결혼생활도 유지하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이루는 데도 성공하지 못한 상황이다. 특별히 일탈을 저질렀거나 게으름 같은 부덕도 없어 보임에도 자신에게나 주변 사람들에게나 당당하게 서지 못한 채 자신이 한때 꿈꿨을 삶과는 거리가 먼 현실에 옥죄이는 존재다. 그래서 늘 우울하고 망설이는 표정이다. '슬픈 광대'를 형상화한 그런 캐릭터라 할까. 터키로 여행지를 고른 것도 아마 현실적으로는 주머니 사정 때문일 테다. 거리가 아시아나 아프리카처럼 아주 멀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물가나 경비가 저렴한 곳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딸에게 내세우는 명분은 늘 흐린 고향과 다르게 햇빛이 찬란하게 쏟아지는 동네란 이유에서다.
 
소피는 그런 아빠와 친해지고자 하는 십대에 들어선 소녀다. 그 나이에 외국 여행은 모든 게 낯설고 신기한 첫 번째 경험들일 테다. 그런 신나는 찰나 속에서도 친하고 헌신적인 것 같지만 결정적인 최후의 벽이 보이지 않는 장막처럼 들어선 아빠와의 관계가 신경 쓰인다. 그냥 얼른 아빠와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정작 아빠인 캘럼은 초장부터 딸 마음은 몰라본 채 캠코더를 들이대고 자기를 찍느라 바쁘다. 통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소피에게 아빠는 알아갈수록 오히려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은 존재다. 후반부에서 소피와 자꾸 결계를 치듯 분리되고 밀어내려는 캘럼의 태도는 그 나이의 어린 소녀가 온전히 다 받아들이기 불가해한 영역이다. 그런 가운데 아빠의 공백을 소피는 또래, 그리고 좀 더 나이가 많은 소년소녀들과 어울리며 메운다. 선물과 호의를 얻기도 하고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아 첫 키스도 경험한다. 아빠는 소피의 고백에 놀라면서도 자신이 먼저 경험했을 법한 그런 질풍노도의 시작을 염려하고 격려해준다.
 
아빠의 나이가 돼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영화 <애프터썬> 스틸 이미지.

영화 <애프터썬>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그런 짤막한 상황들이 연이어 계속되며 이들 부녀의 여행은 끝나간다. 그리고 어른이 된 소피는 이제 자신의 가족을 이룬 삶을 살아가던 중 오랜만에 20년 전 영상기록을 확인한다. 과거엔 집 어딘가에 자리를 차지하던 가족 사진첩이 있었던 걸 기억한다면 이사준비나 명절전야에 우연히 먼지 툭 털어내고 페이지를 넘기며 회상에 잠기곤 했던 우리들의 원체험을 이 영화가 고스란히 압축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될 테다.
 
아마 영화를 구성하는 세 갈래 파트 중 가장 짧고 모호한 분량인 캘럼의 클럽 씬 속 그의 표정이 아빠의 당시 혼란스러운 심경을 표출하려는 상징적인 통로일 것이다. 어쩌면 아빠는 딸과의 여행 이후 극단적 선택을 했거나 끝내 자신이 원했던 삶을 찾는 데 실패하고 멀어져갔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 현실 소피의 삶에서 캘럼과의 접점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또 다른 파트, 이제 어른이 된 소피의 회상 장면 속, 오랜만에 발굴된 그의 캠코더 속 영상 일기장은 이제 아빠의 나이를 초과해버린 소피가 당시에는 미처 볼 수 없었던 둘 사이의 관계와 아빠의 심정을 이해하게 해준다. 너무 뒤늦게야 깨닫거나 관계를 더 이상 연장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서야 알게 된 수많은 자식들의 발견이 고스란히 반복되는 셈이다. 그런 뭉클한 회한이 순도 높게 재현되는 영화 속의 순간들은 주인공들 각자의 송가와도 같은 2개의 명곡에 의해 관객의 뇌리에 마치 인장을 찍듯이 각인된다.
 
비언어적 스토리텔링의 절정, 명곡의 활용법
 
전반적으로 <애프터썬>에서 풍경과 음악의 사용은 기가 막힌다. 별 것 아닌 것처럼 설렁설렁 지나가는 터키의 여름 풍광은 캘럼과 소피 역할을 맡은 다른 세대의 두 배우가 절묘하게 뿜어대는 중력장의 훌륭한 무대가 되어준다. 20년 전 과거로 설정된 여행 상황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적절하게 BGM 기능을 수행한다. 그중에도 앞서 언급했던 2개의 록 명곡이 단지 배경음악을 훌쩍 넘어 캐릭터의 심경과 상황을 비언어적 수단으로 해설해준다.
 
아빠 캘럼의 송가는 '퀸'이 또 다른 전설 데이비드 보위와 함께 1981년에 발표한 명곡 'Under Pressure'다.
 
Pressure pushing down on me
압박감이 나를 짓누르고
Pressing down on you, no man ask for
너를 짓누르네, 누구도 원하지 않는데
Under pressure that burns a building down
압박감 아래, 그건 건물을 불태우고
Splits a family in two
가족을 둘로 가르며
Puts people on streets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지

 
영화를 봤던 이들이라면 작품 속 캘럼의 캐릭터가 마치 박제된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이 노래를 다시 듣게 될 테다. 조금 더 그의 여행 당시 심정을 대변하는 가사를 살펴보자.
 
