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가 배경인 tvN 사극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2>에 매우 활력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임금(오경주 분)의 이복동생인 옹주 이서이(우다비 분)가 바로 그다. 특권층 대신들의 눈치를 살피는 이복오빠와 달리 그는 안하무인의 극치를 보여준다. 언제나 자기중심으로 행동할 뿐 아니라, 군병들을 끌고 다니며 위세를 부릴 때도 있다.
그런 그가 주인공 유세풍(김민재 분)에게 열렬히 구애하고 있다. 유세풍이 명확히 거절하는데도, 유세풍 옆에 동료 서은우(김향기 분)가 있는데도 권력을 남용해 자기 뜻을 이루려 한다. 중매혼을 안 하면 왕따를 당하는 시대 분위기에 관계없이 그는 자유결혼을 열정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조선 후기인 인조시대를 살았던 효명옹주도 안하무인이었다. 병자호란 패전의 상처를 입은 인조가 40대 초반에 얻은 고명딸인 그는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어머니인 후궁 조귀인(귀인 조씨) 역시 두 아들인 숭선군 및 낙선군보다 옹주를 훨씬 편애했다.
조귀인이 '딸바보'였다는 점은 훗날 인조가 죽고 2년 뒤에 숭선군이 역모 혐의를 받을 때 숭선군의 보모인 예금(禮今)의 입에서도 나왔다. 의금부의 수사 및 심문 기록인 추안(推案)과 국안(鞠案)을 수록한 <추안급국안>에서 그 진술을 확인할 수 있다.
<추안급국안>에 따르면, 음력으로 효종 2년 2월 13일(양력 1653년 3월 4일) 심문을 받은 예금은 조 귀인이 옹주만 편애한 일을 설명하면서 조귀인이 숭선군에게 "빨리 죽어 버리라"고 저주하는 일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이 때문에 숭선군의 여자 하인들이 "딸자식을 어찌 이렇게 편애하고 아들을 어찌 이렇게 미워한다 말인가?"라며 한탄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이 효명옹주를 얼마나 도도하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옹주의 결혼 때 있었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이 효종의 부마인 정재륜의 <공사견문록>을 인용해 그 일화를 소개한다.
이에 따르면, 11세 된 새신부의 혼인을 축하하는 잔치에 왕실 여성들이 참석했다. 이 자리의 어른은 인평대군(옹주의 이복오빠)의 부인인 오씨였다. 그러나 옹주는 오씨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인평대군은 옹주보다 15세 많았다. 아내가 남편보다 몇 살 많은 경우가 흔했으므로, 오씨와 옹주의 나이차는 그보다 컸을 수도 있다. 10대 후반에 자녀를 낳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오씨와 옹주는 호적상으로는 형제 항렬이지만 실제로는 부모·자식뻘이 될 수도 있었다.
우리 시대에는 맞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혈통을 놓고 봐도 오씨와 옹주 사이에는 커다란 벽이 놓여 있었다. 인평대군은 인조의 정실부인인 인렬왕후 한씨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인평대군과 혼인한 오씨는 왕실의 적통 신분을 갖고 있었다. 이 시대 관념으로 보면 후궁의 딸인 효명옹주보다 훨씬 나은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효명옹주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올케인데다가 나이 차이도 컸던 것으로 보이고 적통 혈통까지 갖고 있었던 오씨의 지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11세 된 이 소녀는 오씨보다 자신이 상석에 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옹주는 자신의 품계가 더 높다는 점을 내세웠다. 대군의 부인인 부부인은 정1품인 데 비해, 옹주나 공주는 그보다 위인 무품(無品)이었다. 왕실 가족들이 자신의 혼인을 축하해주려고 모인 자리에서 굳이 이 점을 거론했던 것이다.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랫사람이 회사 직급을 내세워 집안 어른보다 상석에 앉으려 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일이었다. 국가 품계를 앞세워 친족 서열을 무시하는 옹주의 모습은 그가 평소에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을지를 짐작케 한다.
그런데 오씨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왕실의 적통이라고 주장했다. "서로 버티어 결정을 짓지 못했다"는 <연려실기술> 기록은 논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알려준다. 이들의 석차 논쟁은 옹주의 승리로 끝났다. 소식을 들은 인조가 옹주의 손을 들어준 결과였다.
이 조치가 왕실 분위기에 맞지 않았다는 점은 이를 계기로 왕족들의 우애가 서먹해졌다는 <연려실기술>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친족 서열이 아닌 국가 품계에 따라 서열을 정해준 결과였다. 훗날 인조의 아들인 효종이 오씨를 공주들보다 상석에 앉게 한 것은 이 사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담은 것이었다고 <연려실기술>은 평한다.
이런 사례에서도 나타나듯이 효명옹주는 인조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이 같은 편애가 그를 안하무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효명옹주는 안하무인이었다는 점에서는 <유세풍 2>의 옹주를 연상케 하지만, 혼인 문제와 관련해서는 정반대 사례의 주인공이 됐다. <유세풍 2>의 옹주가 자유결혼을 추구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효명옹주는 전형적인 정략결혼의 주인공이 됐다.
효명옹주의 남편을 뽑는 1647년 부마 간택 때 최종 3인으로 뽑인 후보 중 최고 득점자는 예조판서 정태화의 아들이었다. 인조 정권의 실세인 김자점의 손자이자 김식의 아들인 김세룡도 3인에 들었지만, 점수에서는 정태화의 아들에게 밀렸다.
그렇지만 결과는 다르게 나왔다. 음력으로 인조 25년 8월 16일자(1647년 9월 14일자) <인조실록>은 "효명옹주를 낙성위 김세룡에 시집보냈다"라고 한 뒤 조귀인에 대한 인조의 비할 데 없는 총애로 인해 이 혼사가 매우 화려했다고 설명한다.
김자점의 손자가 부마가 된 것은 조귀인과 김자점의 협력 때문이었다. 신명호 부경대 교수의 <조선공주실록>은 "조귀인은 간택단자를 수정하는 음모를 꾸몄다"라며 "김식이 급하게 단자를 올리느라 아들의 사주를 잘못 썼다는 핑계를 대고 다시 좋은 사주로 바꾸어 쓰게 했다"라고 설명한다. 부마 간택의 결정적 요소인 사주팔자 및 궁합을 바꾸고자 생년월일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권세에 바탕을 둔 이 정략혼은 불행으로 귀결됐다. 2년 뒤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해 김자점의 권세가 무너지면서 이 결혼은 파탄났다. 김자점·조귀인·김세룡은 효종에게 도전한 죄로 사형을 받았다. 효명옹주는 목숨은 건졌지만 유배형을 받았다. 1700년, 그는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유세풍 2>의 옹주가 어떤 운명을 걷게 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효명옹주와 달리 자유결혼을 추구하는 점은 그를 활력 있게 보이도록 한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방영분만 놓고 보면, 그가 자유결혼을 이룰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유세풍의 시선은 돌싱 서은우에게 고정돼 있을 뿐이다.