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레트로 열풍에 발맞춰 1990년대 대중가요가 다시금 조명받고 있습니다. 장르 및 시대를 아우르는 과거 명반을 현재 시각에서 재해석하며 오늘날 명반이 가지는 의의를 되짚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김건모 1집 앨범 이미지

김건모 1집 앨범 이미지 ⓒ 덕윤산업

 
'핑계'와 '잘못된 만남'으로 연속 밀리언셀러와 기네스북의 최고음반 판매량이란 블록버스터 기록을 써낸 '대박가수', '국민가수' 김건모의 등장을 알린 기념비적 작품이다. 해외로 예를 들면 마이클 잭슨의 글로벌 스매시 앨범 < Thriller > 이전의 < Off The Wall > 격이랄까. 이후의 흥행대폭발을 가져온 예고편이자 신호탄이다.

대중과의 첫 만남이라는 점에서 일각의 사람들은 이후의 대박 곡들보다 이 앨범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를 김건모 시그니처 송으로 여기기도 한다. 곡 자체의 우수성은 물론이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열풍의 기운이 여전했던 1992년 가을, 모든 가수와 노래들이 묻혀버렸던 쓰나미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그 강력한 생존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는 실로 서바이벌 게임의 승리를 견인한 곡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각별한 존재감을 갖는다. 거기에 김건모라는 최고 가창력의 국민가수를 굴착해낸 곡이라는 점이 더해지면 역사적 위상도 포획한다. 그를 발굴한 전설의 프로듀서 김창환이 김건모에게 주목한 것은 지금도 가창 부문에서 높은 난도를 갖는 이 노래를 숨을 멎게 할 정도로 너무도 능란하게 소화해내는 역대급 보컬 역량이었다.

당대의 기류와 호흡은 워낙 막강해 모든 것을 심지어 보컬 스타일마저 동일화한다면 김건모는 비(非) 동일자, 다른 사람으로 남으려는 안티테제 코드의 위인이었다. 그는 너무도 달랐다. 다르게 불렀다. 이후 천부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놀라운 호흡과 곡 진행능력, 그리고 남들과 완벽하게 분리선을 치는 대중가수에게 가장 중요한 특별한 음색을 구비한 보컬 천재로 군림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보컬의 색깔이 그를 국민가수로 등극하게 만들었다. 앨범에 수록된 곡 '오후가 있는 풍경'의 가사 '어둔 잿빛 하늘 아래'처럼 그의 보컬 컬러는 그 어둔 잿빛, 바로 흑(黑)색이었다. 흑인음악의 영웅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와 같은 풍부한 소울과 R&B 감각을 타고난 김건모의 특급 가창력은 '너와 이어진 슬픔'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그야말로 검게, 유려하게, 구성지게 피어난다.

그래도 김창환 프로듀서는 그의 짜릿한 고음을 확 살려주는 노래가 없다는 판단에서 상쇄의 일환으로 '슬픈 추억'을 썼다고 나중 술회한 바 있다. 이 곡의 '그댄 나와 같은 길을 함께 가는 사람인 걸/ 그대 멀리 있어도 느끼며 살아가리/ 내 마음속에 그대 모습이 떠날 때까지...' 부분에서 김건모의 보컬은 실로 높고 아름답다.

김창환은 그를 통해 당대의 트렌드인 흑인음악 스타일을 총체적으로 배열하고 묘사하려는 의욕을 품었을 것이다. 그 결과가 R&B의 보석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와 레게리듬을 살짝 드리운 '첫인상'이었다. 그 뒤 한반도 반쪽을 물들인 레게열풍의 '핑계'가 나온 것을 보면 '첫인상'은 확실히 레게의 맛보기, 애피타이저 역할을 했다.

레게의 맛보기, 김건모의 입지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 라인음향

 
이 노래는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의 후속곡으로 KBS <가요톱10> 골든컵을 수상하는 빅 히트를 기록하면서 신인 김건모의 입지를 탄탄하게 해 주었다. 그의 이력 초기에 방점을 찍은 곡인 셈이다. 만약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로 1집 활동이 마감되었다면 이후의 슈퍼스타 행진은 어려웠을 수도 있다.

김건모의 미친 존재감만큼이나 우린 상기한 것처럼 김창환의 당대 흑인음악 사조에 대한 이해를 주시해야 한다. '백에서 흑으로!' 음악 지배정서의 대이동을 일궈낸 업적의 주인공답게 김창환은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를 통해 R&B와 랩은 물론 본고장 미국 힙합 문화의 일부인 '샘플링(sampling)'을 시도한다.

작곡자 박광현과 이 앨범 작업을 함께 하면서 마침 그가 이승철에게 써준 곡 '잠도 오지 않는 밤에'를 인지한 김창환은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를 녹음하면서 이미 써놓은 멜로디 대신에 이승철의 곡을 삽입하려는 구상을 실천했다. 과거시제와의 연결 그리고 예술적 완성도 제고를 위한 방식으로 본고장 힙합 씬에서 하나의 문화가 된 샘플링 기법을 국내 음반 사상 최초로 실험한 것이다.

그가 얼마나 흑인음악의 한국화에 열성이었는가를 일러주는 대목이다. 팬들은 당대 기준에서 트렌디한 이 곡에 부담은커녕 융숭하게 화답했다. 애초 앨범의 타이틀곡은 첫 곡인 발라드 '이별 뒤의 그림'이었으나 곧바로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로 교체된 것은 음악수요자의 기호를 반영한 결과였다.

앨범은 또한 그 무렵 음악의 작곡 프로듀서 부문에서 선두를 형성했던 네 사람의 출중한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그 네 강자는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등 2곡을 작곡하고 7곡의 가사를 쓴 김창환을 비롯해 박광현, 김형석, 천성일이다. 박광현은 '이별 뒤에 그린 그림' 등 3곡을, 김형석은 '첫인상' 등 2곡, 천성일도 '내가 그댈 느끼는 동안' 등 2곡을 썼다.

사대천왕이 할거하는 작품답게 그 이름값이 적절히 발휘되면서 수작을 주조하는 데 성공했다. 코러스의 멜로디만으로도 단 한 곡도 놓칠 수가 없다. 1992년 기준으로는 R&B 발라드 선율과 리듬 패턴이 너무 추세를 앞서갈 만큼 생소해서 타이틀곡이 되지 못한 비운의 곡 '내가 그댈 느끼는 동안'은 김창환의 설명에 따르면 앨범에서 가장 아쉬운 숨은 보석이다.

전체적으로 발군의 선율과 시대감각을 갖춘 트렌디 걸작으로 부족함이 없다. 이 점은 김건모의 슈퍼스타덤을 예고한 앨범, '김건모-김창환' 콜라보의 스타트, 당대 흑인음악의 친절한 가이드 등 늘 언급되어온 앨범의 역사적 의미들을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작아지지 않는 앨범의 진정한 가치일 것이다. 전부가 청취의 환희를 부르는 곡들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대중음악 웹진 '이즘'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임진모 기자는 대중음악 평론가이자 팝 칼럼니스트로 대중음악 웹진 이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명반다시읽기 김건모 잠못드는밤비는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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