 영화 <애프터썬> 스틸 이미지.

영화 <애프터썬>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It's the terror of knowing what this world is about
이 세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는 건 끔찍한 일이야
Watching some good friends screaming, "Let me out!"
착한 친구들이 "내보내 줘!"라고 소리치는 걸 보면서
Pray tomorrow gets me higher
내일은 더 나아지기만을 기도하지
Pressure on people, people on streets
사람들을 짓누르는 압박감, 길을 걷는 사람들
 

노래의 가사를 음미하며 캘럼의 극중 표정을 상기한다면 자연스레 당시 그의 심리상황과 운명을 예견할 수 있을 테다.
 
한편, 유원지의 저녁 리퀘스트 무대에서 끝내 아빠와의 듀오 공연이 무산된 채 가라오케 독창으로 소피가 부르던 곡 역시 의미심장하다. U2와 함께 1990년대 모던 록의 대서양 사이로 양대 산맥을 이뤘던 R.E.M의 대표곡인 1991년 발표 'Losing My Religion'을 갓 10대가 된 주인공이 음정 박자 엉망인 채로 부르는데 이게 더 노래의 가사와 기막히게 '통'한다.
 
Oh life is bigger
오, 삶은 더 커
It's bigger than you
당신보다 더욱 크지
And you are not me
그리고 당신은 내가 아니야
The lengths that I will go to
내가 가야할 그 거리
The distance in your eyes
당신 눈 속의 소원함
Oh no I've said too much
오, 아냐, 내가 너무 많이 말했어
I set it up
내가 자초한 거지

 
과연 작중 소피가 캘럼을 당시에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었을까는 상상에 맡기더라도 이 평범하지 않은 부녀관계를 이만큼 딱 들어맞게 형상화한 가사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이제 아빠의 부재 속 어른이 되어 아빠를 이해하게 된 소피의 회한 가득한 표정과도 일맥상통한다.
 
That's me in the corner
저 구석에 있는 게 나야
That's me in the spot-light
스포트 라이트를 받고 있는 게 나라고
Losing my religion
인내심을 잃어가면서
Trying to keep up with you
당신과 맞춰가려고 애쓰지만
And I don't know if I can do it
내가 그걸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Oh no I've said too much
오, 아냐, 내가 너무 많이 말했어
I haven't said enough
충분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 영화가 데뷔작(!)인 감독은 자신의 자전적 체험을 상당부분 녹여내 <애프터썬>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런 전후사정을 연결하면 아마 이 선곡은 감독 본인의 어릴 적 애청곡이자 그가 자기 경험을 투영하는 공감으로 선택했을 청춘의 송가일 테다. 영화 속 해당 장면에서 아빠의 부재와 도피에 화가 나면서도 남매처럼 서로를 보듬어가려는 조숙함 속에서 성숙해가는 소피(그리고 감독) 본인의 존재감과 찰떡으로 어울리는 매치다. 둘 다 워낙 명곡이라 반갑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선 특별히 꼼꼼하게 자막을 표기해둔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눈에 쏙쏙 들어오는 대사로 이 특별한 부녀가 서로 온전히 전부 전달하지 못한 마음이 전해지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화는 누구나 가슴 한 구석에 간직하지만 쉽게 꺼내거나 타인과 나누지 못하는 어떤 감성의 보석 상자를 활짝 펼쳐낸다. 이 영화가 전 세계를 석권하며 쓸어 담은 상의 무게나, 역시 놀라운 데뷔작 이후 미국 영화계의 주목받는 신성이 된 배리 젠킨스의 참여는 직접 영화를 목격하는 체험의 무게에 비하면 사족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놀라운 영화다. 그래서 구구절절 풀어내기보단 이심전심으로 극장에서 만나보길 권한다. 아마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설 때는 관객 각자가 자신만의 <애프터썬>을 구상하기 시작할 테다.
 
<작품정보>
애프터썬 Aftersun
2022|영국, 미국|드라마
2023. 2. 1. 개봉|101분|12세 관람가
감독 및 각본 샬롯 웰스
제작 배리 젠킨스(아카데미 작품상 '문라이트' 연출)
주연 폴 메스칼(캘럼 역), 프랭키 코리오(소피 역), 실리아 롤슨-홀(어른 소피 역)
수입 및 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및 공동배급 ㈜안다미로
 
2022 75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초청, 프랑스 터치상
2022 영국독립영화상(BIFA)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신인감독상, 촬영상, 편집상, 음악상
2022 고담 어워즈 신인감독상
2022 뉴욕비평가협회상 데뷔작품상
2023 팜스프링스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감독상
2022 로스앤젤레스비평가협회상 편집상
2022 시카고비평가협회상 신인감독상
2022 보스턴비평가협회상 신인감독상, 편집상
2022 라스베가스비평가협회상 신인감독상
2022 애틀란타비평가협회상 데뷔작품상
2022 뮌헨국제영화제 시네비전상
2022 상파울루국제영화제 심사위원 작품상
2022 미국비평가협회상 신인감독상, 영화 톱
2023 전미비평가협회상 감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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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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